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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엘디 형제님과 나눔글



믿음은 익숙해지는 것

믿음이라는 것, 신앙이라는 것은 ‘소유’할 수 있는 무언가가 아닙니다. 마치 자동차처럼 그것을 가지는 순간부터 마음대로 이용할 수 있는 무언가가 아니지요. 믿음이라는 것은 오히려 ‘내밀한 결심’입니다. 알아듣기 쉽도록 비유로 설명을 드리지요.

제가 볼리비아에 처음 왔을 때에는 이 동네의 ‘치즈(queso)’에 대해서 문외한이었고 그 맛과 향에 대해서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이들이 먹는 치즈는 저에게는 쉽지 않은 음식 중의 하나였지요. 그 강한 맛과 향은 저로서는 받아들이기 쉽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현지 신자 가정에 초대받을 때마다 조금씩 대접받는 그 치즈를 울며 겨자먹기로 조금씩 먹으면서 맛을 들이다보니 어느새인가 그 치즈에 익숙해지게 되었고 전과는 달리 그 치즈를 즐기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치즈 종류가 어떤 것들이 있는지도 대충 알고 어떤 치즈가 향과 맛과 식감이 풍부한 좋은 치즈인지 어떤 치즈가 짜고 형편없는 치즈인지도 알 수 있게 되었지요.

신앙이라는 것도 마찬가지인 셈입니다. 우리는 신앙을 통째로 어떤 사물처럼 선물받는 것이 아니라 ‘신앙의 경향’으로 초대받고 거기에 익숙해져 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하는 모든 노력 안에는 ‘믿으려는 노력’이 깃들게 되는 것이지요. 그런 노력이 쌓이고 쌓이다 보면 어느샌가 나의 내면에 훌륭한 믿음이 성장하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어떤 계기를 바탕으로 갑자기 신앙이 생기는 경우도 있긴 합니다. 특별한 체험을 통해서 갑자기 하느님을 향하게 되기도 하지요. 하지만 이러한 경우에는 다이어트를 급하게 한 사람처럼 갑자기 요요 현상이 오기도 합니다. 급하고 갑작스럽게 받아들이 신앙인만큼 뿌리가 약해서 금방 무너지는 신앙이기도 한 것이지요. 어떤 특정한 사건을 계기로 받아들인 만큼, 그에 상응하는 세상적인 일이 생기면 또다시 무너지기도 하는 신앙인 셈입니다.

믿는다는 것은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향한 자발적 선택’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세상 안에 살아온 것이 너무나 익숙한 나머지 보이지 않는 분을 받아들이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꾸준히 용기를 잃지 않고 매사에 자기 자신을 버리고 일상 안에서 다가오는 시련들과 도전들을 십자가를 지듯이 묵묵히 지고 거룩함을 향해 나아가다보면 언젠가는 훌륭한 신앙인으로 성장해 나갈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미움

본당에서 몇몇 신자들을 편애하는 신부님이 밉다.

누군가를 증오하는 것은 우리의 선택입니다. 그 반대의 선택으로는 그를 사랑하는 것이 있지요. 우리가 누군가를 증오하면 그의 단점이 더욱 부각되기 시작하고 그로 인해서 그를 더욱 미워하게 됩니다. 사람을 미워하게 되는 이유에는 여러가지 것들이 있는데 대부분의 경우 정말 그가 한 행동이 악해서이기보다는 그의 행동이 내 마음에 들지 않아서인 경우가 많습니다.

정말 악을 제대로 미워했다면 우리는 예수님을 닮은 사람이 되었을 것입니다. 예수님도 악을 싫어하셨고 거룩한 분노를 드러내기도 하셨으니까요. 하지만 예수님은 모든 이를 사랑하셨습니다. 심지어는 자신에게 배신의 입맞춤을 하는 제자에게마저도 마지막 순간까지 사랑을 드러내셨지요. 물론 우리가 이런 사랑에 이르기까지는 많은 훈련이 필요합니다.

이제 질문으로 돌아가봅시다. 본당 신부님이 미워진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몇몇 신자들을 편애하는 것이 이유라고 하네요. 편애라는 것의 구체적인 내용이 나와있지 않아서 어떤 것을 편애라고 생각하지는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적지 않은 이들의 판단의 기준은 보편적이기보다 주관적인 경우가 많습니다.

물론 사제는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되어 주어야 하는 위치에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거의 불가능해 보이지만 ‘이론상으로는’ 그렇게 되어야 하지요. ‘나는 어떻게 해서든지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려고,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되었습니다.’(1코린 9,22) 라는 바오로 사도의 표현처럼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되어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아무리 그 이상에 도달하려고 노력한다고 해도 우리에게는 부족함이 존재하고, 또 사람들은 자신들의 관점에서 우리의 행동을 분별하기가 일쑤인 것입니다. 그래서 오해라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삶의 한 부분 가운데 하나이지요.

특히나 이 ‘편애’라는 부분은 어떤 사제이든지 피해갈 수 없는 부분입니다. 본당 내에 신자들의 수가 적게는 수백에서 많게는 수천명까지 되는 상황에서 어쩔 수 없이 역할을 분담하고 더 자주 마주해야 하는 사람들이 생겨나게 마련이지요. 그리고 그 이면에는 그러한 모습을 지켜보면서 속을 태우는 이들도 생겨나는 것입니다.

물론 사제가 성격이 정말 유별나고 인격 함양이 부족해서 옳지 못한 마음으로 한 부류의 신자들을 지나치게 관심을 쏟고 그 반대편에 있는 신자들을 매몰차게 대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사제가 변해야 할 부분이고 신자들은 용기를 내어서 사제의 그런 부족한 점을 용기를 내어 알려주어 그가 변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러한 경우는 특별한 경우이고 생각만큼 많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경우는 일상적인 사목 행위 안에서 생겨나는 오해인 경우가 많지요. 본당의 몇몇 그룹 가운데 어느 그룹과 나가서 회식을 하고 다른 그룹과는 회식 횟수가 적으면 당장 그 그룹에서 ‘편애’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편애의 주관적인 면모에 대해서 살펴 보았으니 이제 그런 편애로 미움을 시작하려고 하는 이에게 좀 더 집중해 봅시다.

무엇보다도 ‘미움’ 그 자체는 하느님의 뜻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 누구도 미워해서는 안됩니다. 오히려 반대이지요. 우리는 원수를 사랑하려고 노력해야 하는 그리스도인들입니다. 더군다나 그 대상이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아 사목을 하고 있는 사제라면 더더욱이 그를 사랑하려고 의식적으로 노력해야 합니다. 오직 사랑만이 모든 것을 변화시킬 수 있는 능력이 있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사제라는 직분은 본당 안에서 참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기는 하지만 그 직분을 맡고 있는 이의 인격성이 절대적인 것은 아니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사제의 여러 사목 행위를 제쳐 두고라도 그 사제는 미사를 집전하고 고해를 거행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성사적인 은총은 사제의 인격적 결함과 상관 없이 고스란히 신자들에게 전해지는 것입니다. 신자들은 바로 그 미사와 성사의 은총 안에서 하느님을 체험하고 만나야 하는 것입니다.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을 통해서 달을 바라보아야 하지 그 손가락의 모양새에 머무르면 결국 우리는 달을 바라보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손가락이 아무리 거무튀튀하고 구부러져 있어도 그 가리키는 것이 달이면 상관이 없는 법입니다. 사제가 아무리 인격적으로 부족한 면모를 보인다고 해도 그가 본당에서 미사를 거행하고 성사를 거행하고 있다면 그 거룩한 행위들 안에서 하느님과 예수님과 성령을 만날 수 있어야 합니다.

물론 여러가지로 부족함이 많은 사제들을 대하는 신자들의 고충이 많을 것으로 짐작이 됩니다. 사제들은 기본적인 인격 함양에 힘써야 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가톨릭 사제는 임기가 있습니다. 어쩌면 그 임기 동안에 나에게 선사되는 사제는 내 안의 어떤 부분을 고치고 수정하기 위한 도구인지도 모릅니다.

그 사제가 정말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크나큰 문제를 저지르지 않는 이상, 사제의 결함으로 그를 증오하는 일이 없게 되기를 바랍니다. 오히려 반대로 그를 위해서 더욱 열심히 기도해 주어야 합니다. 사제라는 직분은 참으로 많은 기도가 필요한 직분입니다.




(Q) 남편은 성당 일에 무척 열심입니다. 자타가 인정합니다. 남편 없으면 본당이 안돌아 간다고 할 만큼 중요한 일을 많이 합니다. 일만 잘 하는 것이 아니라 신앙심도 무척 깊은 것 같습니다. 저는 아무리 해도 따라 갈수가 없습니다. 외짝 교우 자매들이 저를 무척 부러워합니다. 그런데 최근에 고민이 생겼습니다. 여러 가지 어려움을 갖고 있는 자매들에게 도움을 준다고 남편이 자매들과 단 둘이 만나는 일이 잦아졌습니다. 저는 솔직히 싫습니다. 그래서 말렸더니 나를 믿지 못하느냐고 오히려 저를 나무랍니다. 본당의 다른 자매들도 우리 남편만큼은 믿어도 된답니다. 그리고 여러 자매들에게 도움을 많이 주는 훌륭한 사람이라고 까지 말합니다. 제가 나쁜 가요? 남편에 대한 저의 믿음과 사랑이 부족한 것일까요? 남편에게 어떻게 말하고, 어떻게 행동해야 할까요?

모든 관계는 ‘자유’를 바탕으로 합니다. 하지만 그 자유라는 것이 뭐든 할 수 있는 방종과는 구분되어야 합니다. 하느님의 사랑으로 맺어진 부부는 각자가 서로 다른 지체가 아니라 한 몸입니다. 그래서 서로가 서로에게 자발적으로 구속되는 관계입니다. 그리고 이 관계를 위협할 수 있는 그 어떤 요소이든 조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남편이 신앙심이 훌륭한 것은 참으로 좋은 일입니다. 아내는 그런 남편을 가장으로서 존중하고 남편은 아내를 사랑으로 돌보아야 합니다. 하지만 그 훌륭한 신앙이라는 것은 절대로 아내와 동떨어져서 홀로 이루어질 수는 없는 것입니다. 언제나 사랑하는 마음으로 아내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그의 의견을 경청해야 합니다. 때로는 중대한 결정을 내릴 때에 아내는 자신의 뜻을 내려놓고 남편에게 순명하는 모습도 필요합니다.

하지만 모든 그리스도인은 성사적 혼인 이전에 하느님과의 관계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잊어서도 안됩니다. 인간 이전에 하느님에게 순명해야 합니다. 만일 남편이 범죄나 신앙적으로 전혀 이치에 맞지 않는 일을 계획하고 있다면 당연히 아내는 하느님에게 순명하는 마음으로 남편의 어리석은 짓을 막을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이제 질문의 본론으로 돌아와 봅시다. 아내는 기본 남편의 신앙을 존중하고 있습니다. 다만 한 가지 문제가 마음에 걸립니다. 그것은 바로 남편이 본당의 자매들과 ‘단 둘이’ 만난다는 것이지요. 과연 이는 어떻게 분별해야 하는 것일까요?

먼저 결론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아내분의 요구는 정당한 것입니다. 남편은 당장 다른 자매들과 단 둘이 만나는 것을 그만두어야 합니다. 이 분별에는 다른 자매들의 남편에 대한 평은 하나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 결정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아내의 의견입니다. 왜냐하면 그런 만남은 충분히 엇나갈 수 있고 가정을 위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내의 요구는 백번 정당한 것입니다. 그리고 남편은 사랑하는 마음으로 아내의 의견을 수용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신앙적으로 필수적이 아닌 자신의 역할에 남편이 즐거움을 느끼고 있습니다. 즉, 그 다른 자매들은 원한다면 그 남편분이 아니라 얼마든지 자신들에게 적합한 다른 상담가를 찾을 수 있습니다. 신앙이 뛰어난 다른 연륜 있는 자매들이나 본당의 수녀님과 상담을 할 수 있지요. 헌데 남편분을 굳이 선택하는 이유는 그 남편분이 신앙이 뛰어나기 때문이 아니라 ‘남자’이기 때문일 가능성이 굉장히 농후합니다. 사실 의식있는 자매들이라면 자기들이 스스로 그 만남을 피할 것입니다. 사실 여자들이 남자들보다 내적 감각이 더 뛰어나게 마련이지요. 헌데 아내가 있는 남자인 줄 알면서도 스스로 개인적인 만남을 즐겨 갖는다는 것은 이미 그 여성분들에게도 문제가 있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아내는 남편을 믿고 사랑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믿지 못하는 것은 남편쪽입니다. 남편분은 아내의 분별을 믿지 못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자신의 평판에 휩싸여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을 잘 하고 있으며 그 어떤 어려움도 닥치지 않을 것이고 더 나아질 것이라는 자기 최면 속에 다가오는 위협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남편분은 아내분을 믿고 그 의견을 경청하고 새겨야 하는 것이지요.

자신의 아내가 힘들어하는 문제를 보듬어주지도 못하면서 도대체 무슨 다른 여성들의 신앙문제를 해결한다는 것일까요? 이는 자신의 본 의무를 망각한 것이며 자유가 아니라 방종에 불과합니다.




(Q)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남편은 부인을 더욱 여성이 되도록 부인은 남편을 더욱 남성이 되도록 도와주어야한다고 하신 것으로 들었는데 부부 사이에 서로의 성덕을 위해 어떻게 살 수 있을까요?

하느님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는 사실은 모두에게 공통된 것입니다. 하지만 저마다의 위치에서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저마다 다르다는 사실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이는 차별이 아니라 차이입니다. 참된 신앙인은 차이를 무시하고 모든 것을 획일화하지 않습니다. 무엇보다도 남성과 여성의 차이가 존재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두 존재가 분명한 차이가 있게 만들었고 그래서 상호 보완되게 만드신 것입니다.

