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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한 인심

극심한 가난을 겪으면서도 아주 후한 인심을 베풀었습니다. (2코린 8,1)

아마 여러분들 가운데 한 사람을 이 곳에 데려와서 지금 이들이 사는 환경에 살라고 한다면 참으로 힘든 생활이 될 것입니다. 한국에서 아무리 없이 산다고 해도 적어도 스마트폰은 들고 있으니 지금 이 글도 읽을 수 있는 셈이지요.

제가 아픈 이후로 저녁마다 제 식사를 챙겨주러 봉사하러 오는 자매들이 있습니다. 헌데 그들의 집에 가보면 참으로 초라한 모습을 볼 수 있지요. 도리어 도움을 받아야 하는 것은 그들인데도 그들이 저에게 와서 제 식사를 챙겨주는 것입니다. 때로는 과일도 들고 오고 야채도 들고 오고 하면서 지극 정성으로 저를 돌보고 있지요.

사람들은 흔히 부자가 되면 돕겠다고 말을 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되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설령 돕더라도 회사의 ‘사회사업비’에서 떼어 주거나 자신이 다 쓰고 겨우 남는 것을 줄 뿐입니다. 그들은 ‘돕는다’는 것의 실제적인 의미를 전혀 알지 못합니다.

남을 돕는다는 것은 단순히 물질에 관련된 것이 아닙니다. 돕는다는 것은 내가 가진 어떤 것이든 상대에게 쓰일 만한 것을 나누는 행위를 의미합니다. 그것이 상대의 필요에 따라서 바뀌는 것이지요. 정말 당장 내일 먹을 것이 없는 이들에게는 음식을 가져다 주어야 마땅합니다. 헌데 남아도는 옷을 가져다 주면서 그들을 도왔다고 생각하는 것은 곤란합니다. 그들은 옷이 없어서 추운 게 아니라 배가 고픈 것이니까요. 또 반대로 교육이 필요한 곳이면 교육을 해야 합니다. 한국 같으면 관심을 필요로 하는 곳이 참으로 많을 것입니다. 하루 삼시 세끼를 어떻게든 해결하고 있는 이에게 음식을 잔뜩 싸들고 가면 그 며칠 동안 잘 먹을 순 있어도 그 뿐입니다.

사제로 일하면서 정말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보다도 따스한 사랑이고 나아가 길을 가르쳐주는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당장 먹을 것이 없는 기아 상태가 아닌 이상 사람은 생활 수준이 높고 낮을 뿐 인간으로서 존엄하게 살아갑니다. 그러면 그때부터는 그들이 바른 길을 가도록 도와주는 것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제 본당 사람들은 없이 살면서도 베풀 줄 아는 사람으로 변해 가고 있습니다. 물론 아직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모두가 그렇게 되지도 않을 것이 분명하지요. 세상 어느 공동체도 완벽한 공동체는 없으니까요. 그러나 정말 집에 가면 초라한 생활을 하는 어느 젊은이가 본당에 와서 잔디라도 깎으려고 도움을 내어주려는 모습은 참으로 아름다운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후한 인심’을 아는 이들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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