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마태 5,39)
우리는 부족함과 결함이 있을 수 있고, 악의가 있을 수 있습니다. 제가 여전히 게임을 즐기고 영화를 보는 것을 즐기는 것은 나의 부족함이라 할 수 있고, 누군가가 아직 인내를 온전히 수양하지 못한 것은 결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악의’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악의’는 남이 행복해지기를 바라지 않는 마음입니다.
우리는 흔히 다른 이의 부족함과 결함을 ‘악’이라 간주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악의’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그들은 극도의 이기성 안에서 자신의 이득을 위해서라면 타인의 불행을 조장하는 것도 서슴지 않는 이들입니다. 순진한 그리스도인들은 그런 이들이 설마 있을까 생각을 합니다. 남이 괴로워하는 것을 보면서 어찌 자신이 행복해질 수 있다는 말인지 이해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알게 모르게 이런 이들이 주변에 실제로 존재하고 의외로 꽤나 있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것은 이런 이들에게 맞서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이들과 문제가 생겼을 때에 해결책을 제시합니다. 그들이 하자는 것을 너끈히 채워 주어 그들이 앙심을 품지 않도록 해야 하는 것이지요.
“누가 네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 대어라. 또 너를 재판에 걸어 네 속옷을 가지려는 자에게는 겉옷까지 내주어라. 누가 너에게 천 걸음을 가자고 강요하거든, 그와 함께 이천 걸음을 가 주어라. 달라는 자에게 주고 꾸려는 자를 물리치지 마라.” (마태 5,39-42)
그래서 어찌보면 너무나 어처구니 없어 보이기도 하는 이런 행동지침이 등장하는 것입니다. 사실 ‘악의’가 없는 이는 공격할 이유도 없습니다. 악의가 없는 이들은 합리적인 해결안을 찾으려고 노력하지요. 폭력과 강압으로 타인을 공격하는 이들은 상대를 이미 같은 형제로 바라보지 못하는 이들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부족함과 결함 때문에 악인이 공격해 들어올 때에 우리는 자연 방어태세를 갖추게 됩니다. 정당방위는 하느님의 뜻에 어긋나지 않는 행위입니다. 남들이 나의 생명을 위태롭게 하면 그에 맞서 그것을 지켜내는 것이 합당합니다. 하지만 그 이외의 여러가지 사소한 일들 앞에서 우리가 지니고 살아야 하는 마음은 위의 성경 구절과 같은 것입니다.
알아들을 수 있도록 조금 더 풀이해 보겠습니다. 악인의 내면 안에 있는 ‘악의’는 스프링과도 같습니다. 우리가 밀면 그 반작용으로 더욱 세게 밀려 나오는 것이지요. 그리고 ‘증폭성’도 지니고 있어서 우리가 섭섭한 말을 하면 그들은 그 두배의 섭섭한 말로 갚아야 하는 것입니다. 요즘 인터넷에 자신의 화를 절제하지 못하는 이들을 마주하게 됩니다. 그들은 자신이 수모를 당하면 반드시 그만한 이상의 수모를 상대에게 돌려 주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이들을 어쩌다가 마주해서 상대하게 된다면 절대로 그들에게 맞서면 안됩니다. 그들의 화가 더욱 증폭되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그들이 원하는 대로 해 주는 것이 그들을 가라앉히는 방법입니다.
그러나 이 말이 모든 것을 다 내어주라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마땅히 지켜야 하는 것들이 있게 마련이지요. 사회의 구조적인 악에는 그리스도인들이 선한 마음을 모아서 맞서 나가야 합니다. 하지만 비폭력은 언제나 우리의 중심에 머물러야 합니다. 악한 이들이 악한 수단으로 나온다고 우리도 같은 수단으로 맞서기 시작하면 결국 그들을 조종하는 근본적인 세력의 간계에 넘어가는 셈이 되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예수님은 그 정당한 방어 마저도 내세우지 않으셨다는 ‘신비적 차원’입니다. 우리가 신앙 안에 더욱 깊이 들어갈수록 예수님의 그 마음을 닮게 되고, 우리는 심지어 우리의 생명 마저도 기꺼이 내어 바칠 준비를 갖추게 되는 것입니다. ‘억울함’을 견디는 것은 참으로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주님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그분의 삶을 본받으려는 사람에게 조금씩 열려지는 특별할 은총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지만 사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우리 주님을 닮아가야 한다는 것 또한 우리가 잊어서는 안되는 중요한 사실입니다.
