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 (마태 7,8)
이처럼 확실하고 분명한 표현이 어디 있겠습니까? 청하고 찾고 두드리는 이에게 건네고, 내어주고, 열어 주신답니다. 그러면 남은 일은 우리에게 달린 것이지요.
문제는 어디에 있을까요? 문제는 아주 근본적인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믿지 않습니다. 그리고 눈에 보이는 것들을 더 신뢰하지요. 그것이 우리가 지닌 근본 문제입니다.
우리는 찾는 것도 보이는 것만 찾고, 구하는 대상도 보이는 대상에게만 구합니다. 그리고 보이지 않는 분을 받아들이기 힘들어하고 그분이 주시는 보이지 않는 것도 받기 힘들어하는 것이지요. 그러다보니 점점 더 그것을 찾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잘 생각해봅시다.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말입니다. 누군가 핸드백을 사고 싶어합니다.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지요. 하지만 그 이유가 단순히 핸드백의 필요성, 즉 물건을 담는 가방의 필요성인 경우는 굉장히 드뭅니다. 그보다는 그것을 사서 메고 다니고 스스로 만족스러워하며 다른 이에게 드러나는 모습이 중요한 경우가 더 많습니다. 자신의 만족감과 타인을 향한 과시가 중요한 것이지요.
즉, 우리가 찾는 것은 외적인 것이 아니라 내적인 만족입니다. 그것을 외적인 것으로 대체해서 추구하려는 것이지요. 인간은 행복을 추구합니다. 그리고 그 행복이 외적인 것에 있다고 굳게 믿는 것이지요. 차를 사면 행복하고, 집을 사면 행복할 거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진정한 행복은 나의 내면에 세워진 기준이 채워지는 것입니다. 어린 아이는 작은 막대사탕 하나로 행복해할 수 있지만 어른은 그렇지 못한 이유는 우리의 내면 안에 설정된 기준이 서로 다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진정으로 채워주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하지만 그것을 믿는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우리는 보이는 것에 익숙해져 있고 보이는 것으로 드러나지 않는 것은 확신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청하면 적어도 백만원 정도는 바로 받아야 하고, 찾으면 적어도 실제로 보이는 누군가는 만나야 하며, 두드리면 적어도 원하는 대학은 들어가야 합니다. 그래야 하느님이 도와주시는 것으로 믿는 셈이지요. 만일 하느님이 청하는 이에게 성령을 주고, 찾는 이에게 영적 덕목을 선사하고 두드리는 이에게 천국 문을 열어주면 보이는 것만 보려는 이는 그것을 인정하지 못하는 셈입니다.
아, 가련한 인간 존재여, 과연 누가 우리를 이 눈뜬 장님의 상태에서 구할 것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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