먼저 남성은 정신적으로 집중력이 강하고 신체적으로도 강한 근육을 바탕으로 고된 일에 적합하게끔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런 특성을 바탕으로 가정 안에서의 역할을 담당하게 되어 있지요. 반면 여성은 세세한 것을 여러가지로 잘 챙기는 데에 특화되어 있고 신체적으로도 부드러운 면모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서 가정을 이루는 데에 봉사하게 되지요.

부부는 서로의 이 근본적인 차이점에서 기인하는 여러가지 다름을 상호 보완해야 하는 존재인 것입니다. 이는 마치 톱니의 한 쪽이 튀어나오고 다른 한 쪽이 들어가서 서로 맞물려 돌아가는 것과 비슷합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이 다름을 두고 서로 다투는 것이 보통입니다. 그 이유는 서로의 내면에 중심축이 잘못 설정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어느 부부이든지 마찬가지입니다. 가장 중심에 거룩한 뜻이 존재하지 않으면 제 아무리 협의를 공고히 하고 계약서까지 쓴다 하더라도 부부사이는 덜컹거리게 마련입니다.

세상에서는 그것을 ‘사랑’이라고 표현하고 그리스도교의 가정에서는 그것을 ‘하느님’이라고 부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거룩한 뜻, 하느님의 사랑에 중심을 두고 서로를 바라보아야 하는 것이지요.

사랑하는 부부는 서로의 위치를 올바로 압니다. 사람이 사랑에 빠지면 상대를 섬기기 위해서 노력합니다. 한창 연애 중인 두 연인에 있어서 자신의 기호 따위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저 상대와 함께만 있어도 좋고 상대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해 주고 싶은 것이 보통이지요. 세상에서도 이런 사랑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 사랑에는 지속성이 없지요. 그래서 시간이 흐르면서 지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가정이 다른 것은 그 사랑이 사라질 수 없다는 데에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중심의 사랑은 하느님에게서 기인하는 것이기 때문이지요. 하느님을 열렬히 사랑하는 이상은 부부는 때로 삐걱거리더라도 다시 다잡고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부부생활에서 핵심은 하느님과의 관계를 확고히 하는 것입니다.

그럼 하느님께서는 부부가 어떤 모양새를 지니기를 바라셨을까요? 바오로 사도가 이에 대한 모범답안을 제시합니다. 바로 교회와 그리스도의 모습을 통해서 우리에게 부부생활의 모범적인 모습을 제시하는 것이지요. 에페소서 5장에 그 사례가 잘 등장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먼저 아내에게 분부합니다.

“아내는 주님께 순종하듯이 남편에게 순종해야 합니다. 남편은 아내의 머리입니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이시고 그 몸의 구원자이신 것과 같습니다.”(에페 5,22-23)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에 있어서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에 해당합니다. 우리의 몸을 떠올려보면 됩니다. 모든 지체는 자동적으로 머리에 순종하는 법입니다. 이견을 달지도 않고 머리의 결정을 지체가 따로 미워하지도 않습니다. 그리고 나아가 남편에게는 이렇게 분부합니다.

“남편도 이렇게 아내를 제 몸같이 사랑해야 합니다.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아무도 자기 몸을 미워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위하여 하시는 것처럼 오히려 자기 몸을 가꾸고 보살핍니다.” (에페 5,28-29)

아내는 남편에게 있어서 ‘몸’과도 같은 존재입니다. 정상적인 범주 안에서 그 누구도 자신의 몸을 상하게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오히려 반대로 아끼고 보살피고 보듬으려고 하지요.

하느님은 남성과 여성을 서로 다르게 만드시고 그에 합당한 자리를 마련하신 것입니다. 이는 절대로 차별이 아니라 차이일 뿐입니다. 그리고 그 둘은 하느님 안에서 사랑으로 온전히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때로 정반대로 일어나는 현상은, 아내는 남편의 권위를 무시하고 자신의 섬세함으로 남편을 돕기는 커녕 반대로 남편의 흠을 모조리 기억해서 주변에 온통 떠벌리고 다니는 모양새를 보이고, 또 남편은 자신의 권위와 힘으로 아내를 억누르려 하고 지배하고 억압하려고 하곤 합니다. 만일 이런 부부가 있다면 회개하고 마음을 돌이켜 다시 하느님의 사랑으로 돌아와야 할 것입니다.



(Q) 요즘 저는 저의 아이들이 냉담중인데 아직 견진도 하지 못했는데 왜? 엄마 종교를 강조 하냐고 묻습니다. 딸아인 기독교가 더 좋은데 왜? 천주교냐고 물으며 엄마 종교를 강요 하냐고 묻습니다. 그럴 때 아직 넌 모르지만 성당이 참 좋은 거라고 막연히 얘기합니다. 참 잘살지 못하는 제가 부끄럽기도 하지만 걱정이 많이 앞섭니다. 어떻게 우리 애들을 이끌어야할지? 외인인 남편은 한 번 더 종교의 자유를 주라고 하니 참 걱정이 됩니다.  (허근우)

자녀의 신앙

종교는 강요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그 말은 맞습니다. 하지만 신앙은 인간에게 근본적으로 내재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은 거부한다고 거부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차이를 올바로 인지할 수 있어야 합니다.

신앙이라는 것은 인간으로서 가장 깊은 곳에 내재된 초월적인 것을 향한 방향성을 말합니다. 물론 이마저도 적극적으로 거부하기 시작하는 사람들이 있기도 합니다. 그리고 종교 껍데기를 지녔다고 신앙을 지닌 것이 아닌 경우도 많습니다. 모든 사람은 저마다 진지하게 자신의 가장 깊은 곳에 숨겨져 있는 이 근본적인 방향성을 검토하고 그것을 이룰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해야 합니다. 적어도 이 진지성이 있어야 어떤 종류의 종교에 참여하든지 의미가 있는 법입니다. 이 핵심을 잃고서는 아무리 오랜 시간 종교생활을 한다 하더라도 아무런 의미가 없는 법입니다.

종교라는 것은 신앙을 담아낸 것입니다. 그 안에 신앙이 올바로 담겨 있다면 그 그릇이 이 모양이든 저 모양이든 크게 상관이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저마다 마음에 드는 그릇을 선택하는 것이지요. 우리는 가톨릭 신자로서 가톨릭이라는 그릇이 참으로 아름답고 참으로 좋은 것들을 많이 풍부하게 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특히나 우리의 미사와 나머지 성사들은 참으로 소중한 보물들이지요. 우리에게 있어서 그만큼 신앙을 잘 담아낼 수 있는 그릇은 다른 어떤 곳에도 없는 셈입니다. 그 외에도 일치된 전례와 교계제도, 세계 각국의 형제들이 하나된 모습은 우리가 지닌 종교의 자랑거리가 되기에 충분합니다. 하지만 정작 그 안에 핵심이 되는 신앙이 없다면 그 화려한 껍데기가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종교를 받아들이는 것은 여러가지 계기로 이루어집니다. 대체로는 부모의 종교가 대물림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엄마 아빠가 성당을 다니면 자녀들이 성당을 다니는 것이지요. 더군다나 가톨릭 신자라면 혼인 시에 분명한 약속을 하고 배우자의 약속도 받아냅니다. 바로 자녀들에게 가톨릭 신앙 교육을 시키겠다는 약속이지요. 이 약속은 하느님 앞에 하는 것으로 진지한 것입니다. 그래서 가톨릭 부모들은 관면혼을 한 외짝 교우라 할지라도 자신들이 지닌 신앙을 자녀들에게 전해주기 위해서 최대한 노력을 해야 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적지 않은 가톨릭 신앙의 부모들이 이 부분을 소홀히 합니다. 일단 자기 자신들의 신앙 자체를 소홀히 하는 것이지요. 껍데기, 외형은 가톨릭 신자로 유지하지만
내면에 정말 담아야 할 것들을 소홀히 하는 것입니다. 십일조는 꼬박꼬박 내면서 정작 선과 의로움을 소홀히 하는 바리사이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모습인 셈이지요. 그러다보니 속빈 강정이 되고 전해줄 것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녀들에게 신앙이 생겨나지 않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 되는 것이지요. 자신에게 없는 것을 남에게 줄 수 있는 사람은 없으니까요.

만일 아이가 아직 성인 이전의 단계라면 어머니는 이제라도 최선을 다해서 구체적으로 신앙을 전하려고 노력하실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성인이 아닌 이상은 아직 후견인의 보호가 필요한 셈이고 부모님의 직접적인 도움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미 성인이 되어 버렸다면 남은 것은 어머니 본인이 스스로 이미 몸담고 있는 종교 안에서 신앙의 참된 길을 찾으면서 구체적인 모범을 통해서 빛을 비추어주는 수 밖에는 없습니다.

자녀가 ‘가톨릭 신앙인’이 되기를 바라는 것이 통상적인 가톨릭 신앙인 부모님들의 바램입니다. 하지만 아이들이 자연스럽게 부모의 신앙을 받아들일 수 있는 나이를 훌쩍 넘어서서 이미 그 시기를 놓쳐 버렸다면 적어도 ‘참된 신앙인’이 되기를 바라면서 열심히 기도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부모님의 남은 역할이 될 것입니다.

자녀가 가톨릭 신앙에 흥미를 잃었다고 해서 안달복달하지 않게 되기를 바랍니다. 왜냐하면 아직 신앙 자체에 흥미를 잃은 것이라고 단정하기는 힘들기 때문입니다. 다만 부모님이 구체적인 의지가 미비해서 신앙을 담을 외적 그릇에 대한 매력을 충분히 느끼지 못했을 뿐이고, 역으로 다른 종교에 매력을 느끼고 있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진정한 신앙인, 즉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제 몸처럼 사랑하는 신앙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 자녀들이 되도록 열심히 묵주알을 굴리실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하느님께서 필요한 때에 필요한 은총을 자녀들에게 듬뿍 부어주어서 결국에는 돌아와야 할 곳으로 돌아오게 마련입니다. 설령 그 시기가 부모님이 세상을 뜨고 난 뒤라고 할지라도 말이지요. 하느님의 섭리는 참으로 오묘한 것이니까요.




하느님의 공평성

(Q) 하느님은 공평 하신 분인지요? 교리에서는 그렇다고 하는데 잘 모르겠어요.

공평(公平)하다는 것은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고르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먼저 우리가 공평하지 않다, 즉 불평등하다고 보여지는 것을 살펴 보았으면 합니다. 세상은 분명히 불평등, 부정 불의가 존재하는 곳입니다. 부자는 더욱 더 부자가 되고 가난한 사람은 더욱 더 가난해지는 것이 이 세상입니다. 그래서 재화의 분배라는 면, 기회의 균등이라는 면에서 세상은 분명히 불평등해 보입니다.

헌데 교리서는 하느님이 공평하신 분이라고 합니다. 과연 하느님의 공평성은 무엇을 근거로 말하는 것일까요? 세상이 이렇게나 불평등한데 말이지요. 하지만 하느님은 공평합니다. 그리고 그 공평성은 당신의 무한한 사랑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마태 5,45)

하느님은 당신의 뜻을 따르지 않는 이들이라고 내치시는 것이 아니라 공평하게 세상 살아가는 데에 필요한 것을 모두 내려 주십니다. 바로 이 사랑의 공평성이 모든 이에게 미치는 것이고, 하느님은 공평하신 것입니다.

하지만 이 공평성이 인간의 자유를 침해하지는 않습니다. 즉, 인간의 자유는 하느님의 공평성을 과감하게 무시할 준비가 되어 있기도 하고, 나아가 하느님의 은총을 더욱 끌어당길 준비가 되어 있기도 합니다. 하느님이 아무리 빛을 내려 주어도 자신의 두 눈을 감아 버리면 그 빛은 그에게는 무용지물이 됩니다. 하느님은 그의 눈을 억지로 열어서 빛을 보게 하시지는 않지요. 나아가 하느님이 공평하게 내려 주시는 비를 더욱 많이 받으려고 자신의 그릇을 크게 준비한 이에게 하느님이 은총을 거두시는 일도 없는 법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다음 복음의 말씀이 등장하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가진 자는 더 받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루카 19,26)

누군가는 억울하다고 할지 모르겠습니다. 악인은 악의 처벌을 받아야 하고 선인은 그에 합당한 상급을 받아야 하는 것이 아니냐고 할 것입니다. 그것이 공평성이 아니냐고 따지고 들겠지요. 그러나 그런 억울함은 지극시 세속적인 시각에서 비롯됩니다. 성경에서도 잘 나와 있지요.

“죄인의 영광을 부러워하지 마라. 그의 종말이 어떠할지 모른다. 불경한 자들의 성공을 반기지 말고 그들이 죽을 때까지도 의롭게 되지 않을 것임을 기억하여라.” (집회 9,11-12)

죄인들은 그들의 사악함으로 이 지상에서 부귀와 영화를 누릴지 모릅니다. 심지어 그들의 장례식날에도 그 화려함을 뽐낼 수 있겠지요. 하지만 그 이후에 벌어지는 일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일이 될 것입니다. 결국 하느님의 공정함은 마지막에 가서야 온전히 이루어지게 됩니다. 즉 영원의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것이지요.

하느님은 공평하신 분이 틀림 없습니다. 세상 그 어떤 존재보다도 가장 공평하신 분이십니다. 문제는 우리가 그 공평성을 올바로 가늠하기에는 한계가 너무 많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공평성을 의심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걱정하지 마십시오. 하느님은 의인에게는 그에 합당한 것을, 악인에게도 그에 합당한 것을 공평하게 선사하실 것입니다.




(Q) 시간을 되돌리고 싶어요. 지금은 희망이 안보입니다.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요?

시간은 되돌릴 수 없습니다. 하지만 새로운 시간을 지금부터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희망은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희망입니다.

어떻게든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그러기 위해 창조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게서 허락하신 이 생이 다하고 나면 절대로 끝이 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생은 계속됩니다.

