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가 다른 사람들의 허물을 용서하면,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를 용서하실 것이다. (마태 6,14)
그리스도교 신앙에서 용서의 핵심은 바로 위의 구절입니다. 우리가 용서하기 힘들어하는 이유는 ‘억울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에게 해코지를 한 그가 나에게 행한 행동을 역으로 모조리 갚아야 용서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요. 하지만 그때부터는 이미 용서가 아닌 셈입니다. 내가 유리잔을 가지고 있었는데 상대가 그것을 깨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새로운 유리잔을 사다 주면 도대체 내가 용서할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는 충분한 보상을 한 셈이지요. 누가 나에게 욕을 해서 그만큼 미안하다고 뉘우치고 내가 당한 수모 만큼 사람들 앞에서 자신도 수모를 당했습니다. 그럼 쌤쌤인 것이지요.
그리스도교 용서의 기본은 ‘우리와 하느님의 관계 안에서 용서’입니다. 그리고 이 근본에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하느님 앞에서 행하는 ‘불충실’에 대한 하느님의 무한한 자비가 전제되어 있지요.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로서 ‘사랑’의 속성을 지니고 있어야 합니다. 그런 우리가 누군가를 미워한다는 자체부터 하느님에게 어긋나기 시작하는 셈이지요. 그럼에도 하느님은 우리를 미리 용서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헌데 그런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용서하지 못하겠다고 나서는 순간부터 우리는 우리 스스로 하느님에게서 멀어지는 선택을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용서 없는 용서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실천하는 용서는 우리에게서 나오는 선이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선물 받은 선이지요. 우리가 용서를 실천할 때마다 하느님은 그만한 용서의 은총을 우리에게 부어주시는 것입니다.
용서는 억울함을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당한 모든 기억이 사라지지는 않습니다.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고 그렇게 되어서도 안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의 기억을 통해서 여러가지 것들을 ‘예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돌부리에 차이고 그 사실을 잊어버린다면 또다시 같은 행위를 반복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상처에 대한 ‘기억’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상처는 더는 아프지 않은 셈이지요. 왜냐하면 하느님이 당신 사랑의 묘약으로 우리의 영혼을 치유하셨기 때문입니다.
상처 받았다고 생각할 때에 하느님의 사랑을 떠올릴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바로 거기에서 우리의 신앙이 드러나기도 합니다. 죽어도 용서할 수 없다고 나서는 사람은 결국 하느님을 신뢰하지 못하겠다고 부르짖는 사람과 같습니다. 그는 눈에 보이지 않는 주님의 사랑을 거부하고 오직 눈으로 볼 수 있는 선에서 모든 것을 바로 잡겠다는 사람이지요. 그러나 그는 심각한 오류에 빠져 있습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에서 용서의 핵심은 바로 위의 구절입니다. 우리가 용서하기 힘들어하는 이유는 ‘억울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에게 해코지를 한 그가 나에게 행한 행동을 역으로 모조리 갚아야 용서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요. 하지만 그때부터는 이미 용서가 아닌 셈입니다. 내가 유리잔을 가지고 있었는데 상대가 그것을 깨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새로운 유리잔을 사다 주면 도대체 내가 용서할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는 충분한 보상을 한 셈이지요. 누가 나에게 욕을 해서 그만큼 미안하다고 뉘우치고 내가 당한 수모 만큼 사람들 앞에서 자신도 수모를 당했습니다. 그럼 쌤쌤인 것이지요.
그리스도교 용서의 기본은 ‘우리와 하느님의 관계 안에서 용서’입니다. 그리고 이 근본에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하느님 앞에서 행하는 ‘불충실’에 대한 하느님의 무한한 자비가 전제되어 있지요.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로서 ‘사랑’의 속성을 지니고 있어야 합니다. 그런 우리가 누군가를 미워한다는 자체부터 하느님에게 어긋나기 시작하는 셈이지요. 그럼에도 하느님은 우리를 미리 용서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헌데 그런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용서하지 못하겠다고 나서는 순간부터 우리는 우리 스스로 하느님에게서 멀어지는 선택을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용서 없는 용서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실천하는 용서는 우리에게서 나오는 선이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선물 받은 선이지요. 우리가 용서를 실천할 때마다 하느님은 그만한 용서의 은총을 우리에게 부어주시는 것입니다.
용서는 억울함을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당한 모든 기억이 사라지지는 않습니다.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고 그렇게 되어서도 안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의 기억을 통해서 여러가지 것들을 ‘예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돌부리에 차이고 그 사실을 잊어버린다면 또다시 같은 행위를 반복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상처에 대한 ‘기억’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상처는 더는 아프지 않은 셈이지요. 왜냐하면 하느님이 당신 사랑의 묘약으로 우리의 영혼을 치유하셨기 때문입니다.
상처 받았다고 생각할 때에 하느님의 사랑을 떠올릴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바로 거기에서 우리의 신앙이 드러나기도 합니다. 죽어도 용서할 수 없다고 나서는 사람은 결국 하느님을 신뢰하지 못하겠다고 부르짖는 사람과 같습니다. 그는 눈에 보이지 않는 주님의 사랑을 거부하고 오직 눈으로 볼 수 있는 선에서 모든 것을 바로 잡겠다는 사람이지요. 그러나 그는 심각한 오류에 빠져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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