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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끄는 말씀

너희가 오른쪽으로 돌거나 왼쪽으로 돌 때 뒤에서 “이것이 바른길이니 이리로 가거라.” 하시는 말씀을 너희 귀로 듣게 되리라. (이사 30,21)

하느님은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다만 우리가 고집스럽게 그 말씀을 거부할 뿐입니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길을 알려 주십니다. 무엇이 바른 길인지 알게 하시고 그 길을 따라 걷도록 도와주십니다. 그러나 우리의 고집도 만만치 않습니다.

이런 일이 일어나는 이유는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포기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내가 하고 싶은 것은 나의 이기심에서 나온 것들이라 하느님의 뜻과는 동떨어져 있게 마련입니다. 내가 손에 쥔 과자를 다 먹지도 않고 동생의 과자를 욕심내는 것은 순전히 나의 이기심입니다. 동생이 과자를 빼앗겨 울어도 내 입안에 가득 차 있는 과자를 느끼면서 쾌락을 탐하는 모습이 바로 이기적 인간의 모습인 것입니다.

우리가 통상적으로 갈구하는 것이 과연 하느님의 뜻에 합당한 것인지 살펴보는 과정이 없이 그저 내가 원하니 나에게 좋은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일반입니다. 건강하고 맛있는 음식이 충분한데도 더 향락적이고 쾌락적인 음식을 찾아 다니는 것이 보통입니다. 먹는 것이 무슨 죄가 되겠느냐고 생각하면서 자신의 내면의 방향을 더욱 세속적으로 만들어가면서 ‘본질적인 죄’에 빠져들고 맙니다. 먹는 것 자체가 죄가 되지 않는 것은 맞지만 온갖 향락을 누리려는 것은 옳지 못한 자세임에도 우리는 그것이 하등 문제될 것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한 사람과 사랑을 나누는 것은 아름다운 것이지만 그 사람에게 집착하는 것은 분명히 잘못된 행위입니다. 헌데 우리는 우리가 하는 모든 행위를 ‘로멘스’라고 변명하고 있는 중이지요. 실제로는 그 대상에 엄청 고착화되어 있으면서 말입니다.

하느님은 좋은 것을 마련하셨고 우리를 끊임없이 초대하고 계십니다. 누구든지 귀를 기울이면 그분의 말씀을 들을 수 있습니다. 보다 참되고 바른 것으로 초대하는 그분의 말씀을 들을 수 있지요. 그러나 그것을 거부하는 것은 바로 우리 자신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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