먼저 시간과 오류에 관해서 말씀 드리겠습니다. 인간은 완벽한 존재가 아닙니다. 그래서 수많은 약점을 지니고 있고, 수많은 오류를 저지르기도 하고, 심지어는 죄를 짓기도 하지요. 하지만 인간의 여러가지 행동 가운데 ‘죄’라는 것은 인간의 자유의지가 개입된 것입니다. 즉 우리 스스로 결정한 것이지요. 우리가 결정할 수 없는 상태에서 저질러 진 것은 죄가 아닙니다. 그건 피치 못할 일에 불과하지요. 그러나 우리는 기계가 아니라 인간입니다. 우리의 자유의지는 어린 시절부터 생생히 살아있었고 모든 순간에 선택을 해 왔습니다. 어느 특정한 순간에 저질러지는 심각한 잘못은 우리 선택이 축적되어 마침내 이루어지는 결과인 것입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용서하실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를 통해서 그 어떤 죄인이든지 용서를 받을 수 있지요. 물론 세상 안에서 드러나게 이루어진 범죄의 행위는 세상이 정한 그에 상응하는 값을 치루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의 영혼은 하느님 앞에 뉘우칠 수 있고 용서를 받을 수 있습니다. 즉, 죄에 사로잡혀 있던 그의 양심은 다시 원점으로, 다시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있는 상태로 돌아올 수 있게 됩니다.

우리가 과거에 수많은 오류를 저질렀다면, 이제는 다시 활짝 열린 가능성 속에서 지금부터 ‘선’을 실천하면 되는 것입니다. 지금부터 전혀 색다른 삶을 이루어 나가고 가꾸어 나가면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내가 지나온 길에 큰 구덩이를 만들어 놓아 다른 사람이 빠질 위험에 처하게 해 두었는데 우리가 다시 그리로 돌아가서 그 구덩이를 메꿀 수 없다면 앞으로 걸어가는 길에 만나는 구덩이를 내가 메꾸면 됩니다. 그리고 그 밖의 여러 구덩이들도 메꾸면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그렇게 하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두번째로 희망입니다. 희망이라는 것은 눈에 보이는 형태로 다가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세상 안에서의 어떤 지위만 생각하기 때문에 때로 희망을 잃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희망은 세상 안의 특정한 위치나 대상에 놓여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심각한 오류를 스스로 저지른 이가 다시 예전의 순진무구한 모습을 회복하고 처음부터 아무런 일이 없었다는 듯이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건 우리 중의 누구라도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희망은 보이지 않는 것에 놓여 있습니다. 즉 영원 안에 놓여 있고 하느님 안에 놓여 있는 것입니다. 세상 안에서 희망이 아무리 가득한 사람, 즉 미래가 보장되고 안정된 사람이라 할지라도 늘 시달리게 되는 위협이 있으니 바로 ‘죽음’의 위협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희망을 가진다는 것은 세상 안의 어떤 지위에 오르고 삶의 수준을 회복한다는 것이 아니라 바로 ‘영원한 삶’에 대한 희망을 가진다는 의미입니다.

이 참된 희망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 어떤 최악의 상태라 할지라도 희망이 사라진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다만 우리가 그런 종류의 희망을 원치 않을 뿐입니다. 다만 우리가 세상 안에 길들여져 세상이 말하는 희망, 즉 좋은 직장, 안정된 지위, 완벽한 인간관계 등등만을 희망으로 받아들이려고 하기에 큰 오류를 저지르고 난 뒤에는 그런 헛된 희망들이 사라져서 보이지 않는다고 착각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진정한 희망은 세상의 어떤 것을 통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영원한 행복 속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살펴봅시다. 우리는 정해진 운명을 타고 난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모든 것이 ‘가능성’의 형태로 열려 있습니다. 따라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는 바로 우리가 선택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옛 삶의 법칙에 따라 살아갈 수도 있고, 새 삶의 법칙에 따라 살아갈 수도 있습니다.

산다는 것은 육신의 생명을 유지하는 것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인간은 내면의 삶이 존재합니다. 그리고 인간이 진정으로 살아있음을 느끼는 때는 바로 내면이 살아있을 때입니다. 사지를 잃은 젊은이가 희망에 가득차 살아가는 것은 내면에 강한 힘이 존재하기 때문이고, 사지가 멀쩡한 사람이 상실감에 가득히 살아가는 것은 내면이 공허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려는 의지를 가지는 것은 외적인 조건이 완벽하게 갖추어져 있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의 내면이 과연 어떤 선택을 하고 결심을 내려 그것을 구체적으로 이루려고 노력하는지에 달린 것입니다.

살아야합니다. 살아내어야 합니다. 그것도 최선을 다해서 올바른 선택을 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를 창조하신 분의 뜻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완벽한 존재가 되어서 하는 모든 일에 완벽한 결과를 내어놓기를 바라신 적은 없습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부족하고 나약한 존재라는 것을 알고 계십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리 내면에는 자유의지가 존재하며 그 자유 안에서 ‘사랑’의 결실을 이루어 내기를 바라시고 계십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 우리를 이 땅에 만들어 놓은 이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통해서 이루어졌고 그분을 위해서 살아가고 그분을 향해서 돌아가는 이들입니다. 우리는 그분의 뜻에 합당하게 살아가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누구든지 이러한 것들에서 자신을 깨끗이 씻어 버리면, 귀하게 쓰이는 그릇, 곧 거룩하게 되어 주인에게 요긴하게 쓰이고 또 온갖 좋은 일에 쓰이도록 갖추어진 그릇이 될 것입니다. (2디모, 2,21)




자꾸 같은 유혹에 빠져듭니다. 잘못이라 생각하면서도 어느새 같은 실수를 저지르는 저에게 해주시고 싶은 말씀은요?

사람이 무언가를 하게 되는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그것을 스스로 선택하기 때문입니다. 즉 그 행동을 선호한다고 할 수 있지요. 달리 말하자면 다른 행동을 싫어하는 것입니다.

거짓말을 왜 하는 걸까요? 그것은 거짓말을 하는 이에게 있어서 그렇게 하는 것이 진실되이 말하는 것보다 낫기 때문입니다. 남자친구를 밤몰래 만나고 온 여자 아이는 사실을 그대로 말해서 소란이 일어나는 것보다는 그냥 거짓말을 한 번 하는 것이 낫다고 스스로 분별하기 때문에 거짓말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선택하는 모든 것에 책임이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선하게 사는 방법’을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면 우리로서는 죄를 짓는 것이 죄가 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혹시라도 죄스런 방법으로 살아가는 것 외에는 다른 것은 전혀 들어본 적이 없는 이가 있다면 하느님은 그 수준에 맞는 합당한 조치를 취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만에 하나 우리가 스스로 하는 행동이 잘못인 줄 알면서도 자꾸 하게 된다면 그것은 바로 우리의 선택의 결과가 됩니다.

물리학의 법칙에는 ‘관성’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어떤 사물이든 자신이 행하던 운동의 상태를 유지하려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 우리 인간에게는 ‘습관’이라는 것도 있지요. 우리는 이처럼 어떤 행동 하나에 습관을 들이게 되면 같은 상황을 만나게 될 때에 절로 그 행동을 반복하게 되는 것입니다.

자신이 행하는 것이 유혹인 줄 알고 잘못인 줄 알고 실수인 줄 명백히 인식하고 있다면, 그때부터 그에 저항하는 움직임을 시작해야 합니다. 술을 자꾸 마시고 인사불성이 되는 사람은 술에 저항하려는 노력을 시작해야 하고, 필요도 없는 물건을 자꾸 사는 데에 맛들이는 습관을 지닌 사람은 그와 반대되는 행위로 자신이 가진 것을 정말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나누는 일을 실천하려고 노력해야 하며, 배우자와 자녀들과 곧잘 불화를 일으키는 사람은 자신의 곧잘 화내는 성질에 대항해서 인내를 기르고 배우자와 자녀들의 말을 귀담아 듣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우리 안에는 자유의지가 엄연히 살아있고 우리는 매 순간의 선택을 통해서 그 의지를 길들이게 됩니다. 어떤 어린이가 축구의 기술을 머릿속으로 상상할 수는 있지만 실제로 공을 발로 자유자재로 다루려면 연습이 필요하듯이, 마찬가지로 우리의 내적인 면모도 단순히 ‘생각’으로만 개선되는 것이 아니라 그에 상응하는 구체적인 연습과 실천이 필요합니다.

그 어떤 개선의 노력도 하지 않은 채로 같은 오류를 반복하면서 불평만 반복한다면 바로 그 상태를 ‘나태함’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Q) 구치소에서 최종 재판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자식들이 저를 너무 부끄러워 할 것 같아 괴롭습니다.

사람이 받는 고통이 모두 같은 성질의 것은 아닙니다. 고통은 크게 3가지 부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인생과 자연의 흐름에서 다가오는 자연스러운 고통(늙음, 자연재해), 하나는 우리 죄의 결과로서의 고통, 그리고 하나는 다른 사람을 살리는 거룩한 고통입니다.

자연스러운 고통은 껴안는 수 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껴안으려고 하지 않을 때에 문제가 생깁니다. 노화는 인간에게 일어나는 자연스러운 일인데 그것을 거부하고 여전히 육체에 집착하고 외적 미모를 억지로 유지하려고 할 때에 문제가 생기게 됩니다.

죄의 결과로서의 고통은 죄를 지을 때에 예비되었던 것이고 감수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종류의 고통은 모두 사전에 미리 예방할 수 있었던 고통입니다. 그러나 우리 스스로 그 길을 선택했고 우리 스스로 그 결과를 감당해야 하는 것이지요. 만일 현세에서 그 결과가 다가오면 우리로서는 뉘우치고 돌이킬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지만, 현세에서 끝까지 결과를 감내하기를 거부한다면 영원 안에서 그 결과를 받아들이게 됩니다. 하느님은 자비로우시지만 동시에 의로운 분이기도 하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거룩한 고통은 나에게 아무런 잘못이 없는데 다가오는 고통입니다. 우리 주님의 십자가와 같은 고통이지요. 이러한 고통을 스스로 껴안는 사람은 타인을 살리는 사람입니다. 이는 마치 누군가 버린 쓰레기를 대신 줍는 것과 마찬가지인 셈이지요. 때로 우리의 삶 안에서 다가오는 이해하지 못할 고통들은 바로 우리가 그것을 겪고 감내함으로써 다른 이를 살리는 고통이 되는 것입니다. 자녀가 저지른 잘못에 부모가 그 고통을 감내할 수도 있고, 반대로 부모가 저지른 잘못에 자녀가 그 고통을 감내할 수도 있지요. 인류 전체적으로 보면 우리 인간이 저지른 고통을 하느님의 외아들이 감내하신 셈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분으로 인해서 참된 구원의 길이 열렸지요.

먼저는 이 고통에 대해서 설명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래야 상황을 올바로 설명해 낼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질문 안에서 우리가 분별할 수 있는 요소가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구치소에 왜 들어간 것인지 전혀 알지 못하고 재판의 내용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며 위의 상황을 체험하고 있는 이가 죄가 있는지 없는지도 알지 못하는 상황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위의 내용을 적은 분 스스로 분별을 해야 하는 것이지요.

만일 본인이 아무런 죄가 없는데 이 모든 일이 일어난 것이라면 그것은 신앙 안에서 감내해야 하는 세 번째 고통입니다. 예수님은 ‘행복하여라 내 이름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이라고 하셨지요. 만일 본인이 떳떳하고 의롭다면 지금 겪는 고통은 반드시 누군가를 살리는 고통이 될 것이고 하느님은 의로운 이의 고통을 절대로 잊지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자녀들이 느끼는 수치는 반드시 훗날 영예로 되돌아오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본인에게 어떤 식으로든 잘못이 있다면 그것은 본인의 선택의 결과로 마땅히 감내해야 하는 두 번째 고통이 됩니다. ‘수치심’이라는 것은 모든 죄의 결과로서 예비되는 것이지요. 어둠의 행위에 가담할 때에는 언제나 그 결과가 뒤따라붙게 됩니다. 죄를 짓는 이들은 죄의 달콤함에 빠져 그 순간적인 쾌락에 사로잡히지만 사탄은 절대로 공짜로 모든 것을 주지는 않습니다. 훗날 반드시 그 값을 치르게 됩니다. 우리는 인생에서 이 교훈을 늘 배워 왔음에도 불구하고 죄의 유혹은 그 결과를 사전에 생각지 못하게 만들고 눈 앞의 달콤함을 극도로 키워서 결국 우리를 유혹하고 마는 것입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그 죄 값이 지금 이 현세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만일에 그 죄를 숨기고 숨겨서 죽음 직전까지 숨길 수 있었다면 그 죽음의 순간의 압박감은 진정으로 엄청날 것이며 죽음 이후에 다가오게 될 결과는 더욱 엄청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차라리 현세에서 충분한 죄값을 치르고 그에 상응하는 결과를 감내하고 마음을 돌이켜 회개의 길로 접어드는 것이 훨씬 나은 셈입니다.

이제 자녀들의 수치에 대해서 살펴보아야 하겠습니다. 지금 일어나는 일이 자녀들로서는 뜻밖의 고통이 될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그들의 사랑에 달린 것입니다. 자녀들이 자녀된 도리로서 부모를 사랑할 때에 자녀들은 마땅히 고통을 겪게 되고, 그 고통은 고통당하는 부모의 곁에서 함께 하고 부모의 고통을 나누는 고통이 될 것입니다. 즉, 자녀들은 세 번째 고통을 겪고 있고 그 고통을 통해서 다른 이를 살릴 능력이 나오게 되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자녀들이 겪는 것은 수치가 아니고 사랑의 고통이 되는 것입니다. 물론 오늘날 이러한 사랑을 충만히 지닌 자녀들을 찾아보기가 쉬운 것은 아닙니다.

