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 콘텐츠로 건너뛰기

파라과이 본당 특강 정리



요한 복음 1장

1 한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 말씀은 하느님이셨다. 2 그분께서는 한처음에 하느님과 함께 계셨다. 3 모든 것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고 그분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 4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 5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지만 어둠은 그를 깨닫지 못하였다. 6 하느님께서 보내신 사람이 있었는데 그의 이름은 요한이었다. 7 그는 증언하러 왔다. 빛을 증언하여 자기를 통해 모든 사람이 믿게 하려는 것이었다. 8 그 사람은 빛이 아니었다. 빛을 증언하러 왔을 따름이다. 9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빛이 세상에 왔다. 10 그분께서 세상에 계셨고 세상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지만 세상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11 그분께서 당신 땅에 오셨지만 그분의 백성은 그분을 맞아들이지 않았다. 12 그분께서는 당신을 받아들이는 이들, 당신의 이름을 믿는 모든 이에게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권한을 주셨다. 13 이들은 혈통이나 육욕이나 남자의 욕망에서 난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난 사람들이다. 14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 은총과 진리가 충만하신 아버지의 외아드님으로서 지니신 영광을 보았다. 15 요한은 그분을 증언하여 외쳤다. “그분은 내가 이렇게 말한 분이시다. ‘내 뒤에 오시는 분은 내가 나기 전부터 계셨기에 나보다 앞서신 분이시다.’” 16 그분의 충만함에서 우리 모두 은총에 은총을 받았다. 17 율법은 모세를 통하여 주어졌지만 은총과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왔다. 18 아무도 하느님을 본 적이 없다. 아버지와 가장 가까우신 외아드님 하느님이신 그분께서 알려 주셨다.

성당을 나오는 이유

성당을 왜 나올까요? 이 간단한 질문부터 시작해 보았으면 합니다. 우리는 성당을 왜 나올까요? 사실 성당을 나오는 이유는 생각만큼 단순하지 않습니다. 저마다 다른 목적을 지니고 있지요. 제가 한국에서 보좌 생활을 할 때에 본당에 나오던 청년들은 자기 짝을 찾아서 성당을 나오곤 했었습니다. 어린 아이들은 엄마 아빠가 억지로 보내니까 울며 겨자 먹기로 오는 것이었구요. 어른들 중에는 자신의 집이 식당을 하는데 성당 손님을 좀 끌어볼 목적으로 성당에 나와서 활동하는 분도 계셨습니다. 그리고 어르신들은 인생의 마지막을 무료하게 보내는 것보다 소일거리 하나라도 있는 게 좋을 것 같고 행여 죽을 때에 하느님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라도 성당에 나오곤 했었지요. 참으로 다양한 이유들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는 생각만큼 순진하지 않고 저마다 원하는 것을 하고 있는 셈입니다. 그렇다면 이제는 질문이 두 가지로 갈라지게 됩니다.

우리가 성당에서 원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리고 성당을 나오는 원래 목적은 무엇인가요?



우리가 원하는 것

우리가 원하는 것부터 시작해봅시다. 우리는 참으로 다양한 원의를 가지고 있지요. 배가 고프면 밥도 먹어야 하고, 호기심에 신문 기사를 읽기도 해야 하고, 쉬기도 잘 쉬어야 하고, 또 무료할까봐 취미 생활도 해야 합니다. 우리는 참으로 다양한 ‘욕구’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원하는 것이 많지요. 헌데 이런 욕구들은 일종의 계층으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습니다.

육신의 욕구

먼저는 몸입니다. 이 육신은 본능적으로 원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모든 포유류들이 원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식욕, 성욕, 배설욕 등등 육신에 관계된 모든 욕구들이 존재합니다. 우리의 몸은 때가 되면 필요한 것이 있다고 신호를 보내고 우리는 자연스레 그것을 채울 방법을 찾습니다. 이는 아주 어린 시절부터 훈련되어 온 것이지요. 어린 아이는 배가 고프면 울고, 기저귀가 축축하면 울고, 잠이 오면 울고 하면서 자신의 욕구를 표현합니다. 지금의 어른들은 다만 우는 것 대신에 원하는 것을 직접 찾는 활동을 하거나 참거나 하는 것이지요.