우리는 부족함과 결함이 있을 수 있고, 악의가 있을 수 있습니다. 제가 여전히 게임을 즐기고 영화를 보는 것을 즐기는 것은 나의 부족함이라 할 수 있고, 누군가가 아직 인내를 온전히 수양하지 못한 것은 결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악의’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악의’는 남이 행복해지기를 바라지 않는 마음입니다.
우리는 흔히 다른 이의 부족함과 결함을 ‘악’이라 간주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악의’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그들은 극도의 이기성 안에서 자신의 이득을 위해서라면 타인의 불행을 조장하는 것도 서슴지 않는 이들입니다. 순진한 그리스도인들은 그런 이들이 설마 있을까 생각을 합니다. 남이 괴로워하는 것을 보면서 어찌 자신이 행복해질 수 있다는 말인지 이해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알게 모르게 이런 이들이 주변에 실제로 존재하고 의외로 꽤나 있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것은 이런 이들에게 맞서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이들과 문제가 생겼을 때에 해결책을 제시합니다. 그들이 하자는 것을 너끈히 채워 주어 그들이 앙심을 품지 않도록 해야 하는 것이지요.
“누가 네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 대어라. 또 너를 재판에 걸어 네 속옷을 가지려는 자에게는 겉옷까지 내주어라. 누가 너에게 천 걸음을 가자고 강요하거든, 그와 함께 이천 걸음을 가 주어라. 달라는 자에게 주고 꾸려는 자를 물리치지 마라.” (마태 5,39-42)
그래서 어찌보면 너무나 어처구니 없어 보이기도 하는 이런 행동지침이 등장하는 것입니다. 사실 ‘악의’가 없는 이는 공격할 이유도 없습니다. 악의가 없는 이들은 합리적인 해결안을 찾으려고 노력하지요. 폭력과 강압으로 타인을 공격하는 이들은 상대를 이미 같은 형제로 바라보지 못하는 이들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부족함과 결함 때문에 악인이 공격해 들어올 때에 우리는 자연 방어태세를 갖추게 됩니다. 정당방위는 하느님의 뜻에 어긋나지 않는 행위입니다. 남들이 나의 생명을 위태롭게 하면 그에 맞서 그것을 지켜내는 것이 합당합니다. 하지만 그 이외의 여러가지 사소한 일들 앞에서 우리가 지니고 살아야 하는 마음은 위의 성경 구절과 같은 것입니다.
알아들을 수 있도록 조금 더 풀이해 보겠습니다. 악인의 내면 안에 있는 ‘악의’는 스프링과도 같습니다. 우리가 밀면 그 반작용으로 더욱 세게 밀려 나오는 것이지요. 그리고 ‘증폭성’도 지니고 있어서 우리가 섭섭한 말을 하면 그들은 그 두배의 섭섭한 말로 갚아야 하는 것입니다. 요즘 인터넷에 자신의 화를 절제하지 못하는 이들을 마주하게 됩니다. 그들은 자신이 수모를 당하면 반드시 그만한 이상의 수모를 상대에게 돌려 주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이들을 어쩌다가 마주해서 상대하게 된다면 절대로 그들에게 맞서면 안됩니다. 그들의 화가 더욱 증폭되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그들이 원하는 대로 해 주는 것이 그들을 가라앉히는 방법입니다.
그러나 이 말이 모든 것을 다 내어주라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마땅히 지켜야 하는 것들이 있게 마련이지요. 사회의 구조적인 악에는 그리스도인들이 선한 마음을 모아서 맞서 나가야 합니다. 하지만 비폭력은 언제나 우리의 중심에 머물러야 합니다. 악한 이들이 악한 수단으로 나온다고 우리도 같은 수단으로 맞서기 시작하면 결국 그들을 조종하는 근본적인 세력의 간계에 넘어가는 셈이 되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예수님은 그 정당한 방어 마저도 내세우지 않으셨다는 ‘신비적 차원’입니다. 우리가 신앙 안에 더욱 깊이 들어갈수록 예수님의 그 마음을 닮게 되고, 우리는 심지어 우리의 생명 마저도 기꺼이 내어 바칠 준비를 갖추게 되는 것입니다. ‘억울함’을 견디는 것은 참으로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주님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그분의 삶을 본받으려는 사람에게 조금씩 열려지는 특별할 은총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지만 사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우리 주님을 닮아가야 한다는 것 또한 우리가 잊어서는 안되는 중요한 사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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