반대의 경우도 있습니다. 즉, 자녀들이 신자임에도 불구하고 부모를 전혀 사랑하지 않고 그들을 그저 수치와 경멸의 대상으로만 여긴다면 그들은 하느님 앞에서 합당한 대답을 마련해야 할 것이고 그들 스스로의 수치스러움을 미래에 예비하는 것입니다. 부모에게 잘못이 없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상황에 따라 달린 문제이고 무엇보다도 모든 사람에게는 오류와 잘못이 있게 마련이지요. 자녀들로서는 하느님께서 명하신 준엄한 계명이 생생하게 살아있기 때문입니다. 자녀들은 ‘부모에게 효도’해야 합니다. 그 말의 의미는 부모가 어떤 종류의 사람인가 하는 것에 따라서 효도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는 게 아니라 부모라는 이유 그 자체로 공경하고 섬겨야 하는 것이지요. 물론 부모를 공경하라고 한다고 해서 부모의 죄스러운 행위에 동참하라는 것은 당연히 아닙니다. 하지만 부모가 어떤 종류의 사람이든 부모로서 섬기고 공경하는 마음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설령 부모가 부모로서의 자격이 하나도 없는 사람이라 할 지라도 하느님이 이 세상에서 부모와 자녀 관계를 맺어 준 이상 그 사람은 우리의 부모가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과의 관계를 정면으로 파괴시키는 부모가 아닌 이상은 하느님의 명에 따라서 부모를 섬겨야 합니다.

성경에서는 부모의 이가 시리다고 자녀의 이가 시리지는 않다는 표현이 존재합니다. 즉, 저마다의 자리에서 하느님 앞에 합당한 응답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지요. 죄의 환경은 대를 이어 전해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결국 죄라는 것은 저마다의 상황 안에서 자신의 고유한 자유 의지로 결정하는 것이지요.

한 가정 안에는 언제나 문제의 소지가 존재하게 마련입니다. 그리고 각 구성원들은 자신의 사랑에 따라 응답하게 됩니다. 가정은 신적 사랑의 유대로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좋은 일이나 힘든 일이나 하느님 안에서 서로 함께 나누면서 하나가 되어야 하지요. 하지만 오늘날 이런 참된 가정의 유대를 찾아보기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훗날 수치스러울 일을 너무나 태연하게 저지르고 그 수치가 다가올 때에야 뒤늦게 후회를 하곤 합니다. 가정의 일치를 소홀히 하면 반드시 그 결과가 다가오게 됩니다.

질문이 구체적이지 않아 여러가지를 건드리는 장황한 글이 되고 말았습니다. 하느님은 자비롭고 의로운 분이십니다. 우리는 흔히 그분의 자비만을 생각하고 살아가지만 그분의 의로움에 대해서도 잊어서는 안됩니다. 본인의 고통의 성격을 올바르게 분별하고 그에 합당하게 하느님의 뜻을 찾아갈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Q) 사랑하라고 하는데 그렇게만 하면 저만 손해보고 무시당하는 것 같아요.

수난의 길

사랑하면 손해보는 것 맞습니다. 사랑하면 무시 당하기도 합니다. 그것이 이 세상의 현실입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쓰면 닳고 없어지는 것이 원칙입니다. 영원히 남아있는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한 사람이 ‘사랑’이라는 행위를 시작하면 자신이 가진 것을 남에게 주어 손해를 보게 되고, 또 자신이 한 행위가 그 올바른 의미로 받아들여지지 않고 무시 당하기가 일쑤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사랑은 미래에 언젠가 다가올 ‘손해’와 ‘무시’를 기본으로 삼고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사랑하지 않고 ‘장사’, ‘거래’를 합니다. 상대가 돌려줄 것을 계산해서 내어주는 것이지요. 인사를 되돌려 줄 만한 사람에게 인사하고, 나에게 선물을 되돌려 줄 만한 사람에게 선물을 합니다. 하다못해 고맙다는 겉치레 인사라도 되돌려 받아야 무언가를 내어줄 줄 압니다. 헌데 결국 장사라는 것도 언제나 공평하지 않습니다. 한껏 내어줬는데 조금 돌아올 때가 적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나중에 가서는 장사조차 하지 않으려고 하는 때가 많습니다. 그저 자신이 가진걸 자기 혼자 누리다가 세상을 마감하는 것이지요. 이것이 적지 않은 이들의 현실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르려고 작정하고 나선 이들입니다. 사람들을 가르치고, 치유하고, 돕고 하다가 결국에는 아무런 잘못도 없으신 채로 그 사람들로부터 멸시당하고 무시당하고 수난당하고 결국에는 죽음에까지 이르고 떠나가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그분에게서 형언할 수 없는 사랑의 표지를 발견한 이들이 그분을 따라 살아보겠다고 나선 모임이 바로 지금의 교회인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근본에는 그리스도가 계시고 그분은 이 세상에서는 멸시와 수난과 손해의 상징인 셈이지요. 신앙생활을 하면서 혹시 이를 몰랐다면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에게서 듣는 모든 말씀에서 이를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아들은 수난당하고 죽어야 한다. 오른 뺨을 맞으면 왼 뺨도 내어 주어라.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밀알 하나가 죽어서 땅에 묻히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수도없는 표현들 안에서 우리는 ‘손해’를 미리 알 수 있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현세에서 손해를 보리라는 것은 분명하고 확실한 일입니다. 그러나 이제부터 진실을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과연 우리는 손해를 보는 것일까요?

만일 인간에게 ‘영혼’이 존재하지 않고 오직 이 세상이 자신에게 주어진 전부라면 인간은 필히 손해를 볼 수 밖에 없습니다. 아무리 엄청난 재산을 지니고 멋들어지게 산 사람이라 할지라도 마찬가지입니다. 결국에는 자신의 삶을 죽음으로 마감해 버리고 말 것이니 허무가 아닐 수 없습니다. 모으고 쌓아도 다른 이들이 결국 차지하고 말아 버리니 인간의 삶은 그 자체로 허무이고 손해인 셈입니다. 열심히 노력한 것을 언젠가는 모조리 잃어버리게 되니 말이지요.

그러나 인간에게 ‘영원의 씨앗’이 존재하고 그것을 선물해주시는 분이 존재한다면 이야기는 달라집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면서 배우게 된 것이 바로 그것이지요. 세상에는 임금과 왕들을 넘어서는 진정한 주인이 있고 그분은 전능하시고 선하시고 의로우시며 사랑이 가득한 분이시라는 것을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은 영원 안에서 참된 행복을 지니고 우리를 기다리고 계신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지요. 다른 표현으로 ‘하느님의 나라’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자, 상황이 이러하다면 앞서의 이야기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전개됩니다. 앞서의 모든 상황들을 인간의 짧은 생애에만 비추어 보면 분명 손해보는 것이 맞습니다. 하지만 영원 안에서 비추어 본다면, 하느님 안에서 비추어 본다면 인간은 전혀 다른 의미를 지니게 됩니다. 하느님의 뜻에 따라 사는 사람에게는 그에 합당한 보상이 주어지고 반대로 그분의 뜻을 거슬러 산 사람에게는 그에 합당한 책임 추궁이 이루어지는 것이지요.

세상의 ‘손해’와 ‘무시’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이 있다는 것을 알고 묵묵히 하느님의 뜻을 따른 사람에게는 세상 안에서 누릴 수 있는 ‘희망’이 주어지고 나아가 영원 안에서 ‘행복’이 주어지게 됩니다. 반면 세상 안에서 오직 자신만을 생각하며 자신이 누릴 것을 모조리 누린 사람은 하느님께서 그에게 다가가 상응하는 정의의 기준을 제시할 것입니다. 만일 하느님과 그분이 원하는 것을 모르고 그렇게 했다면 ‘양심’에 비추어 어긋나는 행위가 있었는지 살필 것이고, 반대로 알고도 그렇게 했다면 그에게는 피할 수 없는 심판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훗날 분명히 이해하게 되는 것은 하느님은 우리에게 당신을 드러내어 알려 주시고 우리를 올바른 길로 이끌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변명의 여지’가 존재하지 않게 됩니다. 하느님은 사람이 선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 그리고 남을 도우며 살아야 한다는 충분한 지표를 드러내 보여 주셨지요. 그러나 적지 않은 이들은 그것을 과감히 무시하고 자기 자신의 이기적인 선택으로 지금의 모습을 형성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면 무시당하고 손해보는 것이 맞습니다. 우리 주님이 그렇게 처절하게 당하고 먼저 길을 가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그 길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길을 따라오는 이에게는 영원한 상급이 주어진다는 약속을 하셨고 우리는 우리의 주님이 거짓말을 하시는 분이 아니라는 것을 믿어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그 말을 믿지 못하고 철저하게 손해보지 않고 무시당하지 않는 삶을 살려고 애를 쓰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우리 주님의 약속을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위로를 체험하는 법

하느님은 위로를 주시는 분이라고 하는데 구체적으로 제 맘에 와 닿지 않습니다. 어떻게 느낄 수 있을까요?

힘든 일을 겪은 이 곁에 머무르면서 따스한 말을 건네거나 급작스럽고 괴로운 일을 겪은 이에게 다가가 다정함을 보여주는 것과 같은 행동이 위로하는 행위입니다. 그래서 누군가 실제로 우리 곁에 와서 이런 모습을 보이면 우리는 ‘위로’를 얻게 됩니다. 헌데 하느님께서 이런 위로를 건네신다고는 하는데 솔직히 우리가 체감적으로 느껴지는 것은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는 우리의 이해의 부족에서 기인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이야말로 참된 위로를 건네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이를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위로’라는 것의 본질에 대해서 파헤칠 필요가 있습니다.

여자친구에게 차인 사람이 있습니다. 소주 한 병을 사 들고 가서 그와 술을 들이킵니다. 그러면 어느정도 일시적인 위로가 됩니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근본적인 위로는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 순간의 괴로움을 중화시켜 줄 수는 있지만 소주 한 병과 그의 방문에 여자친구를 돌아오게 하지는 못하는 것입니다.

헌데 만일 누군가가 인생에 대한 경험이 풍부하고 지혜가 뛰어나서 여자 친구가 떠난 근본적인 이유가 무엇인지를 잘 설명해주고 남자에게 있어서 여자친구를 떠나게 한 요인이 무엇인지를 밝혀주며 그것을 고칠 수 있는 방법까지 알려준다면 그야말로 진정한 위로를 하는 셈이지요. 그리고 그 슬퍼하는 사람은 멀어진 여자친구의 마음을 돌이키고 다시 여자친구와 하나가 될 가능성도 활짝 열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슬픔을 겪는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습니다. 하지만 간단하게 말하면 원하는 것이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리고 대부분은 이 원하는 것이 지상의 것에 매여 있기 때문에 그것을 근본적으로 모두 성취한다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거의 대부분의 사람이 슬퍼합니다. 어릴 때는 선물이 갖고 싶어 울고, 젊어서는 연인이 사귀고 싶어 울고, 커서는 직장을 구하고 싶어 울고, 늙어서는 자녀들 때문에 울고, 그러다가 죽음을 앞두고는 생이 허망해서 우는 것이지요. 그리고 지극히 소수의 사람의 경우에는 원하는 것이 지상에서 이루어질 수 없는 천상적인 바람이기 때문에 슬퍼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이 두 경우에 모두 위로가 됩니다.

먼저 하느님을 올바로 알고 따르려는 사람은 무엇보다도 세상에서 자유로워지기 시작합니다. 이 사람은 이전까지 슬퍼하던 일들에서 자유로워지게 됩니다. 더는 돈 때문에 걱정을 하지 않게 되고, 인간관계 안에서 일어나는 여러가지 문제들에 시달리지도 않게 됩니다. 즉, 자신의 ‘옛 인간’이 겪던 모든 슬픔에서 차츰 차츰 해방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이 첫 단계의 위로를 충분히 주시는 분이십니다. 하느님은 모든 것의 이유가 되시고, 일용할 양식을 주시는 분이시고, 먼저 그분의 나라와 의를 구하면 나머지를 모두 곁들여 주시는 분이시고 우리의 눈을 들어 천상을 바라보게 도와 주시기 때문입니다. 물론 간단하게 설명했지만 이렇게 일이 쉽게 일어나지는 않습니다. 이런 참된 해방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부던히 하느님의 참 모습에 대해서 배우고 익히고 실천해야 하기 때문이지요. 어쩌면 이 첫번 과정만으로도 평생을 보내고도 부족할지 모릅니다.

일단 사람이 그렇게 속적인 인간의 모든 걱정 거리에서 해방되었다고 간주한다면 남은 슬픔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지 못하는 슬픔이 됩니다. 그러나 이 또한 하느님은 위로가 되시는 분이십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희망’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약속을 이미 알고 있습니다. 세상 안에서 당신 외아들의 길을 걷는 사람은 모두 참된 구원에 이르게 되고 진정한 해방을 얻게 된다는 것을 우리는 믿어 알고 있지요.

하느님의 위로는 안타깝게도 우리의 감각 기관으로 느낄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위로는 우리의 믿음을 통해서 얻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분의 위로는 한 인간의 신앙에 깊이 연계되어 있습니다. 믿음을 굳건히 지닌 이는 이 위로를 실제적으로 체험하지만 믿음이 없는 이는 아무리 노력하고 찾아보려해도 얻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지닌 이에게 죽음이 위협이 되겠습니까? 만일 한 사람이 죽음이 두렵지 않다면 무엇이 그를 슬프게 만들 수 있을까요? 또 전능하시고 영원하시며 약속에 충실한 분이 약속된 영원한 상급을 주신다고 하는데 이 세상에서 잠시 십자가를 지는 것이 그리 힘든 일이 될까요? 그러나 이는 오직 ‘신앙’으로만 이해할 수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이를 신앙의 신비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믿는 이들은 이 위로를 실제적인 것으로 구체적으로 체험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믿음이 없는 이에게는 모든 것이 수수께끼일 뿐입니다.




잘 산다는 것의 의미

(Q) 매일 아침 오늘 하루 잘 살아보겠다고 결심하지만 (구치소) 한 방의 자매들로 인해서 결심이 지키기가 어려워요.