정신의 욕구

우리의 정신도 원하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저런 감정과 이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래서 감정적으로도 바라는 것이 있고, 이성적으로도 바라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슬플 때에 위로 받고 싶어하고, 함께 기뻐하고 싶어하며, 이런 저런 감정들에 상응하는 대우를 받고 싶어합니다. 그래서 친구를 사귀게 되는 거지요. 또한 우리의 이성은 이런 저런 것들을 습득하고자 합니다. 언뜻 배움이라는 것은 막연히 힘든 것 같지만 우리는 단순히 학교에서만 배우는 것이 아니라 일상 안에서 수많은 정보를 듣고 나누고자 합니다. 어른들이 신문을 읽는 것이 바로 그런 이유에서 그렇고 자매님들이 서로 모여서 수다를 떠는 것도 일종의 정보를 나누는 행위입니다. 이렇듯 인간은 사회적 문화적 유대 속에서 이 정신적 욕구를 채우게 됩니다.

영의 욕구

아직 하나가 더 남았습니다. 인간은 단순히 정신과 육신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그 안 가장 깊은 곳에 숨겨진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영혼’입니다. 동물들도 감정이 있고 동물들도 배울 수 있습니다. 물론 인간만큼은 아니지만 나름의 영역 안에서 배우고 익히고 감정을 나눕니다. 하지만 이 인간의 ‘영’ 만큼은 인간에게 고유한 것이지요. 인간의 영은 하느님이 부어주신 것이고 하느님을 닮아 있습니다. 성경 안의 ‘하느님의 모상’이라는 것은 바로 하느님을 닮은 부분이 있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지요. 그리고 이 영도 욕구가 존재합니다.



자유의지

하느님을 닮은 바로 이 영역은 바로 인간의 ‘자유의지’입니다. 우리는 선택을 할 수 있습니다. 자연 상태의 동물들은 본성에 따라 움직입니다. 하지만 인간은 선택을 합니다. 그래서 인간에게만 ‘사랑’이 존재할 수 있고 인간에게만 ‘죄’가 존재할 수 있는 것입니다. 동물들은 진정한 의미의 ‘사랑’을 하거나 ‘죄’를 짓지 못합니다. 온전한 자유의지가 없기 때문이지요. 오직 인간만이 사랑을 하고 죄를 지을 수 있습니다. 이 자유의지를 가진 인간이 영의 차원에서 원하는 것은 바로 ‘사랑받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욕구에 늘 굶주려 있는 셈이지요. 그리고 의식하지 못한 채로 이 욕구를 채우고자 다른 욕구들을 한껏 활용하는 것입니다. 구체적인 예를 들어 설명하겠습니다.

엉뚱한 욕구 충족의 예

한 자매가 명품 핸드백을 삽니다. 이 자매가 명품을 사는 이유는 바로 다른 이들의 눈을 의식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자신이 지닌 물건을 담을 핸드백을 고르겠지요. 물론 적지 않은 이들이 명품이 튼튼해서 선호한다고 하긴 합니다. 하지만 어디까지가 진실일지는 본인 스스로 알고 있을 것입니다. 이 자매는 그 명품 핸드백을 통해서 다른 이들의 ‘관심’을 끌고 싶은 것이지요. 그리고 그런 관심을 통해서 자신이 사랑받는다고 느끼는 것입니다. 결국 이 자매가 마음 깊이 원하는 것은 다른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것인데 그것을 명품백으로 대체해서 이루려고 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잠시나마 그 자매의 목적은 달성되는 듯이 보입니다. 하지만 머지 않아 그 바람은 처참하게 무너지고 맙니다. 왜냐하면 더 새로운 신상이 나오고 나면 명품백을 향해 모여든 관심은 이미 다른 곳으로 옮겨가 버리고 말 것이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이 자매는 선택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 관심을 얻으려는 활동을 그만두던지 아니면 더 새로운 신상을 구해서 관심을 얻던지 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대부분 후자를 선택하게 됩니다. 한번 자신에게 쏟아진 그 관심의 맛을 잊지 못하는 것이지요.

