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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

육체적 고통은 피할 수 없는 것입니다. 육체적 고통이 다가오면 우리는 그것을 인내하면서 치유 수단을 찾아야 합니다. 그리고 치유 수단이 없으면 받아들이는 수 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그 육체적 고통이 왜 야기되는지를 올바로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술을 마신 사람이 간이 나빠지거나 담배를 피우는 사람이 폐가 나빠지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건 그가 스스로 행한 악습의 결과일 뿐입니다. 그렇다면 그는 그 결과 앞에서 겸손해져야 하고 그것을 받아들여 인내하고 치유하려고 노력하면서 하느님의 자비를 구해야 합니다.

정신적 고통은 물론 외부의 동기가 작용하는 것이지만 우리 스스로 스트레스를 조장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지나친 걱정과 근심으로 우리 스스로 정신을 피폐하게 만드는 것이지요. 같은 외부의 동기를 지니고도 오히려 하느님에게 감사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나를 미워하는 사람을 두고 한 사람은 스트레스를 받고 그를 향한 분노의 마음을 꺼내는가 하면 다른 이는 그 미워하는 사람을 두고 사랑하려고 노력하고 기도하려고 노력하면서 인내를 기르고 또 그 안에 숨어있는 하느님의 뜻을 찾기도 하는 것입니다.

영적 고통은 하느님을 잃어서 괴로운 영혼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이 세번째 고통에 있어서 많은 사람들은 아예 생각조차 하지 않고 있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자신이 하느님을 잃고 사는지 함께 사는지 심각하게 고려하지 않지요. 그리고 이 영혼의 고통이야말로 정신과 육신의 고통을 몰고 오는 바탕이 됩니다. 여기에 대해서 좀 더 설명할 필요가 있습니다.

영혼이 공허한 사람은 그것을 채우기 위해서 육신과 정신의 쾌락을 찾는 것입니다. 그는 더 많은 술자리를 찾아 다니다가 엉뚱한 질병과 다툼에 휘말리게 되고, 공연한 호기심으로 정신적 만족을 얻으려다가 엉뚱한 가르침에 빠지기도 하는 것입니다. 반면 영혼이 충만한 사람은 그냥 하늘을 바라다 보는 것만으로도 감사하고 행복해하면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현대인들의 심각한 일들은 거의 영혼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합니다. 그들은 스마트폰과 인터넷으로 무장하고 있지만 가장 영적으로 공허한 시대에 살고 있는 셈이지요. 과거 사람들은 밭일을 하고 천지 신명의 뜻을 기릴 줄 알았던 반면, 지금은 과학과 물질을 신봉하고 신이 없이도 얼마든지 살 수 있다는 착각을 스스로에게 심으면서 살고 있습니다.

신앙인들은 이러한 시대에 소금과 빛이 되어야 하는 존재들입니다. 그러니 신앙인을 향한 반발이 얼마나 클 것인지는 충분히 상상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 사람들이 모두 추구하는 방향에서 돌아서서 하느님의 나라를 가리켜야 하기 때문입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우리를 비웃을 것이며 나아가 우리를 핍박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자기들이 가는 길을 아니라고 하고 정말 따분하고 무료해 보이는 길을 가리키니 그들이 얼마나 기분이 나쁘겠습니까? 그러나 그 이유 때문에 야기되는 고통, 즉, 주님을 안다고 하여 당하는 박해는 바로 우리의 영광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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