잘 산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내 주변 사람들이 모두 나에게 인사할 때 나도 그들에게 인사하면 나는 잘 사는 것일까요? 그건 누구라도 그렇게 하지 않을까요? 잘 산다는 것, 잘 살아 보겠다고 결심하는 것은 어려움과 역경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이겨내고 바람직한 하루를 만들어 나가는 실천적인 삶을 의미합니다.

모든 조건이 갖추어져 있을 때에 별다른 문제 없이 사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는 나아가 세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 개개인은 늘 부족함이 있고 뭔가 실수를 하게 마련이며 그러한 오류들이 모여 있는 세상은 더더욱이 쉽지 않은 법입니다. 그래서 세상 안에서 반대와 성가심은 늘 예상하고 있어야 하는 우리의 삶의 일부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매일 아침 오늘 하루를 잘 살겠다고 결심할 때에 ‘설령 내가 억울한 일을 당하고 부당한 일을 당하더라도 증오로 맞서지 않고 온유와 친절로 맞서서 하느님 앞에 좋은 표양을 남기겠다’고 다짐할 수 있다면 한 방의 자매들은 걸림돌이 아니라 오히려 나의 결심을 도와주는 받침대가 될 것입니다. 도전 거리가 없이는 진보도 없는 셈이니까요.

사실 내 주변의 성가신 일들과 인물들은 하느님의 오묘한 섭리에 의해서 배치된 것들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뜻 안에서 살아가고자 할 때에 모든 것은 나의 구원에 소용이 됩니다. 반대로 내가 나의 이기적인 뜻대로만 살고자 할 때에 모든 것은(아무리 좋은 것이라 할지라도) 나에게 반대로 작용하게 됩니다.

언제라도 잘 살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잘 산다는 것은 어려움이 있기 때문에 더욱 잘 살 수 있는 법입니다. 온실 속의 화초는 언뜻 잘 자라는 것 같지만 조금만 한파가 몰아쳐도 시들어버리고 죽어버리고 맙니다. 이처럼 우리의 ‘덕’이라는 것도 상황이 좋을 때에 드러나는 것은 별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오히려 반대로 상황이 어려울 때에, 즉 나의 이웃들이 나에게 친절하지 않고 불성실하고 거짓말을 하고 나를 이용해 먹으려고 할 때에도 내가 가진 진리와 선과 사랑과 온유와 친절의 빛으로 그들에게 다가설 때에 나는 진실한 덕을 지니고 있는 것이 됩니다.

모쪼록 결심을 조금만 더 구체화 해서 일상 안에서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이해, 책임, 용서 그리고 신앙

(Q) 어린 시절 제 마음을 헤아려 주지 않았던 부모가 원망스럽습니다. 용서가 안돼요. 지금 구치소에 있는 제 처지도 부모 때문인 듯 그런 생각을 많이 합니다.

이해, 책임, 용서

포함된 주제가 참으로 다양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씩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책임

우리는 그릇된 일에 대해서 가능하면 책임을 지지 않으려고 합니다. 곧잘 남에게 책임을 돌리곤 하지요. 그러나 과연 그게 가능할까요? 우리는 우리가 한 모든 말과 행동에 대해서 온전히 자유로울 수 있는 존재일까요?

만일 우리가 로봇이라면 우리에게 탓을 돌릴 수 있는 근거는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로봇이라는 존재는 스스로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프로그램 되어진 그대로 이루어질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로봇을 만들어 놓으신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자유의지’를 가진 인간을 만들어 놓으신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스스로에게 그 어떤 탓도 돌리지 않고 모든 것은 온전히 내 주변의 환경과 사람들에게 탓이 있노라고 한다면, 결국 그 사람들도 같은 말을 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러면 그 어느 누구 하나 자신의 행동에 책임지는 사람이 없게 되고, 결국 최종 책임자는 우리들을 이 세상에 만들어 놓으신 하느님이 되는 것이지요. 즉, 우리가 죄를 저지르면 그 죄의 책임이 하느님에게 돌아가는 셈입니다.

내가 지은 잘못에 대해서 우리는 내 주변의 모든 사람들을 원망하고 최종적으로 하느님을 원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건 말이 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우리 죄의 책임을 돌릴 수 있는 하느님은 이미 하느님이 아니십니다. 우리는 우리의 몫을 책임져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선택한 부분을 스스로 책임질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해

우리는 타인을 어떻게 하면 이해할 수 있을까요?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이해하려는 노력일 것입니다. 우리가 정말 타인을 이해하려고 다가선다면 어떻게든 타인에 대해서 이해를 시도할 수 있는 여러가지 방법이 마련될 것입니다. 그와 대화를 나누던지, 그와 함께 삶을 살아가던지 하면서 이해를 시도해 볼 수 있겠지요.

그러나 다른 한 편으로 우리는 절대로 타인에 대해서 완전히 알 수 없다는 것도 사실입니다. 인간은 하나의 신비입니다. 우리는 타인의 내면을 일일이 알 수는 없습니다. 다만 가능한 선까지 이해하려고 노력할 뿐이지요. 그리고 적지 않은 경우에 우리는 서로 오해를 하고 살아가기도 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누군가를 진정으로 이해하는 방법은 인간적인 방법으로는 한계가 있습니다. 우리는 오직 ‘하느님’을 통해서만, 즉 같은 성령을 지니고 있을 때에만 서로를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능력으로 누군가를 판단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에 대해서 모르기 때문이지요. 심판하는 분은 오직 하느님 뿐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심판자로 스스로를 자처하고 그들을 심판하고 그래서 그가 나에게 한 일련의 행동에 대한 나의 내면의 심판 때문에 그에게 섭섭한 마음이 생기게 됩니다.

용서

용서는 하나의 선택입니다. 용서는 나에게 해를 끼친 것을 고스란히 되갚고 나서야 그 상대를 용서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거래’일 뿐이고 세상 어느 누구든지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용서는 죄를 지은 사람에게 베풀어 주는 사랑의 행위, 내가 의지적으로 선택하는 사랑의 행위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용서를 할 수 없다고 할 때에 그 말은 그를 사랑할 의도가 없다는 말이 됩니다. 그러나 하느님 앞에 선 자신을 아는 사람이라면 이런 말은 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 역시도 오류가 있고 잘못된 것이 존재하기에 하느님의 용서를 바라면서 정작 우리는 남을 용서하지 못하겠다고 하는 것은 이기적인 마음에 불과합니다. 용서는 결국 그 상대를 위한 행위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을 위한 행위이기도 한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내어주는 만큼 하느님으로부터 되받게 되어 있습니다.

책임의 인정
무엇보다도 먼저 하느님 앞에 솔직해야 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행한 부분의 책임을 스스로 짊어지기 위해서 노력해야 합니다. 그리고 스스로의 선택의 그릇된 점을 솔직히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하느님 앞에 뉘우칠 줄 알아야 합니다.

이해의 시도
그리고 나아가 그런 겸손을 바탕으로 주변 사람들에 대해서 이해를 시도해야 합니다. 어린 시절 부모님이 본인의 마음을 헤아려주지 못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면 도대체 왜 그런 일이 일어났을까를 더 깊이 생각해보고 그들의 입장을 이해하려고 노력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 자신도 불완전하면서도 이런 우리 자신에 대한 하느님의 이해를 구한다면 마땅히 우리도 다른 이들에게 이해를 시도해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용서의 실천
우리가 누군가의 입장을 이해할 수 있다면 보다 쉽게 용서해 줄 수 있게 됩니다. 그러나 설령 이해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용서를 시도할 수 있습니다. 거듭 말하지만 용서라는 것은 거래가 아니라 사랑의 결심입니다. 우리는 자유로이 사랑을 선택하고 그것을 실천할 수 있습니다.

신앙

사실 이 모든 것은 ‘하느님’에 대한 올바른 인식과 믿음이 없이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절대로 손해보는 장사를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 안에서 잃고 살아가기로 작정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그 모든 불의를 말끔히 씻어주실 하느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참된 사랑은 하느님이 아니고서는 다른 어느 곳에서도 온전히 이루어질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사랑의 상징으로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님을 지니고 있습니다. 가장 억울하고 다른 이를 원망할 ‘권리’가 있는 분이라면 단연코 예수님일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온갖 좋은 일을 다 하였지만 결국 그들에게 배척을 당하고 십자가의 죽음을 당하셨으니까요. 그래서 오직 그분만이 참된 사랑에 대해서 가르칠 자격이 있고 용서에 대해서 가르치실 수 있습니다. 신앙이 없이는 위에 서술한 모든 것이 말도 안되는 웃긴 이야기가 될 뿐입니다. 그러나 신앙을 지닌 마음은 위의 모든 이야기를 받아들일 수 있게 됩니다.




누구에게 효도를 할 것인가?

(Q) 천주교 신자로 살다가 개신교에 열심 하신 시댁에 시집을 왔습니다. 시어머니 강요 때문에 성당에 다니지 못하고 개신교에 다녔습니다. 이제 제 나이도 아이들의 배우자를 걱정해야 하는 나이가 되었습니다. 용기를 내서 다시 성당에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병중에 계신 시어머니의 봉양도 더 열심히 합니다만 제가 성당에 다니기 시작하자 집안 분위기가 찬바람입니다. 시어머님 다니시는 교회에 같이 안 가는 것이 불효 인가요? 교회를 같이 가야만  효도일까요? 남편은 철저하게 중립을 지켜주고 있지만 제 마음이 편하지 않습니다. 제가 잘하고 있는 것 맞는지요?

천주교와 개신교의 갈등, 효도의 문제, 남편과 아내의 문제 등등이 여러가지로 혼합적으로 뒤섞여 있는 것 같습니다.

하느님은 한 분 뿐입니다. 모든 신앙인들은 한 분이신 하느님을 섬기면 됩니다. 그 뿐입니다. 하지만 때로 사람들의 생각은 그렇지 않습니다. 저마다 자신들이 다니는 교회가 진실한 교회라고 생각하는 것이 보통입니다.

그렇다면 이것이 무슨 말일까요? 모든 종교가 다 똑같으니 서로 상관하지 말자는 이야기일까요? 거듭 말하지만 하느님은 한 분 뿐이고 당신이 만드신 교회도 하나로 모아질 뿐입니다. 하지만 그 모아짐의 근거는 무엇일까요?

하느님이 만드신 교회의 근본 안에는 ‘사랑’이 존재해야 합니다. 그것이 핵심입니다.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한다면 서로 존중하게 될 것입니다. 더 많이 사랑하는 사람이 하느님을 더 많이 아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에는 언제나 두 가지 줄기가 존재합니다. 먼저는 하느님 사랑이고 다음이 이웃 사랑입니다. 바로 이 두 핵심 줄기를 올바로 잘 지키는 종교가 진실한 종교가 될 것입니다. 이는 단순히 교파의 교리에 달린 문제가 아니라 그 구성원들의 진실한 삶에 달린 문제인 것입니다.

우리는 가톨릭 신자로서 우리가 몸담고 있는 교회가 그 근본 방향인 사랑에 대해서 진실하다는 것을 알고 있고, 우리는 그 사실을 아는 만큼 그것을 살아내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는 우리가 하는 말에 거짓이 없다는 것을 드러내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삶이 진실과는 동떨어진 모습을 보이면서 우리의 종교는 무조건 옳다고 우기는 것은 누가 보더라도 말이 안되는 가식적인 이야기에 불과하게 됩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세상 그 무엇보다도 사랑해야 하며 우리 주변의 이웃들을, 그들이 다른 종교를 지니고 있다 하더라도 사랑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제 본격적으로 질문으로 들어가봅시다. 참된 효도는 가장 우선적으로 하느님에게 드리는 것이 참된 효도일 것입니다. 그리고나서 부모님에 대한 효도가 있습니다. 부모님에게 효도를 하기 위해서 죄를 지을 필요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느님을 거스르는 일, 즉 참된 아버지에 대한 불효가 되기 때문입니다.

자매님의 결정이 정말 참된 아버지 하느님을 섬기기 위한 것이라는 분별을 바탕으로 내려진 결정이라면 그 결정을 굳게 지켜야 하고 그 어떤 압박감에도 굳건히 견뎌낼 줄을 알아야 합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고 이제는 본인도 나이가 되었고 소위 어르신이 되려고 하니 더는 어르신에게 막연히 순명할 필요 없이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고 따라서 내가 가고 싶은 종교를 가고 싶은 거라고 한다면 그것은 이웃사랑을 거스르는 것이므로 삼가하는 것이 좋습니다.

다시 정돈해 드리면, 꾸준히 성당에 나가는 것이 본인에게 있어서 보다 큰 사랑의 도전이라고 생각한다면 어떤 압박에도 끈질기게 그 결심을 지켜야 합니다. 그리고 다른 이들에게 흠이 잡히지 않도록 생활을 더욱 완전하게 해야 합니다. 만일 하느님의 사랑에 깊이 몸담고 있다면 비록 주변에서 온갖 원성이 들려온다 하더라도 마음은 편안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실천하는데 마음이 편치 않다면 그 내면에 하느님을 향한 순수한 사랑이 아니라 서로의 욕구가 충돌하는 경우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렇다면 어디서부터 구체적으로 잘못된 것인지 스스로를 진실하게 성찰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족을 하나 달자면, 남편과 아내는 한 몸이어야 합니다. 남편에게 ‘철저한 중립’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남편은 아내의 문제에서 동떨어진 사람이 절대로 아닙니다. 남편과 아내는 서로 깊은 대화를 통해서 온전히 의사를 일치시켜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죄를 기워갚기

(Q) 저는 존속 살인죄로 XX 구치소에 있습니다. 저에게 다가온 두려움과 큰 상처 때문에 아직은 나이어린 여자이지만 이렇게 큰 죄를 지었습니다. 부모님과 하느님께 과연 용서를 받을 수 있을까요? 앞으로 속죄하기 위해 제가 어떻게 해야 하나요? 다망 하신 중에도 이렇게 시간을 내어 주셔서 고맙습니다.  앞으로 예쁜 일만 가득 하시길 바래요.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이유는 예수님이 바로 인류를 위해 바쳐진 속죄 제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보다 더 나은 속죄 제물은 없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우리는 이를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속죄, 달리 말해 죄를 기워 값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이렇게 상상해 볼 수 있습니다. 누군가 길에 쓰레기를 버립니다. 그러면 그는 ‘쓰레기를 버린 잘못’을 저지른 것이 됩니다. 그리고 그 ‘쓰레기’는 바닥에 방치되어 다른 사람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겠지요. 그러나 거의 모든 경우에 그러하듯이 쓰레기를 버린 사람이 버린 그 쓰레기를 다시 줍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그는 그렇게 버리기만 할 뿐 치울 줄은 모르는 사람입니다.