피상적인 것들을 추구하다가 잃게 되는 가장 중요한 욕구

이처럼 우리는 가장 깊이 잠재되어 있는 욕구를 채우기 위해서 피상적인 욕구들을 이용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두가지를 혼동하는 것이지요. 정말 배가 고파서 음식을 먹으려는 게 아니라 음식을 먹고 싶어하게 스스로를 자극해서 음식을 먹게 됩니다. 그러니 살이 찌게 되고, 그렇게 찐 살을 빼야 한다고 스스로를 강압합니다. 그러니 언제나 정신이 다른 곳에 몰두되어 있는 것이지요. 맛있는 것을 찾고, 살을 빼려고 노력하고, 또 세상의 온갖 정보들을 모조리 담으려고 애를 쓰고 그 와중에 재미난 텔레비전 드라마는 빠짐없이 보고… 그런 복잡 다단함 속에서 정작 가장 중요한 것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지요.

우리가 진정 원하는 것

여러분은 무엇을 원하고 계십니까? 당장 마음 속에 이런 저런 욕구들이 떠오를 것입니다. 그러면 그 다음 단계의 질문을 해야 합니다. 지금 원하는 것, 바로 그것을 원하는 것입니까? 아니면 그것을 통해서 얻어지는 것을 원하는 것입니까? 그렇게 찾아 들어가다보면 정작 내가 가장 원하는 것은 그리 복잡 다단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잠시 한 숨을 돌리고 물 한 잔을 마시는 것이 오히려 내가 가장 원하는 것에 더 도움이 될지도 모르는 일이지요. 헌데 우리는 멍한 정신으로 내가 원하는 모든 피상적인 것들을 쫓아서 돌아다니다보니 갈수록 더욱 멍해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영적인 상태를 두고 ‘장님’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장님의 상태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이런 장님의 상태에서 살아갑니다. 내면의 것들을 똑똑히 바라보지 못하지요. 그들의 육체적인 두 눈은 올바로 작동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내면의 눈은 완전히 감겨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래서 외적인 것을 추구하기 위해서 내적인 가치를 사정없이 버리는 경우도 많습니다. 돈 몇 푼 더 벌려고 정직과 성실함을 내던지는 이들이 적지 않지요.

사랑받기

우리가 원하는 것을 간단히 요약해 드리면 ‘사랑받고자 함’입니다. 우리는 사랑받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그 해답을 간단히 말씀드리면, 오직 하느님만이 이 사랑의 욕구를 온전히 채워주실 수 있습니다. 하느님 아닌 다른 그 무엇도 이 욕구를 채우지 못합니다. 채우는 시늉을 할 뿐이지요. 혹시 하느님 아닌 다른 무엇이 우리의 사랑의 욕구를 채우는 것이 가능하다면 그 또한 하느님과 친밀한 관계에 놓여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이제 이 문제는 이쯤에서 접어두고 두 번째 질문으로 들어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성당을 나오는 원래 목적은 무엇일까요?

교회의 존재 이유

이 문제는 달리 말하면 성당, 즉 교회 공동체의 존재 목적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왜 존재할까요? 지금 우리가 몸담고 있는 이 가톨릭 교회는 왜 생겨난 것일까요? 이를 올바로 알지 못하면 우리는 엉뚱한 행동에 몸을 담게 됩니다. 우리는 NGO단체도 아니고, 교육기관도 아니며, 병원시설도 아닙니다. 우리는 ‘교회’입니다. 이 교회는 도대체 무엇하는 곳일까요?

