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네가 마지막 한 닢까지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에서 나오지 못할 것이다. (마태 5,26)
가톨릭에는 연옥이라는 교리가 있습니다. 죽을 죄를 짓지 않은 영혼들이 가서 ‘정화’를 거치는 곳이라고 알려져 있지요. 그곳이 구체적인 장소인지 아닌지는 잘 알 수 없습니다. 일단 우리는 육신을 벗어나기 때문에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곳의 어디가 아니라는 것 정도만 알 뿐이지요.
하지만 ‘정화’라는 것에 집중해 보아야 합니다. 뜨거운 불길 속에서 불에 타버리는 것들은 남아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이라는 뜨거운 불길은 거룩한 영혼들에게는 기쁨이지만 그렇지 못하고 지상의 것에 애착을 지니고 있는 이들에게는 가혹한 불길로 느껴지게 됩니다. 이는 하느님이 나쁜 의도를 가지고 계셔서가 아니라 우리가 그 은총을 견디지 못하는 것입니다.
어느 아이가 잘못을 하면 그때부터 엄마의 시선을 피하게 됩니다. 이는 엄마가 변해서가 아니라 아이의 내면이 변해서 그런 것이지요. 연옥이라는 곳은 지상의 모든 애착들이 정화되고 떨어져 나가는 곳입니다.
우리가 지상의 생명을 누릴 때에 우리가 정상적으로 누리는 것들은 우리 안에 그 어떤 잔재도 남겨놓지 않습니다. 즉, 배가 고플 때 밥을 먹고 나면 배가 부르게 되고 그 뒤로는 밥 생각을 따로 하지 않게 됩니다. 하지만 우리가 계속 맛집 프로그램을 방송으로 보고, 맛있는 요리 사진을 보고, 그 레시피를 검색하면서 우리는 더이상 배고픔 때문에 밥을 먹는 것이 아니라 미각을 충족시키기 위한 욕구 때문에 밥을 먹게 됩니다. 이는 더는 자연스러운 욕구가 아니라 맛에 대한 집착이 되고 마는 것이지요.
우리가 육신을 벗어나면 육적인 식사에서 자유로워지게 됩니다. 더는 생명을 유지시켜야 할 존재가 없기 때문에 그 욕구와 그와 관련된 행동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이지요. 하지만 육신을 향한 집착으로 인해서 우리 영혼에 남은 자국은 그대로 남아있게 됩니다. 우리는 그 자국을 정화하지 않으면 하느님 앞에 스스로 설 수 없게 되는 것이지요.
특히나 ‘증오’라는 것은 하느님과 전혀 부합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증오는 반드시 정화되어야 할 대상이 됩니다. 우리가 내면에 지닌 누군가를 향한 증오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우리는 결코 하느님 앞에 설 수 없고, 달리 말해서 우리가 스스로를 묶어 놓은 감옥에서 결코 나올 수가 없게 됩니다.
용서해야 하는 것은 상대를 위해서이기보다 바로 우리 자신을 위해서입니다. 영원의 차원에서 벌어지는 현실을 이해하는 사람은 우리 스스로를 위해서 누군가를 용서할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내면에 증오의 티끌조차 남겨두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들어간 감옥에서 결코 나오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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