영적인 면에서도 쓰레기들이 있습니다. 바로 우리가 ‘죄’라고 부르는 것들이지요. 이러한 영적 쓰레기들은 한 사람의 자유의지의 그릇된 선택에서 나와서 자기 자신과 다른 이들을 괴롭히는 것입니다.

자, 이제 다시 쓰레기의 문제로 돌아와 봅시다. 쓰레기를 버린 사람이 치우지 않은 그 쓰레기는 그 길을 지나는 모든 이들을 괴롭히게 됩니다. 그 역겨운 냄새와 더러운 모습으로 사람들을 괴롭히지요. 헌데 이때 누군가가 자발적으로 나서서 그 쓰레기를 치우는 사람이 있습니다. 선한 사람이고 다른 이를 배려할 줄 아는 사람이지요. 그가 쓰레기를 치우면 그 쓰레기는 더이상 남아있지 않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대속’의 개념입니다. 타인이 버린 쓰레기를 우리가 치우는 것이지요.

영적으로 세상에 넘쳐난 쓰레기를 치우시는 분이 있습니다. 바로 우리의 예수님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흠도 티도 없이 이 세상에 태어나 사람들의 죄를 짊어지시고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를 올바로 이해하는 사람은 얼마 없습니다. 사람들은 너무나 오랫동안 십자가를 보아오고 만성이 되어 버려서 별로 느끼는 것이 없어졌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여전히 같은 일을 하고 계시고, 이 세상에 당신의 제자들을 두어 같은 일을 하게 하셨지요. 교회라는 것은 엄밀히 말해 단순히 제도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이 일을 나누어 받은 모든 이를 말하는 것입니다. 즉 십자가를 지고 그분의 뒤를 따르는 모든 이를 말하는 것이지요.

쓰레기를 버린 그 사람은 어떻게 될까요? 쓰레기는 다른 이들에 의해서 사라질 수 있지만, 여전히 쓰레기를 버린 ‘잘못’은 그에게 남아 있습니다. 그에게 필요한 것은 ‘뉘우침’과 ’결심’입니다. 즉 쓰레기를 버린 것이 다른 이들을 괴롭히는 것을 알고 깨달아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다시는 쓰레기를 버리지 않겠다고 결심하는 것이지요.

영적으로도 마찬가지 일이 일어납니다. 이 사람은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다시 쓰레기를 버리지 않을 결심을 세워야 합니다. 그리고 모든 쓰레기의 청소부이신 예수님에게 다가가 잘못을 고백하고 용서를 받아야 하지요. 왜냐하면 영적 쓰레기를 치우시는 분은 하느님이시니까요.

하느님은 기꺼이 죄를 용서해주시는 분이십니다. 다만 죄를 지은 이에게 ‘뉘우침’과 ‘결심’을 기다리시지요. 여전히 죄를 지을 생각으로 가득한 사람을 아무 이유 없이 용서하시지는 않습니다. 사실 하느님은 죄인에게마저 필요한 은총을 그날 그날 내려 주시는 분이십니다. 하지만 죄인 스스로가 자신의 그릇된 결심 안에서 더 많은 저주를 끌어들이는 셈이라고 할 수 있지요. 하느님은 저주하지 않습니다. 죄를 지으려는 생각을 지닌 본인 스스로가 자신을 저주하는 것일 뿐입니다.

하느님과의 관계가 올바로 세워졌다면 그 다음에는 주변을 돌아보고 내가 잘못을 저지른 이들에게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들이 나의 뉘우침을 받아들이고 우리를 용서할지, 아니면 우리의 변화된 삶을 보고도 여전히 복수심과 증오와 원한에 불타오를지 하는 것은 이제는 그의 선택이 되는 것입니다. 잘못을 저지른 이로서는 다만 최선을 다해서 그들에게 헌신하고 사랑하려고 노력할 뿐이지요. 그것 외에는 달리 더 할 수 있는 일도 없기 때문입니다.

끝으로, 죄를 지은 이가 속죄를 할 수 있는 최고의 방법은 사랑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을 따라 나서서 다른 이들이 저지르는 잘못을 본인이 짊어지고 기워 갚는 것이지요.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여전히 수많은 영적 쓰레기들이 넘쳐나고 있으며 예수님은 당신의 일을 이어서 할 수 있는 일꾼들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일꾼들이라고 해서 무조건 사제나 수도자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참된 일꾼은 드러나지 않는 곳에서 진실한 사랑을 실천하는 이들입니다. 교회는 전통적으로 ‘기도, 단식, 자선’을 3가지 속죄의 방법으로 내세웁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그런 ‘방법들’이 아니라 실제로 우리가 다른 이의 부족함을 채우겠다는 결심과 실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머니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설거지를 대신 하는 아들에게 사랑이 없다고 누가 말할 수 있겠으며 그의 작은 사랑의 행위가 세상에 작은 빛을 더하고 있다는 것을 누가 부정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 모두는 예수님을 따라서 우리 자신의 죄와 세상의 죄를 기워 갚을 수 있습니다.





성과사랑(생명의소중함)

1.동성애자를 우리청소년들이 어떻게 바라보면 좋을까요?
하느님은 남자와 여자를 만드셨고 그 둘이서 서로 한 몸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그 관계를 벗어나는 것은 부자연스러운 것이고 합당하지 않은 것입니다. 동성애자를 바라보는 시각에 있어서 그들을 인격적으로 대하고 한 형제로 바라보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하지만 그들이 육체적으로 행하는 같은 성 끼리의 부자연스러운 관계마저도 합당한 것이 될 수는 없는 법입니다. 특히나 인성이 형성되고 있는 청소년들에게 있어서 합당하지 않은 것은 합당하지 않다고 분명히 가르쳐 줄 필요가 있습니다. 동성애자는 사랑해야 할 대상이지만, 그들이 행하는 행위는 하느님의 뜻에 합당하지 않은 것입니다.

2.피임에 대한 생각을 알려주세요~
피임을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성’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필요합니다. 성은 단순한 육적 쾌락의 행위가 아니라 남성과 여성 고유의 역할의 차이와 사랑, 나아가 남녀가 혼인으로 일치하여 사랑의 정점에 이르는 구체적인 행위를 말합니다. 만일 성이 제 목적대로 올바르게 이루어진다면 ‘피임’이라는 것 자체가 존재할 이유가 없을 것입니다. 남자와 여자가 하느님을 향한 사랑 속에서 성가정을 이루고 서로 존중하고 살아간다면 자연스러운 주기 안에서 다가오는 자녀라는 선물을 너무나도 감사히, 또 소중히 여길 것이고 서로의 사랑은 더욱 깊어갈 것입니다.

피임이라는 것은 바로 이 근본적인 선을 벗어나기 때문에 생기는 필요성입니다. 둘이 하느님 안에서 관계를 갖지 못하고 나아가 서로 온전히 사랑하고 자녀를 책임질 정도로 사랑하지 못하기 때문에 자녀가 생기는 것을 가로막으려는 것이지요. 만일 모든 가정이 그리스도교적인 가치 안에서 살아간다면 ‘피임’은 존재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세상은 이상적이지 않고 지금의 육적인 세상에서 성관계의 유혹은 피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피임의 다양한 방법을 알아둘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자체로 큰 죄가 되는 ‘피임’의 방식은 피할 줄도 알아야 합니다. 즉, 피임이 아닌 수정란을 죽이는 사후 피임약은 반드시 피해야 하고, 장기적으로 여성에게 호르몬 이상을 가져다 줄 수 있는 화학적인 피임약들도 절제하고 피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면 결국 남는 것은 교회가 권장하는 자연 주기법과 콘돔을 사용하는 물리적인 피임 방법 뿐이겠지요. 그러나 자연 주기법은 부부 사이에서 상호 존중하는 관계 속에서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고, 결국 부부가 아닌 관계에서 스스로의 욕구를 절제하기 못해 이루어지는 관계 안에서 피임 방법은 성에 대한 올바른 지식 안에서 이루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종류의 성교육은 이미 학교에서도 이루어지고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거듭 강조하지만 피임이라는 것은 그 자체로 축복받지 못한 관계라는 것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피임을 가르치기 이전에 남녀의 성의 차이와 참된 사랑에 대해서 올바르게 가르치는 것이 반드시 선행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피임의 지식만을 배워서 결국 성을 망가뜨리고 말 것입니다.

3.혼전순결을 지켜야하는가? 사랑을하면 꼭 성행위를 해야하는가?
혼전순결이라는 것은 마치 고리타분한 이야기처럼 들립니다. 이는 오늘날 혼인의 가치 자체가 무너져 내리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혼전 순결을 가르치려면 먼저 ‘혼인’을 올바로 가르쳐야 합니다. 과연 혼인은 무엇입니까?

혼인이 단순한 계약이라면 맺고 끊고 마음대로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세상의 혼인은 그런 모습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헐리우드 스타들이 몇 번이나 이혼을 하고 새로이 혼인을 한다는 이야기를 심심치 않게 듣게 되고 사람들은 그것에 대해 수근대면서도 부러워하기도 하는 실정입니다.

하지만 진정한 가치의 혼인은 단 한 번 뿐이며, 죽을 때까지 이어지는 것이며, 자녀 출산을 통해서 완성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필생의 약속 속에서 혼인은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며 따라서 그런 약속을 온전히 서로 주고받을 수 있을 때에 ‘성(性)’이라는 것도 온전히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지요. 혼전순결을 지켜야 하는가 말아야 하는가를 물을 것이 아니라, 과연 혼인은 신성하고 거룩한 것인가? 아니면 동네 개들 접붙듯이 이 사람 저 사람 맺었다 끊었다 할 수 있는 것인가에 대한 질문과 대답을 먼저 스스로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자연 혼전 순결에 대한 의견도 뒤따라 나오게 될 것입니다. 결혼을 엉망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혼전 순결에 대한 의식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지만, 반대로 결혼을 일생의 결정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그 결혼 안에 준비된 성도 소중히 여기게 될 것입니다.

남녀가 온전히 사랑을 하면 당연히 성행위를 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 성행위라는 것은 거룩한 행위이지 쾌락 ‘만’을 추구하는 행위는 아니라는 것을 말해두고 싶습니다. 성행위는 인간에게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이며 남녀의 사랑이 그 정점에 이르렀을 때에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현대의 문제는 그 사랑이 정점에 이르기 전에 ‘쾌락’을 즐기기 위해서 성행위를 한다는 것입니다.

4.인간은 성별이 왜 구별되는가?
하느님께서 그렇게 만드셨습니다. 서로가 서로를 필요하게 만드셨지요. 그리고 그 이유는 당연히 ‘사랑’ 때문일 것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홀로 온전히 완전할 수 있다면 상대를 필요로 하지 않을 것이고 딱히 상대를 향해 사랑을 내어주고 사랑을 갈구할 이유도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남자와 여자가 만나서 온전히 한 몸을 이루도록 하느님께서 창조 때에 정하신 것입니다. 참으로 아름다운 일이지요. 물론 때로는 하느님을 너무 사랑해서 전적으로 하느님에게 자신을 봉헌하는 사람도 있기는 합니다.

5.어떻게 하면 성병에 걸리는가?
당연히 성병을 지닌 사람과 성관계를 맺으면 성병에 걸립니다. 하지만 다른 요인으로 성병의 원인이 되는 병원균에 감염되더라도 성병에 걸립니다. 따라서 문란한 성관계를 하는 사람에게는 당연히 성병에 걸릴 확률이 높아지게 되겠지요. 하지만 성행위를 하지 않아도 성병에 걸릴 확률이 없지는 않을 것입니다. 특히나 여성의 경우에 청결하지 못한 생활을 하면 성기의 부위가 상할 수도 있을테지요. (이 부분은 제가 산부인과 의사가 아니라서 부족한 지식으로 인해 올바로 대답할 수 없습니다.)

6.청소년기에 이성에 대한 바람직한생각이 무엇인가?
청소년기에 자신의 성에 대해서 인식을 하고 나아가 이성에 대해서 호기심을 가지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그러나 필요 이상의 선을 넘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성관계는 늘 ‘책임’을 동반합니다. 그리고 청소년들은 아직 ‘책임’을 질 만한 준비가 되어 있지 않지요. 따라서 책임을 온전히 질 수 있는 나이와 준비를 갖추었을 때에 그 이상으로 나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이성을 만나고 서로 다른 성의 모습 안에서 우정을 쌓아 나가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7.지금 낙태를 해도 괜찮은가?(성폭행을당했을때)-아이입장으로는 낙태는안되고,피해자입장에서는 범죄자의 아이를 낙태해야되는것이 아닐까?
비록 성폭행을 당했다 하더라도 낙태는 한 인간을 죽이는 행위이기에 하면 안됩니다. 아이를 낳고 입양을 보내는 방법을 찾는 것이 합당합니다. 그리고 낙태는 자연스러운 행위가 아니기 때문에 어떻게든 산모에게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물론 교회는 단순히 모든 상황에서 낙태를 하지 말라고 우격다짐으로 가르칠 것이 아니라,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수 있도록 예방하는 데에 최선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즉, 성욕을 지나치게 발동하는 현대 문화에 대응해서 절제와 경건과 상호존중을 가르쳐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일상적인 예방의 가르침을 전하는 중에 낙태에 관한 문제가 닥쳤을 때에는 ‘생명’을 수호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런 저런 두려움에 사로잡혀 낙태를 저지른 후에 뒤늦게 후회하고 다시 교회의 품으로 돌아오려는 이를 잘 끌어안아 주는 것도 필요한 일입니다. 성폭행은 분명 사악하고 슬픈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게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고 성폭행이 이미 일어났고 그 뒤의 일들도 이미 일어나 버렸다면 약하고 가난한 이를 끌어안아 줄 줄도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 낙태는 아무런 죄도 없는 새로운 생명을 죽이는 행위입니다. 이 명제에는 이견이 있어서는 안됩니다.