두 가지 계명

이 역시 간단합니다. 교회는 먼저 하느님을 사랑하고 다음으로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곳입니다. 이 간단한 것이 왜이리 힘들어 보이는 것일까요?

하느님과 예수님

먼저는 ‘하느님 사랑’의 어려움입니다. 하느님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무엇보다도 인정하고 받아들이기가 힘이 듭니다. 보이지 않는 존재를 사랑한다는 것은 인간에게는 거의 불가능한 일에 가깝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방안을 마련하셨습니다. 우리에게 당신을 ‘보이는 존재’로 제시하신 것이지요. 그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님이셨습니다.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보이는 존재로 드러내시고 우리에게 직접 가르침을 전하시고 당신의 삶으로 그것을 드러내어 보이셨습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예수님을 진지하게 배우고 그분의 가르침을 실천하려고 하면 아버지를 알게 됩니다.

예수님과 교회

그렇다면 ‘하느님 사랑’의 어려움은 해소되는 듯이 보입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이 하느님의 아들은 수난 당하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해 버리고 맙니다. 결국 지금의 우리에게는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 존재가 되는 것이지요. 그러나 예수님도 이를 해결할 방안을 마련하셨습니다. 그것은 당신의 교회를 만드시고 성령을 부어주셔서 당신의 사명을 계속하게 하는 것이었지요. 사람들은 이제 ‘교회’를 보면서 예수님을 알게 되고, 바로 그 예수님을 통해서 하느님을 알고 사랑하게 되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대충 정돈이 됩니다. 교회는 예수님의 말씀과 삶을 거듭하여 되새기고 그것을 주변에 전하는 곳입니다. 즉, 아직 하느님을 알지 못하는 이들에게 하느님의 모습을 전하고, 이미 하느님을 아는 이들이 용기를 잃지 않고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가도록 도와주는 것입니다.

교회와 우리

그럼 거의 마지막 단계에 온 것 같습니다. 우리는 교회를 보면서 하느님을 사랑하면 됩니다. 하지만 여기에서 또 문제가 일어납니다. 교회가 하느님을 제대로 보여주지 못하는 경우가 생기는 것이지요. 왜 그럴까요? 그 질문의 답은 바로 우리 자신에게서 찾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바로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왜 하느님에게 충실하지 못한 것일까요? 왜 우리는 우리 주변에 하느님의 모습을 드러내지 못하는 것일까요?

이웃 사랑

여기에서 두 번째 사랑의 주제를 살펴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성당에 나옵니다. 미사에 참례하고 재계를 지키고 성체를 모시고 판공을 빠지지 않고 보지요. 헌데 이러한 신앙생활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이 빠져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이웃사랑’입니다.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구체적인 활동이 빠진 채로 ‘형식적’이고 굳어져버린 신앙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하다못해 우리는 우리 집안 식구들도 하나 제대로 사랑하지 못합니다. 남편은 아내를 사랑하지 못하고 아내는 남편을 사랑하지 못하고, 자녀들은 부모를 사랑하지 않고 부모는 자녀들을 사랑하지 않지요. 그런데도 미사는 얼마든지 나올 수 있고 판공도 지킬 수 있고 교회가 규정하는 의무를 지킬 수는 있습니다.

바로 여기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올바로 배우지 않고, 그분이 보내신 예수님이 어떤 분이시고 무엇을 가르쳤는지 모르며, 그분이 보내시는 성령을 받아들이지 않기에 결국 하느님에게 올바른 예배를 드리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지 않고 껍데기만의 종교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지요. 구체적인 실천이 배제된 신앙은 겉면이 보기 좋은 과일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속이 썩어 있어서 먹으래야 먹을 것이 없는 과일과 같지요.

