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자유의지가 있고 그 자유의지를 그릇되이 사용해서 죄를 짓습니다. 죄는 허물이고 상처이고 쓰레기입니다. 따라서 벗어나야 하고 치유 받아야 하고 치워져야 합니다. 하지만 이 죄는 언제나 흔적을 남기게 됩니다. 비단 본인 자신에게 뿐만이 아니라 주변에도 흔적을 남기지요. 그래서 우리는 단순히 죄를 고백하는 데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속죄를 구체적으로 실현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베풀 줄 알아야 합니다. 아주 간단한 논리이지요. 우리가 흠집을 내었으니 그 흠집을 메꾸어야 합니다. 물론 우리가 잘못한 것을 고스란히 기워 갚을 수 있으면 좋겠지만 그럴 수 없기에 우리는 ‘자선’이라는 행위로 우리가 남긴 흔적을 대신 기워갚는 것입니다. 하지만 적지 않은 이들이 이런 자선을 자신의 교만의 기회로 삼습니다. 즉, 남들이 하지 못하는 일을 자신이 한다는 것을 뻐기고 자랑하는 것이지요. 이들은 전혀 자선을 한 것이 아니라 장사를 한 것입니다. 자신이 베푸는 척을 해서 사람들의 인기와 명예를 대신 사들인 셈이지요. 이러한 자선은 하느님 앞에 아무런 열매가 없습니다. 참된 자선은 아무도 모르게 실행해야 합니다.
참된 기도라는 행위는 오직 믿음에서만 나올 수 있습니다. 믿지 않는 자는 기도하지 못합니다. 세상을 효율성으로 바라보는 이들에게 ‘기도’라는 행위는 참으로 어리석은 행위가 됩니다. 우리가 따로 시간을 내고 노력해서 바치는 기도라는 행위는 오직 하느님을 향한 참된 믿음에서만 우러나올 수 있는 아주 아름다운 행위입니다. 그러나 위선자들은 이 기도도 이용을 합니다. 즉 자신이 대단히 신심있는 사람임을 드러내려고 보란듯이 기도를 하곤 하지요. 그들은 이미 받을 상을 다 받은 셈입니다. 기도는 보이지 않는 하느님께 정성을 다해서 바치는 것이어야 합니다.
단식이라는 것은 우리의 정당한 욕구마저도 참아 견디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의 욕구는 그것을 충족 시키면 시킬수록 더욱 커지게 됩니다. 그리고 욕구가 커질수록 우리의 통제력에서 점점 벗어나게 되지요. 따라서 영혼이 육신의 주인이라는 것을 보여줄 필요가 있습니다. 그 가장 훌륭한 방법이 단식이지요. 정당하게 누릴 수 있는 것마저도 영혼의 강한 힘으로 제어함으로써 우리를 훈련시키는 것입니다. 하지만 여기에도 교만은 작용할 수 있으니 자신이 하는 단식을 남들에게 드러내어 자신을 위대한 사람으로 보이게 하고 싶은 것입니다.
이로써 우리는 교만이라는 것이 우리를 얼마나 추하게 만드는지 알 수 있습니다. 심지어는 거룩한 수단들마저 모조리 교만으로 더럽힐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교만에서 가식과 위선도 나오게 됩니다. 자신을 원래의 존재보다 더 높이기 위해서는 거짓말이 필수이기 때문입니다.
거룩한 수단은 거룩하게 써야 합니다. 거룩함으로 세상의 찌꺼기를 얻으려다가는 거룩한 것을 더럽히게 됩니다. 자선과 기도와 단식은 교회의 참으로 소중한 보물이지만 정반대로 교만한 자선과 위선적인 기도와 가식적인 단식은 교회에 도리어 해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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