8.음주 후 성범죄 행위는 형을 줄여주는데 이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분명 음주라는 것은 인간의 의지를 약하게 만들기는 합니다. 하지만 그 구체적인 분별은 법정에서 심판하는 일을 맡은 이들이 올바르고 합당하게 분별해야 할 것입니다. 이 문제는 단순히 윤리적인 문제이기 보다 우리 사회의 ‘성에 대한 인식’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성폭행을 하는 이들은 주로 남자들이며 그 사안을 심판하는 이들도 주로 남자들인 경우가 많고, 나아가 우리 사회는 남성들의 성적 일탈을 너무나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으로 인식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자연 이런 판결의 경우에 합당한 결과가 나오지 않는 것은 충분히 예상해 볼 수 있습니다. 성에 대한 인식을 그리스도교적으로 올바로 세울 필요가 있습니다.

9.청소년기에 성관계가 옳은지에 대한 생각?(한국 평균 첫경험나이15.1세)
당연히 옳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청소년들이 사랑과 책임이라는 성에 대한 인식을 올바로 할 리가 없기 때문이고 단순한 호기심일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서투른 성관계 속에서

10.여자가 화났을때 대처법
여성은 감정이 풍부하고 참으로 섬세합니다. 그래서 남성은 여성의 감정적 변화에 올바로 대처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감정이 풍부하다고 해서 매번 화를 내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도 아닙니다. 화를 내는 이유가 남성에게 있다면 당연히 남성이 뉘우치고 화를 낼 여지를 반복하지 말아야 할 것이고, 반대로 화를 내는 이유가 여성 본인에게 있다면 스스로 반성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날 남녀 간의 연애 문제는 단순히 남녀의 차이에서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인격적 미성숙에서 비롯하는 경우가 더 많으리라 생각합니다. (참고로 연애를 해 보지 않아서 모른다는 솔직한 대답을 남기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11.남녀 가치관의 차이
남녀가 다르다고 해서 가치관이 다르지 않습니다. 가치관이라는 것은 모든 인간이 저마다 삶의 배경에서

12.연애잘하는법
외모에 혹하는 배우자와 연애를 잘 하려면 외모를 꾸미면 되고, 내면의 가치를 찾는 배우자와 연애를 하려면 내면의 가치를 꾸미면 됩니다. 만일 연애를 잘 한다는 표현을 이런 저런 배우자와 만나고 헤어지고를 반복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큰 착각에 빠져 있다는 말을 하고 싶습니다. 서로 사랑을 한다는 것에 대한 올바른 인식이 필요합니다. 단순히 남녀 상호간의 이성의 호기심을 채우고 쾌락을 추구하는 것을 두고 연애를 한다고 생각한다면 참으로 초라한 생각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런 질문은 사실 대답할 가치도 없습니다. 사랑을 진정으로 하는 방법을 물었다면 더 나았을 것 같습니다.

13.결혼을꼭해야하는지
결혼이라는 것은 의무가 아닙니다. 결혼은 상호간의 선택이고 결심입니다. 배우자를 선택하고 죽을 때까지 사랑하겠다고 결심하고 그것을 지키는 것이지요. 따라서 결혼을 할 자신이 없으면 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러나 결혼은 하지 않은 채로 독신으로 살면서 이성과 연애만 하고 성관계만 즐기겠다는 것은 지극히 개인적이고 이기적인 생각입니다. 성이라는 것은 단순히 ‘쾌락’을 위한 도구가 아닙니다. 하느님은 성을 그렇게 만들지 않으셨습니다. 하느님은 혼인 안에 사랑의 극단에 ‘성’을 배치해 두셨습니다.

14.결혼 후 아이를 낳아야하는지
결혼은 아이의 출산으로 완료됩니다. 그리스도교적 혼인 안에서도 아이를 낳지 않으면 혼인은 완료되지 않습니다. 결혼 후에는 아이를 낳아야 하고 자녀 출산이라는 하느님의 축복을 받아야 합니다. 아이는 낳지 않고 결혼 생활 만을 하겠다는 것은 하느님의 뜻에 합당하지 않고 또 한국 문화 안에서 부모님에 대한 도리에도 합당하지 않은 일입니다.

15.공공장소에서 스킨쉽에 대한 허용정도는?
딸을 낳아서 그 딸이 밖에서 하고 다니는 것이 부끄럽지 않을 정도라고 생각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만일 딸이 길거리에서 다른 남자와 딥키스를 하고 서로의 몸을 더듬어도 아무렇지도 않다고 생각한다면 그런 문화 속에 살고 있기 때문이거나 아니면 정신이 좀 이상한 사람입니다.




하느님의 자녀의 신원

(Q) 우리 성당 공동체에 속한 형제들에게 저는 어쩜 반듯한 신앙인처럼 보일 수 있겠지만 세상 사람들에게는 제가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향기를 품어내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아마도 만나는 사람들의 성향에 따라서 행동하는 저의 모습 일 듯싶습니다.
세상 사람들 속에서도 저는 하느님의 사람으로 보이길 바라지만 이루어 지지 않습니다. 저는 어떤 마음으로 세상에 있어야 할지요

진정한 하느님의 사람은 이 공동체에서는 이런 사람으로 저 공동체에서는 저런 사람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사람은 내면으로부터 하느님의 사람일 뿐입니다. 하느님의 사람이 된다는 것은 그 껍데기를 하느님의 사람으로 꾸미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 내면이 하느님의 사람이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먼저 본인 스스로 과연 ‘하느님의 사람’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올바른 정의를 내릴 필요가 있습니다. 목표가 뚜렷해야 가야 할 방향이 보이는 법이니까요. 혹시 ‘종교 색채를 강하게 띤 사람’을 하느님의 사람으로 알고 있었다면 이제는 그 생각을 수정할 필요가 있습니다.

거듭 말하지만 하느님의 사람은 내적인 변화를 통해서 갖춰지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사람은 종교생활을 충실히 하는 사람, 기도의 휫수를 많이 하고 미사를 꼬박꼬박 나가고 금육, 단식을 지키는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께 충실하고 성실하고 진실하며 온유하고 친절하고 사랑을 실천하고 겸손하고 인내하는 사람을 두고 말합니다. 그리고 한 사람이 그렇게 내면으로 하느님의 사람이 될 때에 그에게는 자연스레 하느님의 사람의 향기가 뿜어져 나오게 마련입니다. 그는 절로 주변의 빛과 소금이 되는 법입니다. 예수님은 이를 두고 ‘좋은 나무에서 좋은 열매가 열린다’고 아주 간단하고 소박하게 표현을 하셨지요.

예수님이 살아계실 당시에 많은 이들은 예수님의 권위에 대해서 인정하고 있었지만 그것을 살아내지는 않았습니다. 심지어 어둠의 영들도 예수님의 신원에 대해서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지요. 그러나 그 영들은 예수님의 삶의 방향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에서도 마찬가지 일이 일어납니다. 아주 잘꾸며진 환경, 주변에 모두가 신앙에 충실한 환경 속에서는 누구나 신앙에 충실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마주하는 상황이지요.

사실 우리 주변에는 신앙인보다 비신앙인이 더 많고 우리는 신앙인의 신원을 그 앞에서 드러내어야 하는 것입니다. 아주 쉬운 예로 식사 전 기도를 얼마나 자신있게 하는가 하는 것부터 생각해 볼 수 있지요. 성당에서 모두가 자연스레 성호를 긋는 분위기에서는 누구나 예외없이 성호를 긋고 밥을 먹는 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일상생활 안에서 자신의 신앙인의 신원을 드러내어야 하는 상황이 되었을 때에 성당에서만큼 자신있게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는 이야말로 진정한 신앙인이 되는 것이지요. 성당에서는 단정하고 열심한 레지오 단원이다가 술집에 가면 코가 삐뚤어지도록 마시는 고주망태가 되는 사람은 하늘 나라에 합당하지 않은 사람입니다.

우리의 신원은 이리저리 뒤바뀔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같은 나무에서 자라나는 가지들입니다. 어느 때에는 이런 열매를, 다른 때에는 다른 열매를 맺을 수는 없습니다. 언제나 같은 신원, 즉 하느님의 자녀로서 살아갈 수 있도록 다짐하고 실천하면서 살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부모는 왕인가 동반자인가?

(Q) 아이들과 지내다 보면 '오직 사랑만으로' 라는 말씀은 잊어버립니다.
사소한 것도 아이들에게서 주도권을 잡으려하고 여러 면에서 화만 내는 모습을 바꾸려 노력해도 하루를 넘기기가 어렵습니다.
이런 저의 모습 때문에 아이들이 신앙에 대해 거부감이 들까 걱정도 됩니다.
신앙 안에서 저는 부모로써 말 안 듣는 아이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주도권을 잡고, 화만 내고, 말을 듣지 않는’이라는 표현 속에서 드러나는 질문자의 원의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지배하고 싶은 마음’이지요. 즉, 내가 바라는 대로 상대를 움직이려는데 그렇게 되지 않아 속이 상한 상태를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 자연 화가 나는 것이지요. 나는 옳고 따라서 상대는 무조건 나의 요구에 따라야 하는데 그렇게 되지 않고 있는 상황인 것입니다.

아이가 처음 태어나면 마냥 이쁘기만 합니다. 왜냐하면 아이에게는 자아가 아직 형성되어 있지 않아서 부모가 하자는 대로 그대로 수용하기 때문입니다. 얼마든지 이뻐 보이는 옷을 입힐 수 있고, 정성껏 준비해 주는 음식을 군말 없이 받아먹으며, 때로는 이런 저런 동물적인 반응으로 우리가 마치 개나 고양이를 키울 때에 그들의 반응을 보고 기뻐하는 것처럼 부모의 마음을 기쁘게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아이는 자라나고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기 시작하게 됩니다. 고유한 기호가 생겨나고 고유한 생각이 생겨나는 것이지요. 그리고 바로 이때부터 부모와의 한 판 대결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조용히 하라고 하는데 조용히 하지 않고, 이것을 입으라 하는데 저것을 입겠다고 떼를 쓰고, 부모로서는 사회적인 위신이 있어서 하면 안되는 짓인데 아이는 해보겠다고 난리를 칩니다. 그리고 적지 않은 부모들이 이 때에 쓰게 되는 방법은 바로 ‘강압’이 되는 것이지요.

가장 빠르고 효과적인 방법으로서 수많은 군주들이 써 왔던 방법입니다. 물리적인 힘을 동원하거나 정신적인 위협을 가함으로써 상대를 제압하는 방법이지요. 그렇게 되면 일어나는 소동이나 폭동을 가장 쉽게 제압할 수 있는 셈입니다. 평화로운 시위가 있는 곳에 물대포가 동원되는 것도 비슷한 이유입니다. 시간이 오래 걸리고 힘든 대화가 싫으니 일단 밀어붙이고 제압하고 찍소리도 못하게 하겠다는 것이지요.

예수님은 왜 세상의 악인들을 쓸어버리고 당신의 백성을 위한 나라를 세우지 않으셨을까요? 예수님은 왜 어리석어보이는 십자가의 길을 선택하셨을까요? 예수님은 왜 당신이 살고 다른 사람들이 죽는 길보다 당신이 죽고 다른 사람들이 사는 길을 선택하셨을까요? 왜냐하면 그것이 진정으로 사는 길이었기 때문입니다.

자녀는 부모의 몸에 속한 한 지체가 아닙니다. 하느님은 그런 의미로 자녀를 선물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동반자’를 선물하셨습니다. 함께 걸어 나갈 사람을 선물하신 것이지요. 자녀는 부모가 그 생명을 좌지우지 해야 할 종속적인 대상이 아니라 하느님을 통해서 부모에게 맡겨진 주체적인 대상입니다. 부모로서는 그 자녀가 성장할 때까지 필요한 것을 제공할 의무가 있고 자녀로서는 그런 부모를 공경할 의무가 있지요. 하지만 이 모든 것은 ‘사랑’ 안에서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고 바로 그 ‘사랑’을 연습하라고 하느님은 이 관계를 선물하신 것입니다.

정복하고 지배하려 하지 말고, 함께 걸어가는 사람이 되어 주십시오. 아이를 고유한 자아가 있는, 고유한 인격이 있는 대상으로 존중할 줄을 알아야 합니다. 물론 이 말이 아이가 원하는 것을 모조리 다 들어주라는 말은 아닙니다. 하지만 아이의 모든 욕구를 부모가 바라는 대로 제압하라는 것도 아닙니다. 언제나 대화 속에서 아이가 진정으로 바라는 것을 살피고, 또한 부모가 생각하는 것이 아이에게 전달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당연히 부모의 많은 인내와 사랑이 필요한 법입니다. 아이가 그 인내와 사랑을 이루기에는 너무나 미숙한 상태에 있으니까요.

자녀를 부모에게 종속적인 대상, 나아가 정복의 대상으로 보지 말고 함께 같은 길을 걸어나가는 대상으로 볼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하느님께서 자녀를 선물하시면서 부모인 우리에게 바라시는 사랑의 길이었습니다.




부부의 성덕

(Q) 지난해 방한하신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남편은 부인을 더욱 여성이 되도록 부인은 남편을 더욱 남성이 되도록 도와주어야한다고 하신 것으로 들었는데 부부 사이에 서로의 성덕을 위해 어떻게 살 수 있을까요?

