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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유

성경강의를 마치면서 질문을 하라고 하니 이런 질문이 들어왔습니다.

- 예수님은 왜 비유로 가르치셨지요? 제자들에게 하신 것처럼 모든 사람에게 상세히 가르치셨으면 더 좋았을 걸요.

- 비유는 사람들을 위해서 쓰여지는 도구입니다. 환히 드러내어 보여줄 수 없는 것을 상징적인 수단을 통해서 드러내는 것이지요. 하지만 그 비유는 사람들의 일상에서 찾아내는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씨를 뿌리는 모습이 너무나 흔한 모습이었기에 거기에서 비유를 끌어쓰신 것이지요. 그래서 사람들은 그 비유를 바로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만일 오늘날이었다면 스마트폰을 비유로 들었을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비유는 사람들에게 익숙한 것이어야 합니다. 행여 제가 컴퓨터에 대해서 잘 안다고 CPU의 구조와 프로그래밍 작업을 비유로 들어서 하늘나라의 신비를 드러낸다고 해서 그것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여러분들이 일상적으로 타게 되는 미끄로(미니 버스를 지칭하는 말)와 그 운전기사의 예를 들면 여러분들은 잘 이해할 수 있지요. 비유는 사람들에게 뜻을 가리기 위한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이해를 돕기 위한 수단입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사람들과 함께 머무르시면서 그들의 삶에서 비유를 뽑아 내셨습니다.

다른 한 편, 비유는 하느님을 알고 싶어하고 하느님에게 관심있는 이들을 분별하는 수단이기도 합니다. 누구든지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으면 비유를 듣고는 그 의미를 궁금해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하지만 영적인 추구를 하지 않는 이들에게 비유는 미지의 것, 자신이 늘상 체험하는 그냥 일상의 이야기로 남아있게 되지요. 성경 말씀에 거룩한 것을 개들에게 주지 말고, 진주를 돼지에게 주지 말라는 표현이 있는 것처럼 거룩한 내용들, 영원에 관계된 내용들은 그것을 듣고 싶어 하는 이들을 분별하기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아무에게나 마구 던져줄 수는 없지요. 가령,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하늘 나라에서 직접적으로 일어날 일을 알려주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총독 앞에 섰을 때에 사람들은 예수님을 비난할 구실을 좀처럼 찾지 못한 것입니다. 만일 예수님이 하늘 나라의 신비를 그대로 드러내었더라면 사람들은 그 안에서 갖가지 표현들을 빌미로 그분을 고발할 구실을 찾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어느 표현에서도 그들은 잘못된 표현을 찾지 못했지요. 결국 하나 건진 것이 성전을 무너뜨리고 사흘 만에 다시 짓겠다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또한 의견이 갈리곤 했지요. 조금이라도 하느님에게 다가갈 관심이 있으면 자신이 들은 비유의 본 뜻을 찾기 위해서 노력할 것입니다. 그러면 하느님은 기꺼이 그 숨겨진 의미를 그에게 밝히 드러내어 보이십니다. 예수님은 비유의 마지막에 종종 ‘들을 귀가 있는 사람은 알아 들으라’는 표현을 하십니다. 우리 육신에 달린 귀가 아니라 우리의 영혼에 달린 귀, 우리의 영혼이 찾아 얻고자 하는 바를 꺼내고 싶으신 것이 예수님의 마음이었던 것이지요. 그러나 수많은 사람들은 들어도 듣지 못하고 보아도 보지 못해서 결국 마음을 돌려 하느님의 용서의 은총을 얻어내지 못하는 것입니다. 가진 사람은 더 가져 부유하게 되고 가지지 못한 이는 가졌다고 생각하던 것마저 빼앗기게 되는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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