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는 수치스러운 것이고 은밀한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숨어서 죄를 짓습니다.
반면 타인에게 해가 되는 행위를 공공연하게 하는 사람을 범죄자라고 부르고 이는 국법에서도 다스리는 경우가 됩니다.
우리가 일상에서 접하는 죄의 주제는 지극히 개인적인 죄와 범죄 행위 사이에 놓인 것들이 대부분입니다. 무슨 행위를 하는데 이것이 성가시기는 하나 딱히 국가법에 크게 저촉되지는 않는 애매한 상태의 그릇된 행위들이 있지요.
예를 들어 봅시다.
누군가를 미워하는 것은 은밀하고 내면적이고 개인적인 죄입니다. 그 행위가 표현되지 않는 이상은 자신 안에만 존재하는 것이지요.
반면 타인을 미워해서 구타를 하거나 살인을 저지르는 것은 범죄입니다. 이는 국가법에서 다스리는 것이지요.
우리가 일상적으로 마주하게 되고 문제가 되는 것은 누군가를 미워해서 그에게 상처주는 말을 한다던가, 그를 다른 동료 집단 안에서 험담을 한다던가 하는 식의 행동입니다. 그런 행동을 주변에서 관찰하게 되면 이는 그가 홀로 은밀히 저지르는 개인의 잘못도 아니고 그를 제지할 수 있는 국가법에 저촉되는 행위도 아니어서 어떻게 해야 할지 참으로 곤란해지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참아 견디고 넘어가고, 또 다른 사람들은 그들에 맞서 따지고 들기도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주님은 바로 이러한 상황 안에서 ‘용서하라’, ‘사랑하라’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부분에서 잘못 생각하는 것이 있습니다. 용서하고 사랑하는 것이 그 행위를 묵인하고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간주하라는 소극적인 의미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참된 사랑은 그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다가가서 그의 오류를 지적해 줍니다. 세상 그 어느 누구도 자신의 은밀하고 수치스러운 곳을 지적당하고 기분이 좋을 사람은 없습니다. 그래서 진정으로 사랑하는 이는 자신이 충고해주는 이에게서 그닥 좋은 반응이 나오지 않을 것을 미리 알아둘 필요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가서 충고해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정한 사랑의 모습입니다.
그 순간을 견디고 넘어가는 것은 실질적으로 해결하는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물론 상황에 따라서 그런 반응이 필요할 때도 있습니다. 그가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거나 충고를 몇 번이나 들어도 전혀 변화의 여지가 없을 때에는 기다려주는 지혜도 필요합니다. 하지만 참된 형제애는 잘못하고 있는 형제를 향해서 충고해 주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참으로 쉽지 않은 문제입니다. 누군가 거슬리는 행동을 하는데 그것을 이야기해 주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는 참으로 쉽지 않은 주제입니다. 아주 간단한 원칙이 있으니 다음과 같습니다. ‘내가 성가셔서’ 하는 충고는 조심하는 게 좋습니다. 그것은 내가 기분이 나빠서 그를 뜯어 고치려는 것이지 정말 그를 생각하고 그가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내가 성가실 때에는 일단 나의 마음을 가라앉히는 시간을 갖는 것이 좋습니다. 그리고 때가 이르러 내가 잠잠해지고 진정 상대를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어야 하겠다는 의지가 서고 나면 용기를 내어서 다가서야 합니다. 그런 준비가 되면 더는 기다려서는 안됩니다. 그때에는 적극적으로 다가서서 상대에게 조언을 하고 올바른 길로 이끌어야 합니다.
이를 계속하다보면 시간이 갈수록 내가 성가신 경우가 점점 사라지게 됩니다. 그리고 상대를 위해서 최선을 다하게 됩니다. 하느님은 이런 일을 하는 이에게 성령을 부어주시고 성령께서는 지혜의 영이십니다. 지혜를 지닌 사람은 더는 자신을 고려하지 않고 오직 상대를 고려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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