우리의 신앙은 근본적으로 하느님의 사랑에서 솟아나오는 것을 받아들여야 하고, 그것을 구체적인 이웃사랑의 형태로 실천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려고 의지적인 결심을 굳혀야 하고, 또 이웃을 진심으로 사랑할 결심을 세우고 그것을 실천하여 그 사랑을 내 것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결론: 성당은 모든 것에 앞서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법을 배우고 실천하기 위해서 나오는 곳입니다. 그리고 그 배움과 실천은 아름다운 환상을 통해서가 아니라 여러가시 구체적인 시련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댓글

이 블로그의 인기 게시물

성체를 모시는 방법

- 성체를 손으로 모시는 게 신성모독이라는데 사실인가요? 이게 무슨 소린가 싶었습니다. 일단 설명을 시작했습니다. - 교회는 전통적으로 성체를 입으로 직접 받아 모셔왔습니다. 하지만 생각해 보십시오. 주님의 수난 만찬때에 제자들과 모여 함께 나눈 빵을 제자들이 무릎을 꿇고 입만 벌리고 받아 모셨을까요? 아닙니다. 그들은 손으로 빵을 받아서 나누어 옆의 동료들에게 나누어가며 먹었습니다. 하지만 성체에 대한 공경이 날이 갈수록 더해 감에 따라 부스러기 하나라도 흘리지 않으려는 극진한 공경심을 드러내기 위해서 제단 앞으로 나와 무릎을 꿇고 입을 벌리고 받아모시게 한 것이지요. 그러다가 신자들의 수가 너무 많아지고 또 입으로 모시다가 자꾸 사제의 손에 침이 발리니 위생상의 문제도 있고 해서 손으로 받아 모시게 한 것입니다. 사실 한국과 같은 곳은 입으로 받아 모시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거의 전부가 손으로 받아 모십니다. - 그럼 그런 표현을 하는 사람은 왜 그러는 건가요? - 제가 보았을 때에는 성체에 대한 극진한 존경심을 드러내기 위해서 그런 말을 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성체를 공경하고 존경하는 마음을 드러내는 것은 좋지만 손으로 모시는 사람을 잘못되었다고 할 필요는 없지요. 여기서는(볼리비아에서는) 입으로 모시는 사람과 손으로 모시는 사람의 두 부류가 있고 둘 다 존중받아야 합니다. 하지만 입으로 모시는 이들의 혀가 제 손에 자꾸만 닿는 것은 분명히 사실이고 이는 굉장히 비위생적인 것은 사실입니다. 그리고 입으로 모시는 것이 성체를 흘리고 떨어뜨릴 가능성이 더 높습니다. 그래서 손으로 모시는 것이 보다 안정적이지요. 다만 손으로 모실 때에는 미사 전에 손을 깨끗이 씻고 왼손 아래에 오른손을 받치는 올바른 자세를 갖추고 왼손으로 성체를 받아 뒤의 사람이 앞으로 나와 성체를 모실 수 있도록 옆으로 살짝 비켜나서 성체를 모셔야 합니다. 성체를 모시고 나서 손에 남은 부스러기를 함부로 다루지 말고 입으로 가져가서 혓바닥으로 깨끗이 처리할 필요가 있지요...

신부님이랑 목사님은 뭐가 달라요?

