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념 이해를 잘 해 봅시다. 우리가 은총 안에서 산다는 것은 과연 어떤 의미일까요? 인간은 어디까지 스스로 은총을 이룰 수 있을까요? 은총을 얻는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먼저 은총에 대해서 이해하도록 합시다. 은총이라는 것은 하느님의 특별한 사랑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즉 우리 인간이 스스로 만들어 낼 수 있는 은총은 0%입니다. 은총은 전적으로 하느님의 소유이고 하느님이 허락하실 때에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은총을 얻을 수 있게 되는 이유는 하느님 마음에 드는 삶을 살아가기 때문에 하느님이 우리를 어여삐 보시고 당신의 특별한 사랑을 쏟아주시는 것이지요.
자녀를 바라보는 부모의 마음을 살펴봅시다. 부모로서는 자녀를 양육할 의무가 있습니다. 그것은 부모로서 마땅히 해야 하는 일이지요. 그리고 때로 자녀에게 특별한 선물을 줄 수 있습니다. 자녀가 마냥 이쁘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그 자녀가 온갖 악의로 부모에게 대적하고 욕을 쏟아 붓는데도 선물을 줄 리는 없습니다. 나아가 그 자녀가 그 특별한 선물이 마치 자신의 권리인 양 내어 놓으라고 고집을 피운다고 그것을 줄 이유도 없지요.
이제 하느님의 은총으로 돌아옵시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가장 기본적인 은총을 선사하십니다. 부모된 도리로서 자녀들에게 삶을 주시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 삶은 우리가 특별히 엉뚱한 짓을 하지 않는 이상 정해진 수명대로 나아가게 됩니다. 하지만 지상에서 영원히 사는 사람은 없고 언젠가는 생을 다하게 마련이지요. 그리고 그 생의 바탕 위에 당신의 특별한 은총이 쏟아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때 우리가 잘 생각해야 하는 것은 우리가 어떤 짓을 해도 그 특별한 은총이 쏟아지지는 않는다는 것 하나와, 또 우리가 내어 놓으라고 떼를 쓴다고 해서 주어지지도 않는다는 것 둘 입니다.
1) 자신의 생을 엉망으로 가꾸면서 자신이 얻어낸 특별한 자격증 따위로 하느님이 자신을 사랑하리라고 착각하는 부류들이 있습니다. 누군가를 미워하는 마음을 없애지 않고 성전에 봉헌물을 바치면서 하느님의 축복을 기다리는 사람들이지요. 제단에 예물을 바치기 전에 우리는 불목한 형제와 먼저 화해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2) 때로 우리는 뭔가를 얻기 위한 목적으로 열심히 기도를 바칩니다. 헌데 그 기도를 바쳤으니 내어놓을 걸 내어 놓으라고 떼를 쓰는 이들이 있습니다. 천만에요. 우리가 그 기도를 성실히 바침으로써 우리의 내면이 하느님을 더욱 사랑하게 되고 하느님의 마음에 들게 되어서 하느님이 그 특별한 은총을 선물하는 것이지, 기계적으로 뭔가를 이루어 내었다고 해서 하느님이 그가 청하는 것을 내어주어야 할 의무는 없는 것입니다.
특히나 성모님에 관련해서 두 번째 경우가 종종 드러나게 됩니다. 성모님은 자녀들에게 ‘너희가 어떤 식으로 살든지 상관 없으니 정해진 이 기도만 바치면 어떻게든 그 은총을 얻게 해 주마’라고 하신 적이 없습니다. 성모님은 가장 우선적으로 우리의 ‘회개’를 요청하셨습니다. 그 바탕 위에 당신이 선사하시는 여러가지 기도 방법을 통해서 은총을 얻도록 하신 것이지요.
이제 개인적으로 추구하고 얻을 수 있는 구원의 의미와 한계에 대해서 이해하셨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이번에는 우리 주님께서 얻어 주신 구원에 대해서 설명하겠습니다.
하느님에게 가장 많은 사랑을 받은 이는 단연코 예수님이십니다. 이는 두 번 생각할 것도 없습니다. 그분은 당신의 의지를 마지막 한 방울까지 하느님에게 봉헌하셨고 하느님과 전혀 갈라짐 없이 일치하셨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마지막 수난을 통해서 가장 큰 은총을 얻어내셨지요. 그것은 바로 죄인들을 하느님께로 초대하는 십자가의 은총이었습니다.
전에는 구약의 계약에 따라서 사람들은 모든 율법을 준수하고 살아야 구원의 가능성이 존재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통해서 십자가에 기대는 사람이면 누구나 구원의 가능성이 열리게 된 것이지요. 전에는 계단을 타고 꼭대기에 도달했다면 지금은 엘리베이터 스위치만 작동하면 되는 것입니다. 이 구원의 은총이 온전히 담겨 있는 예식이 바로 ‘성찬례’ 즉 ‘미사’입니다. 우리가 미사에 참례하게 될 때, 그리고 양심의 어긋남 없이 성체를 모시게 될 때에 얻게 되는 은총은 어마어마한 것이지요. 우리가 가득한 신뢰로 성체를 받아모실 때에 예수님 당신이 우리 안에 들어오게 되고 우리는 예수님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이런 은총의 보물창고를 우리는 너무나 일상적으로 참례하고 있습니다. 주일 미사는 거의 습관이 되다시피 해서 미사의 은총 그 자체를 전혀 느끼지 못하고 미사의 분위기를 두고 왈가왈부하고 사제의 강론이 좋다느니 나쁘다느니 하는 평가를 내리는 데에 다급하지요. 자신이 정말 사랑하는 사람이 눈 앞에 있다면, 정말 오랫동안 만나기를 원하던 사람이라면 그 사람의 옷이 누더기이고 그 사람에게서 쉰 내가 난다고 해서 그에게서 도망가지는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반대로 그러한 것들에도 불과하고 그를 기꺼이 껴안겠지요.
그러나 모든 은총의 시작에는 우리의 회개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세례자 요한이 예수님 이전에 와서 죄의 사함을 위한 회개를 선포한 것이지요. 모든 은총의 시작점은 우리의 마음을 돌이키는 데에 있습니다. 그리고 나서 나머지 모든 것들이 그 본질적인 의미를 드러내지요. 우리가 원치 않는데에 억지로 밀고 들어오는 은총은 하느님이 허락하신다면 존재할 수도 있지만 하느님은 우리의 자유의지를 함부로 건드리는 분이 아니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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