손이 오그라든 병자 앞에서 예수님이 안타까움을 느낀 것이 아닙니다. 손이 오그라들거나 그보다 더 심한 병이 든 사람은 세상에 얼마든지 많았습니다. 예수님이 정말 안타까워 한 것은 그 손이 오그라든 병자를 이용해서 예수님을 시험대에 올리려는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노기를 띤 얼굴로 그들을 바라보십니다. 그들의 장님이 되어버린 마음이야말로 예수님이 안타까워 하셨던 것이지요. 그들은 남을 돕기는 커녕 남을 시험대에 들게 하고 공격하고 무너뜨리려는 악한 마음을 지니고 있었으니까요. 그들이야말로 진정 마음이 오그라든 사람들이었고 치유가 시급한 사람들이었지요. 예수님에게 오그라든 손을 펴는 것은 아무 일도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말 한마디로 그를 치유하시지요. 하지만 닫혀진 마음, 그들의 자유의지로 스스로 닫아버린 마음은 열리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당신의 전능으로 그들을 저주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연민’의 마음을 지니셨습니다. 그들을 불쌍히 여기셨지요. 분노는 일어났지만 그것에 사로잡히진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하게 두셨지요. 우리가 우리 주님 그리스도를 통해서 갈구하고 얻어야 할 것은 육체의 질병의 개선이 아닙니다. 무엇보다도 시급한 것은 우리의 닫혀진 마음을 여는 것입니다.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통상적으로 가톨릭의 성직자(거룩한 직분을 받은 자)를 신부님이라고 부르고 개신교의 목회자(회중을 사목하는 자)를 목사님이라고 부릅니다. 당연히 이를 올바로 구별하기 위해서는 가톨릭(또는 천주교)과 개신교의 차이를 알아야 하겠지요? 기독교라는 말은 ‘그리스도교’의 한자 음역을 한 단어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통상적으로 가톨릭과 개신교를 모두 포함하는 말입니다. 정확하게 표현하기 위해서는 천주교(가톨릭: 보편적)과 개신교(프로테스탄트: 저항)로 표기하는 것이 맞습니다. 먼저는 예수님입니다. 2000여년 전 인류사에서 한 인물이 등장을 했고 엄청난 이슈를 남기게 되었지요. 그리고 그를 추종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생겨나게 됩니다. 소위 ‘믿는 이들의 공동체’인 교회가 생겨나게 된 것이지요. 그리고 이 교회는 역사를 통해서 그 덩치를 키우게 됩니다. 그리고 덩치가 커지니 만큼 순수했던 처음의 열정이 사라져가고 온갖 사람들이 그 안에 들어서게 되지요. 그리고 엉뚱한 움직임들이 많이 등장하게 됩니다. 즉 교회의 본질에서 벗어나는 많은 모습들이 보이게 되었지요. 돈에 대한 탐욕, 권력에 대한 집착과 같은 움직임들입니다. 그리고 자연스레 그에 반발하는 움직임이 등장하게 되지요. 그것이 바로 개신교의 시초인 셈입니다. 루터라는 인물이 95개조의 반박문을 쓰고 했다는 역사적인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그로부터 개신교 형제들이 자기들의 신조를 들고 갈려 나오기 시작 했습니다. 그들은 오직 믿음, 오직 성경, 오직 은총과 같은 구호를 외치면서 가톨릭에서 갈려 나와 자신들이 진정한 초대교회의 정통성을 이어 받았다고 주장하기 시작했지요. 그리고 가톨릭은 여전히 가톨릭대로 자신들이 정통성을 이어가고 있다고 하고 있는 상황이 펼쳐지게 됩니다. 우리의 몸이 때로는 아플 수 있습니다. 하지만 몸이 아프다고 해서 성한 팔을 따로 잘라내지는 않는 것처럼 공동체도 마찬가지여야 합니다. 공동체가 아프면 모두 힘을 모아서 그 아픈 부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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