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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

삶의 진실을 아는 데에는 그에 상응하는 책임감이 필요합니다. 곧잘 흥분하는 사람에게 진실을 이야기하면 그는 그것을 듣고 흥분하기만 할 뿐입니다. 뒷담화를 잘 하는 사람에게 진실을 이야기하면 그는 입이 간질거려 견디지를 못할 것입니다. 진실은 그것을 정의와 공정, 그리고 사랑으로 다룰 수 있는 사람에게 전해지는 것이 합당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대부분 진실을 듣는 순간 앞뒤 가리지 않고 즉시 판결을 내려 버립니다. 심지어는 우리가 듣는 것이 진실인지 아닌지도 분별하지 않지요. 무엇이 진실이란 말입니까?

사실 모든 진실이 있는 그대로 드러나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수많은 이들은 진실의 일부만을 접할 뿐이지요. 그리고 그것으로 섣불리 판단하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특히 위험한 것은 그것이 진실일 수는 있으나 ‘진리’가 되지는 않는다는 것을 사람들은 이해하기 힘들어합니다.

그릇된 진리 안에서 진실을 이용하는 사람이 있기 때문입니다. 즉, 불화를 꾀하고 서로 다투게 하고 이간질을 시키기 위해서 진실을 이용하는 사람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실제로 그런 일은 많이 일어나고 있지요. 아주 간단한 예로 연예인 사생활이 까발려지는 것은 분명 진실일 수 있지만 그것이 왜 그 순간에 까발려지는가에 대한 진리를 사람들을 깊이 파고들지 못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진리가 무엇이냐?’

빌라도가 예수님에게 물은 질문이지요. 그는 진실에만 관심이 있을 뿐 진리에는 관심이 없었던 것입니다. 결국 진리를 감당하지 못한 그는 물에 손을 씻으면서 자신은 이 일에 상관이 없다고 하지요. 하지만 그것은 진리를 거부하는 행위였습니다.

방심하고 있으면 진리를 벗어난 진실이 우리를 삼켜 버릴지도 모릅니다. 거듭 말하지만 우리는 모든 진실을 알 수 없습니다. 그것은 오직 하느님의 몫입니다. 우리는 다만 진리를 향해서 나아갈 수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이런 설명을 듣고도 분명히 묻는 이들이 있을 것입니다.

‘진리가 무엇입니까?’

어린 아이가 다리를 다친 강아지를 보고 자신도 아픔을 느낄 때, 거기에 진리의 단편이 숨어 있다고 하면 이해할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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