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호등을 없앤다고 준법 정신이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법을 지키는 사람은 신호등이 불편하지 않습니다. 법을 지키지 않으려는 사람에게 신호등이 불편하지요. 신호등은 약자를 보호하기 위한 수단이고 어긋난 행위를 막는 수단에 불과합니다.
평균적인 키가 존재하는 상황에서 키가 크거나 키가 작은 사람은 자신의 불편을 감수할 수 밖에 없습니다. 자신이 혼자 사는 집이라면 문턱을 높이거나 줄일 수 있겠지만 공공시설에서는 같은 규격화된 문을 써야 합니다. 키가 큰 사람은 고개를 숙여야 할 것이고 키가 작은 사람은 위에 있는 손잡이를 잡기 위해서 발받침을 써야 합니다.
키가 큰 사람이 어느날 권력을 잡고 모든 공공기관의 문을 한 뼘씩 더 높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만만찮은 희생이 될 것입니다. 키가 작은 사람이 어느날 권력을 잡고 모든 손잡이를 한 뼘씩 낮춰 달라고 한다면 그 또한 이상한 모양새가 될 것입니다.
보편적인 것은 보편적인 것으로 두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밖의 것들을 배려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키가 큰 사람을 위해서 부딪히지 않도록 경고판을 달아주는 배려, 키가 작은 사람을 위해서 받침을 미리 마련해두는 배려는 좋은 것이지요. 하지만 그 배려를 원칙으로 만들려고 한다면 그것은 이상하게 되는 것입니다.
다 큰 이들이 자신들의 삶을 원하는 대로 이끌어 가는 것은 그들의 선택에 맡겨야 합니다. 우리는 조언해 줄 수는 있지만 타인을 위한 범죄가 아닌 이상 그들을 위해서 법칙을 만들어 제약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미성숙한 이들이 그런 행동에 영향을 받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한 모습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어긋난 행위에 영향을 받아서 자신의 중요한 삶의 방향을 바꿀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미성년자들은 보호를 받을 필요가 있습니다. 자유와 방종은 분명하게 구별되어야 하는 것이지요. 미성숙한 이들이 방종한 행위에 영향을 받는 것은 조심해야 합니다.
지금 세상은 모든 것을 ‘자유’라고 부르짓고 있습니다.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선사한 고유한 자유가 있는가 하면 하느님의 뜻에서 벗어나는 방종도 있습니다. 하지만 세상은 자신이 원하는 걸 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방향을 잘 잡아야 합니다. 신앙과 세속적인 것들을 동시에 쥐고 있을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둘이 서로 충돌하기 때문이지요. 십자가와 탐욕스런 부귀 영화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두 가지 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적지 않은 신앙인들은 그 둘이 상존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안타까운 일이지요.
우리는 하느님에게서 났고 하느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세상은 저마다의 욕구로 움직일 뿐입니다. 우리는 그 안에서 길을 잃어서는 안됩니다. 신호등은 우리를 성가시게 하려고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올바른 신호를 주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라는 신호등을 따라서 올바른 길을 걸을 수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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