성덕, 즉 거룩한 덕을 이루는 것은 오직 하나의 방법 밖에는 없습니다. 그것은 하느님에게 다가가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오직 하느님만이 거룩함의 원천이시기 때문이고 다른 그 어디에도 하느님과 같은 거룩함을 얻을 수 있는 대상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방향은 정해졌습니다. 하느님에게 나아가면 됩니다. 하지만 질문 안에서 특별한 대상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부부’라는 주제이지요. 서로 다른 성을 가지고 서로 다른 문화적 배경을 바탕으로 자라온 두 인격이 만나서 하느님을 향해서 어떻게 나아가느냐고 묻습니다.

하느님은 원래 남자와 여자를 만들면서 한 몸이 되기를 바라셨습니다. 그렇다면 한 몸이 되면 됩니다. 그것이 부부 사이에서 하느님께서 바란 성덕이었습니다. 두 영혼이 온전히 한 몸을 이루는 것이지요.

쉬운 표현이지만 어려운 실천이 남아 있습니다. 두 영혼은 어떻게 하나를 이룰 수 있는 것일까요? 답은 의외로 간단합니다. 같은 머리와 같은 심장을 지니고 살아가면 됩니다. 같은 머리의 지시를 받고 같은 피와 신경을 나누어 받으면 되는 것입니다. 머리로서는 하느님을 두어야 할 것이고 그분의 아들이신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을 따르고 또 그분이 보내신 성령을 따라 살면 될 것이고, 같은 피와 신경을 나누기 위해서 서로가 서로에게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숨김 없이 진실하게 모든 것을 나누면 됩니다.

성덕이라는 것을 공중 부양이나 엄청난 양의 기도를 해 내는 것으로 착각해서는 안됩니다. 부부는 이미 그 삶 자체로 성덕을 이루게 되어 있습니다. 일상의 삶을 하느님 안에서 꾸려나가는 것만으로 부부는 이미 거룩하게 되는 것입니다. 다른 특별한 예외적인 행위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남자로서 여자로서 한 몸을 이루기 위해서 최대한 노력하는 것이야말로 하느님께서 부부를 통해서 원하신 최고의 성덕이었습니다.

성덕을 향해 나아간다면서 아내는 교회 활동에 치중하고 그것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남편에게 앙심을 품고, 자신의 성덕에 남편이 따라오지 못한다고 투덜댄다면 그것은 전혀 성덕과는 상관없는 일입니다. 오히려 남편의 필요를 보살피고 아이들을 잘 보살펴 집안에 웃음꽃이 피게 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성덕을 위한 구체적인 실천이 될 것입니다. 남편도 마찬가지로 교회 일을 한다면서 마땅히 가족에게 쏟아야 할 것마저도 교회를 핑계로 소홀히 한다면, 그리고 사목 의원들, 레지오 단원들과 어울려 성당 핑계로 술이 떡이 되도록 마시고 아내 외의 다른 여인들에게 추파를 던지고 있다면 그것은 성덕은 커녕 죄악이 될 것입니다.

성덕은 복잡하고 어려운 게 아닙니다. 모든 것이 제자리에 머무를 때에 참된 성덕이 존재합니다. 하느님은 우리더러 모두에게 사제나 수도자가 되라고 하신 적이 없습니다. 저마다의 탈렌트 안에서 서로에게 유익한 존재가 되라고 하셨습니다. 부부의 최고의 성덕은 한 몸이 되는 것입니다.




사별과 이혼

(Q) 사별이나 이혼 등 어떤 이유로든 혼자 된 분들이 어떻게 그리스도인답게 그 어려움을 잘 극복할 수 있을까요?

먼저 사별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인생에는 어떤 형태든 어려움과 고난이 있습니다. 아이는 아이 시절의 고난이 있고 어른은 어른 시절의 고난이 있지요.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고난이라는 것은 예견된 것이고 우리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부터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십자가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예비된 것이고 마땅히 짊어지고 가야 하는 것이지요.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르 8,34)

왜냐하면 고난이라는 것은 인간의 내면을 성숙시키는 힘이기 때문입니다. 육신을 단련할 때에는 힘에 부친 행동을 해야 합니다. 아무도 종이 한 장을 들고 운동을 하지는 않습니다. 자신의 힘에 적당히 부치는 물건을 들어야 운동이 되는 것이지요. 마찬가지로 영혼도 운동이 필요합니다. 인내롭자고 하지만 인내로울 이유가 없는데 인내가 성장할 이유는 없지요.

두 부부가 함께 생을 마감하면 참 좋을 것 같은데 그렇게 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남은 이가 겪어야 하고 마저 채워야 할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생명은 하느님의 손에 달려 있으며 하느님이 누군가를 먼저 데리고 가시는 것은 분명히 하느님 안에 뜻이 숨겨져 있는 것입니다. 우리로서는 진실하시고 선하시고 성실하신 하느님을 믿기 때문에 그분이 하는 행위를 찬양할 수 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사별을 당한 이는 하느님을 향한 무한한 신뢰 속에서 남은 생을 성실히 살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사별한 이들이 그리스도인답게 그 어려움을 잘 극복하는 법입니다. 만일 그것이 힘들고 어렵다면 말이지요.

그러나 생을 정말 아름답고 충실하게 가꾼 그리스도인이라면 기쁜 마음으로 먼저 한 사람을 보낼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그러지 않았으면 상대 배우자가 남은 고난을 채워야 했을 것이고 그것이 더 마음 아프게 다가왔을지도 모르니까 말이지요. 차라리 본인이 남아서 남은 불편을 감수하는 것이 배우자를 위한 더 나은 모습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참으로 아름다운 사랑의 모습이겠지요.

그러나 사별은 본인이 선택하지 않은 고난입니다. 이제는 이혼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강제로 부부가 되는 경우는 없습니다. 만일 그런 일이 있다면 그것은 가톨릭에서도 혼인 무효화를 할 수 있는 근거가 됩니다. 부부가 부부가 될 수 있는 이유는 서로의 상호 자유로운 동의 하에서 한 몸을 이루기 때문입니다.

이혼이라는 것은 본인들의 선택입니다. 함께 하기로 한 것도 본인들의 선택이고 서로 갈라서는 것도 본인들의 선택입니다. 사람은 본인의 선택에 책임질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에게는 이혼이라는 것은 성립하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 묶은 것을 사람이 갈라놓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이제 둘이 아니라 한 몸이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 (마태 19,6)

사별을 당한 이는 그에 합당한 위로를 얻어야 하고 하느님 안에서 위로를 받아야 하지만 이혼은 본인의 선택이기에 스스로 책임을 질 수 있어야 합니다. 이혼은 그 이후에 그리스도인답게 어려움을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 이혼이 일어나기 전에 그 어려움을 극복할 방법을 강구해야 합니다. 적어도 이혼의 책임이 본인에게 존재해서는 안되는 것이지요. 하지만 양자의 관계에서 어느 한 쪽이 책임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있는 경우는 굉장히 드문 법입니다.

특별히 이혼의 경우에는 자녀들을 가장 우선적으로 고려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혼의 최대의 피해자는 남자도 여자도 아닌 바로 무죄한 자녀들이기 때문입니다. 자녀들이 부모의 갈라섬으로 인해서 아무런 이유 없이 겪어야 할 고통은 그 어떤 수단으로도 보상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죄짓게 하는 것보다, 연자매를 목에 걸고 바다에 내던져지는 편이 낫다.” (루카 17,2)

만일 이혼이 전적으로 상대의 불충실과 기이함에서 비롯한 것이라면 여전히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존엄의 길은 열려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본인의 탓으로 이혼이 이루어지게 되었다면 스스로 선택한 행위에 책임을 질 수 있어야 합니다. 특히나 자녀들이 한창 성장할 나이에 이혼 때문에 극심한 고통을 겪게 된다면 반드시 그에 대한 책임을 질 준비를 해야 할 것입니다.

위로를 주어야 할 대상이 있고 합당한 질책과 꾸중을 해야 할 대상이 있습니다. 사별과 탓이 없는 이혼은 위로의 대상이지만 본인에게 탓이 있는 이혼은 뉘우치고 마음을 돌이켜야 할 꾸중의 대상입니다.

“네 형제가 죄를 짓거든 꾸짖고, 회개하거든 용서하여라.” (루카 17,3)




의견의 불일치

(Q) 어떻게 하면 부부 싸움을 잘 할 수 있나요?

만일 부부 싸움이라는 것이 세상의 싸움과 다를 바 없다면, 즉 서로 이기려고 하고 상대를 적대시하고 무너뜨리려고 하는 것이라면 싸움을 잘 할 방법을 찾는 게 아니라 싸우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은 어느 모로든 정당화 될 수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부부싸움이라는 것이 부부사이의 의견의 불일치를 말하는 것이라면 이는 고려해 볼 가치가 있습니다.

원칙은 간단합니다. 구원에 관계되지 않는 이상, 모든 지체는 머리에 순명하면 됩니다. 남편은 집안의 가장이고 머리의 역할을 맡습니다. 그래서 아내는 설령 남편의 의견이 어리석어 보인다 할지라도 그것이 구원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것이 아닌 이상 그에 순명하고 자녀들도 그에 따르도록 가르치는 것이 좋습니다.

하지만 구원에 관계되는 문제라면, 즉 머리가 요구하는 것이 지체 전체의 생명을 위협하는 것이라면 그에 순명할 이유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무엇보다 우선적으로 하느님에게 속해 있기 때문입니다. 즉 머리가 모두 자살해서 생을 마감하자고 한다면 그런 요구에는 전혀 순명할 이유가 없습니다. 오히려 거기에 저항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런 것이 아닌 소소한 결정에 있어서는 모든 지체는 머리에게 순명해야 합니다.

부부 사이의 관계에서 구원에 정면으로 위배될 만한 것으로 싸우는 경우는 지극히 드뭅니다. 거의 대부분은 소소한 싸움이고 자존심 다툼이고 영향력 다툼에 불과할 것입니다. 그런 싸움에는 잘 하고 못하고가 따로 있지 않습니다. 모든 종류의 세상적 다툼과 불일치는 그 자체로 스스로의 존엄을 저버리는 행위입니다.

하지만 이런 저런 의견의 불일치는 있을 수 있습니다. 그때에는 자신의 뜻을 내려놓고 가장의 뜻에 순명해야 합니다. 아이들은 어른들에게 순명하고 아내는 남편에게 순명해야 합니다. 물론 남편은 아내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의 의견을 경청해야 하겠지요. 그리고 충분히 듣고 숙고한 뒤에 결정을 내려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질서입니다. 그러나 그 명이 구원에 위배되는 것, 즉 진리와 선과 사랑에 위배되는 것이라면 그에 대해서는 순명할 의무가 없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내용은 비단 부부 사이에서만, 가정 안에서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공동체에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것입니다. 모든 공동체의 지체는 구원에 관계되지 않는 이상 장상에게 순명해야 합니다. 그것이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공동체의 질서입니다. 하지만 그가 바라는 것이 구원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것이라면 그에 대해서만큼은 진리이고 선이고 생명이신 하느님에게 순명해야 합니다.




신앙이 없는 이들과 잘 지내기

(Q)주변에 신앙생활 하지 않는 친구들과 어떻게 지내야 할까요?

기본은 분명합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대로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라’는 것이지요. 그리고 우리 안에 빛과 소금을 간직해서 이웃에 빛과 소금이 되어 주어야 합니다.

친구들 가운데에는 아예 신앙이 없는 친구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우정이라는 것은 일종의 하느님의 선물이기도 합니다. 즉 하느님께서 그들의 영혼을 돌보아 달라고 맡기신 이들일 수도 있다는 말이지요. 아직 기회가 없어서 하느님을 알지 못하는 이들이라면 우리는 그들을 성심껏 보살피고 덕스러운 모습을 많이 보여주어 그들이 우리가 지닌 신앙에 관심을 지니고 신앙이라는 선물을 받을 수 있도록 도와 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신앙이 없는 그들의 사고는 우리와 무척 다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언제나 신중을 기할 필요가 있지요. 그들도 거룩한 것에 대한 감이 있고 그것을 존중하지만 우리가 지닌 신앙적 교리를 따를 의무는 없습니다. 따라서 그런 이들과 교제할 때에는 ‘여러분은 믿음이 약한 이를 기꺼이 받아들이십시오.’(로마 14,1) 라는 바오로 사도의 권고를 따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양보하는 과정에서 핵심적인 것까지 양보할 수는 없습니다. 신앙이 없는 친구들이 아예 그릇된 길을 괜찮다고 소개하고 함께 하자고 한다면 우리는 분명히 거절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지 않고 이든 저든 그를 사랑하기 위해서 하는 것이라는 핑계를 대면서 하기 시작한다면 그 책임은 분명히 본인 스스로 져야 할 것입니다. ‘불륜, 더러움, 방탕, 우상숭배, 마술, 적개심, 분쟁, 시기, 격분, 이기심, 분열, 분파, 질투, 만취, 흥청대는 술판, 그 밖에 이와 비슷한 것들’(갈라 5,19-21)을 조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다른 한 편, 신앙을 이미 받아들였으나 어떤 계기로, 혹은 자신의 게으름으로 신앙을 도외시하고 살아가는 이들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이런 이들에게도 우리는 그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지원을 아끼지 말아야 합니다. 언제나 온유한 마음으로 그들에게 다시 권고하고 원래 가던 길로 돌아와 함께 걸어갈 수 있도록 도와 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경우에 최후의 보루는 분명히 존재합니다. 누군가에게 좋은 표양을 보이고 그릇된 행동을 사랑으로 충고하고 물심 양면으로 돕는데도 불구하고 그가 자신의 마음을 바꾸지 않고 악한 행위를 계속해 나갈 것을 고집하고, 선의에 악의로 보답을 한다면 그런 관계는 정돈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들은 우정의 가치를 짓밟는 이들입니다.

“거룩한 것을 개들에게 주지 말고, 너희의 진주를 돼지들 앞에 던지지 마라. 그것들이 발로 그것을 짓밟고 돌아서서 너희를 물어뜯을지도 모른다.” (마태 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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