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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면담


본당의 한 친구가 아침부터 면담을 하자며 저를 찾아 왔습니다. 그리고는 약간 흥분한 얼굴로 저에게 이렇게 말을 합니다.

- 신부님, 본당에 위선자가 한 명 있어요. 제가 그 밑에서 일을 했는데요, 이런 저런 일이 있었어요. 그 사람은 성당에 나와서 보이는 모습과 실제로 살아가는 모습이 너무나 달라요. 그는 위선자에요.

가만히 그 아이를 바라다 보았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문을 열었습니다.

- 맞아. 성당에 그런 사람들 있어. 사실 위선자들이 많아. 어떡할까? 다 내쫓을까?

그러니 그 아이가 저를 가만히 쳐다봅니다.

- 일단은 너 스스로를 잘 살펴봐야 해. 그의 악이 너의 마음에 악의 씨를 뿌리지 않도록 조심해. 지금 너는 나와 함께 있고 물리적으로 아무런 위해도 당하지 않아. 하지만 너는 속으로 흥분해 있고 조금 화가 나 있지. 그 화를 계속 내느냐 아니냐 하는 것은 너에게 달린 문제야. 그리고 너 그 사람 때문에 성당 이제는 안나올거니? 미사 안나올거야?

그러자 그 아이가 고개를 가로젖습니다.

- 그래. 누군가 기분 나쁜 사람이 있다고 해서 우리의 신앙을 저버릴 필요는 없어. 그건 어리석은 행동이고 비신앙적인 행동이야. 우리는 그 사람 때문에 성당을 나오는 게 아니라 하느님 때문에 나오는 거라구. 그리고 이제는 그 사람에 대해서 생각해보자. 네가 알게 된 그 사람의 그런 행동을 바탕으로 그는 주변에 자꾸 어두움을 뿌리겠지. 그러다가 스스로 된통 당하기도 할거야. 그리고는 그에게도 기회가 주어지겠지. 뉘우칠 수 있는 기회 말야. 만일 그가 그 기회를 잡아서 스스로 뉘우친다면 그로서는 다행인 일이 될거야. 자신의 영혼을 구하는 일이니까. 하지만 그렇지 않고 계속 자신의 악행을 계속해 나간다면 그는 참으로 불쌍한 영혼인거지. 그러니 우리로서는 그의 어두움 때문에 우리 안에서 어두움을 끌어낼 게 아니라 오히려 그의 불쌍한 영혼을 위해서 기도를 해야 하는거야.

그 밖에도 이런 저런 조언을 많이 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결국 그 아이는 다시 밝아져서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본당 사제로 일한다는 것, 쉽지 않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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