통상적으로 가톨릭의 성직자(거룩한 직분을 받은 자)를 신부님이라고 부르고 개신교의 목회자(회중을 사목하는 자)를 목사님이라고 부릅니다. 당연히 이를 올바로 구별하기 위해서는 가톨릭(또는 천주교)과 개신교의 차이를 알아야 하겠지요? 기독교라는 말은 ‘그리스도교’의 한자 음역을 한 단어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통상적으로 가톨릭과 개신교를 모두 포함하는 말입니다. 정확하게 표현하기 위해서는 천주교(가톨릭: 보편적)과 개신교(프로테스탄트: 저항)로 표기하는 것이 맞습니다. 먼저는 예수님입니다. 2000여년 전 인류사에서 한 인물이 등장을 했고 엄청난 이슈를 남기게 되었지요. 그리고 그를 추종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생겨나게 됩니다. 소위 ‘믿는 이들의 공동체’인 교회가 생겨나게 된 것이지요. 그리고 이 교회는 역사를 통해서 그 덩치를 키우게 됩니다. 그리고 덩치가 커지니 만큼 순수했던 처음의 열정이 사라져가고 온갖 사람들이 그 안에 들어서게 되지요. 그리고 엉뚱한 움직임들이 많이 등장하게 됩니다. 즉 교회의 본질에서 벗어나는 많은 모습들이 보이게 되었지요. 돈에 대한 탐욕, 권력에 대한 집착과 같은 움직임들입니다. 그리고 자연스레 그에 반발하는 움직임이 등장하게 되지요. 그것이 바로 개신교의 시초인 셈입니다. 루터라는 인물이 95개조의 반박문을 쓰고 했다는 역사적인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그로부터 개신교 형제들이 자기들의 신조를 들고 갈려 나오기 시작 했습니다. 그들은 오직 믿음, 오직 성경, 오직 은총과 같은 구호를 외치면서 가톨릭에서 갈려 나와 자신들이 진정한 초대교회의 정통성을 이어 받았다고 주장하기 시작했지요. 그리고 가톨릭은 여전히 가톨릭대로 자신들이 정통성을 이어가고 있다고 하고 있는 상황이 펼쳐지게 됩니다. 우리의 몸이 때로는 아플 수 있습니다. 하지만 몸이 아프다고 해서 성한 팔을 따로 잘라내지는 않는 것처럼 공동체도 마찬가지여야 합니다. 공동체가 아프면 모두 힘을 모아서 그 아픈 부위...

미사 봉헌

미사를 봉헌한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간단하게 우리가 알고 있는 바를 말하자면 사무실에 가서 해당하는 비용을 내고 기도하고 싶은 사람의 이름을 올리는 행위를 ‘미사 봉헌’이라고 말합니다. 헌데 우리는 그 뒤에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알고 있을까요? 미사를 봉헌하면 어떤 효과가 나타나는 것일까요? 무엇보다도 연옥 영혼들을 위한 효과가 일어납니다. 우리가 망자를 기억하면서 그를 위해서 드리는 미사는 그 영혼에게 효과가 미칩니다. 물론 무슨 효과가 얼마나 미칠지 우리는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지만 우리의 공로가 아니라 예수님의 수난의 공로로 인해서 그 영혼은 자비를 입게 되고 자신이 채워야 할 수난의 시간을 메꿀 수 있습니다. 이는 수많은 성인들의 실제적인 증언으로 우리가 알게 된 것입니다. 또한 살아있는 이들을 위해서 드리는 미사도 그 효과를 발휘합니다. 하지만 이 때에는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이루어집니다. 우리의 정성은 받아들여지지만 그 은총의 효과는 하느님이 원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집니다. 병자가 건강하기를 바랄 수 있지만 그의 건강의 회복은 오직 하느님의 뜻에 달려 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은 그가 건강을 회복하고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까지 아는 분이십니다. 하지만 이러한 효과들이 단순히 ‘기계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미사를 드리는 우리의 정성이 중요한 것이지요. 돈을 지불하는 것이 우리의 정성의 일부분이 되는 이유는 우리가 지닌 돈은 결국 우리의 정성을 모아서 벌어들인 돈이기 때문에 우리는 예물을 통해서 우리의 삶을 봉헌하는 행위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미사에 참례하는 것이 더욱 소중한 정성입니다. 미사에 참례해서 진심으로 그 미사의 말씀을 듣고 성찬의 전례에 온전히 참례하게 된다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미사의 은총을 더욱 배가 될 것이 틀림 없습니다. 나아가 우리가 그런 미사 참례를 통해서 드리는 봉헌의 행위로 우리의 삶 자체는 변화될 것이고 무엇보다도 그 모든 은총의 결과물은 바로 우리의 몫이 될 것입니다. 저는 진실한 마음으로 미사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