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대폰을 그 안의 프로그램의 핵심 코드, 칩의 구조, 기판의 배선을 모두 이해하고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저 쓰임새에 맞게 제작된 것을 구입하고 사용할 뿐이지요. 우리가 일상적으로 마주하는 것들 가운데에는 이러한 것들이 많습니다. 우리는 그 안에 본질적인 것을 잘 모릅니다. 그래서 필요하게 되는 것이 ‘전문가’입니다. 그들은 자신의 지식의 범위 안에서 휴대폰 내부의 여러가지 세부 구조와 기능들을 분별하고 파악해서 어떤 휴대폰이 더 나은 것인지에 대한 리뷰를 내어 놓습니다. 그러면 관심있는 이들은 그 전문가들의 의견을 듣고 그들이 제안하는 휴대폰을 구입하기도 하지요.
우리가 종교를 선택하게 되는 이유는 물려 받기 때문인 경우가 많습니다. 부모의 신앙이 전해지는 것이지요. 불교 집안은 불교 신자가 되고, 천주교 집안은 천주교 신자가 되고, 개신교 집안은 개신교 신자가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실 잘 모릅니다. 그 안에 어떤 가르침이 구체적으로 있는지 부모들도 잘 모르고 그 부모들 역시 그냥 전해받은 것일 뿐입니다. 그래서 전문가의 소견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좋습니다. 하지만 과연 누가 전문가일 것입니까?
어디에 물어봐야 할지 전혀 알지 못하는 상황 속에서 사람들은 ‘전문가’로 보이는 사람들의 소견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수많은 전문가들이 존재합니다. 자신의 학위를 내세우고, 자신의 경력을 내세우고, 사람들의 이목을 끌만한 요소들을 내세워 자신을 전문가로 내세웁니다. 하지만 진정한 전문가는 누구일까요? 바로 가장 전능하신 분이신 하느님이실 것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뜻을 가장 깊이 꿰뚫고 있는 이가 이 세상에서는 전문가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를 누가 알 것입니까? 이는 마치 세상에서 가장 작은 원소를 찾아야 하는데 모든 측정 기기들의 한계치를 다 넘어서기 때문에 그 어떤 도구로도 그 원소를 찾아낼 수 없는 상황과 비슷합니다. 그래서 모두들 저마다 자신의 상상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결국 사람들은 저마다의 기호를 따라 다니게 됩니다. 자신들이 생각하는 것을 가장 적합하게 드러내어 주는 의견을 선택하지요. 그래서 잘못된 길을 선택하는 이들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잘못된 길이 그들에게는 가장 옳은 길로 보이기 때문이지요.
우리는 이 세상에 홀로 태어나 모든 것을 홀로 이루고 살아가는 것은 아닙니다. 많거나 적거나 세상의 영향을 받으면서 살아가지요. 우리 각자는 하느님과의 만남을 이루어야 하고 그 가장 적합한 방법을 위해서 기성 종교의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무엇이 더 진실한가 하는 것은 한 사람이 분별하기 참으로 힘이 듭니다. 저마다 자신의 정당성과 정통성을 주장하고 있으니까요.
결국 우리가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은 하느님은 ‘이 종교’ 신자라고 해서 무조건 옳다고 하고, ‘타 종교’ 신자라고 해서 무조건 배척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입니다. 하느님은 각자가 행하는 선택을 바라보시는 분이십니다. 가톨릭 신자라면 자신이 배운 대로 하느님을 최고로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신자가 되어야 하고, 개신교 신자도 마찬가지로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해야 하는 이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불교 신자라면 열반에 이르기까지 부단히 자기 수련을 게을리 하지 않고 자비심을 발해야 하겠지요. 그리고 우리는 서로 사랑해야 하는 것입니다. 자기 잘난 척을 하지 말고 서로를 존중하고 사랑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 진행과정은 ‘신학토론’이나 ‘종교토론’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삶의 구체적인 실천으로 이루어지는 것이지요.
다른 한 편, 엇나간 종교들이 있습니다. 이미 기성 종교들은 그들의 실태에 대해서 나름 파악하고 있고 그들이 왜 엇나간 것인지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에 관해서는 각 분야의 전문가의 의견에 귀를 기울여도 좋습니다.
우리가 종교를 선택하게 되는 이유는 물려 받기 때문인 경우가 많습니다. 부모의 신앙이 전해지는 것이지요. 불교 집안은 불교 신자가 되고, 천주교 집안은 천주교 신자가 되고, 개신교 집안은 개신교 신자가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실 잘 모릅니다. 그 안에 어떤 가르침이 구체적으로 있는지 부모들도 잘 모르고 그 부모들 역시 그냥 전해받은 것일 뿐입니다. 그래서 전문가의 소견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좋습니다. 하지만 과연 누가 전문가일 것입니까?
어디에 물어봐야 할지 전혀 알지 못하는 상황 속에서 사람들은 ‘전문가’로 보이는 사람들의 소견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수많은 전문가들이 존재합니다. 자신의 학위를 내세우고, 자신의 경력을 내세우고, 사람들의 이목을 끌만한 요소들을 내세워 자신을 전문가로 내세웁니다. 하지만 진정한 전문가는 누구일까요? 바로 가장 전능하신 분이신 하느님이실 것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뜻을 가장 깊이 꿰뚫고 있는 이가 이 세상에서는 전문가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를 누가 알 것입니까? 이는 마치 세상에서 가장 작은 원소를 찾아야 하는데 모든 측정 기기들의 한계치를 다 넘어서기 때문에 그 어떤 도구로도 그 원소를 찾아낼 수 없는 상황과 비슷합니다. 그래서 모두들 저마다 자신의 상상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결국 사람들은 저마다의 기호를 따라 다니게 됩니다. 자신들이 생각하는 것을 가장 적합하게 드러내어 주는 의견을 선택하지요. 그래서 잘못된 길을 선택하는 이들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잘못된 길이 그들에게는 가장 옳은 길로 보이기 때문이지요.
우리는 이 세상에 홀로 태어나 모든 것을 홀로 이루고 살아가는 것은 아닙니다. 많거나 적거나 세상의 영향을 받으면서 살아가지요. 우리 각자는 하느님과의 만남을 이루어야 하고 그 가장 적합한 방법을 위해서 기성 종교의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무엇이 더 진실한가 하는 것은 한 사람이 분별하기 참으로 힘이 듭니다. 저마다 자신의 정당성과 정통성을 주장하고 있으니까요.
결국 우리가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은 하느님은 ‘이 종교’ 신자라고 해서 무조건 옳다고 하고, ‘타 종교’ 신자라고 해서 무조건 배척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입니다. 하느님은 각자가 행하는 선택을 바라보시는 분이십니다. 가톨릭 신자라면 자신이 배운 대로 하느님을 최고로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신자가 되어야 하고, 개신교 신자도 마찬가지로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해야 하는 이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불교 신자라면 열반에 이르기까지 부단히 자기 수련을 게을리 하지 않고 자비심을 발해야 하겠지요. 그리고 우리는 서로 사랑해야 하는 것입니다. 자기 잘난 척을 하지 말고 서로를 존중하고 사랑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 진행과정은 ‘신학토론’이나 ‘종교토론’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삶의 구체적인 실천으로 이루어지는 것이지요.
다른 한 편, 엇나간 종교들이 있습니다. 이미 기성 종교들은 그들의 실태에 대해서 나름 파악하고 있고 그들이 왜 엇나간 것인지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에 관해서는 각 분야의 전문가의 의견에 귀를 기울여도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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