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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교리교사의 글




제 이름은 OOO 이고 저는 23살입니다. 첫영성체에 3년 동안 교리교사로 봉사하고 있고, 청년 그룹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이 본당에서 견진을 받고 난 뒤부터 본당 가족이 되고 싶다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먼저 어떤 그룹에 속하고 싶었습니다. 왜냐면 이미 많은 이들이 이 본당에 속해 있는 걸 볼 수 있었으니까요.

제 교리교사는 OOO 아주머니이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늘 저에게 조언해 주시고 제 결정에 도움을 주셨지요. 저의 부모님은 아직도 그 교사분을 알지 못하고 계셨고 저 역시도 허락을 청하거나 아무에게도 말하지도 않았습니다. 처음에는 마음이 공허했습니다. 우리 집에는 늘 문제가 있었고 아직도 있습니다.

저는 곧잘 세상 것들에 마음을 빼앗기곤 했지요. 직장과 나의 공부, 부모님의 다툼, 그리고 그 밖의 것들에 마음을 빼앗겼습니다. 성당의 한 일원이 되고나서부터 사람들이 아무런 보상이나 상급을 바라지 않은 채로 다른 이들을 위해서 봉사하고 행복해하는 것을 보게 되면서 제 안에서 변화가 일어나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변화는 저에게 힘을 실어주어 교리교육 안에서 아이들을 도와줄 수 있었지요. 왜냐하면 그들 안에서 제가 첫영성체를 받을 때의 모습을 볼 수 있었거든요.

그 아이들과 함께 하면서 그들에게 지식보다 애정을 나누어 주면서 하느님에 대해서 더 많이 배울 수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많은 아이들이 내가 그랬던 것처럼 따스한 사랑과 애정과 우정을 찾아 온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느님의 은총으로 제가 작은 어둠의 구석에 한 줄기의 빛이되고 있다는 것을 느낍니다.

어떻게 그렇게 되느냐구요? 아직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아마도 하느님께서 제 삶에 지니고 계신 계획이 무엇인지 이해하는 것을 좋아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나의 빛이 무엇을 위한 것인가? 사람들이 예수님의 친구가 되어 하느님과 자신의 구원에 다가갈 수 있도록 돕는 데에 쓰이지요. 우리는 홀로 따로 떨어진 이들이 아니며 하느님은 늘 우리를 보호하시고 우리를 보살피십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그토록 사랑하셔서 당신의 외아들을 내어주시어 우리와 우리의 죄악을 용서하기 위해서 희생하도록 하셨지요. 그분은 우리가 깨끗한 영혼을 가진 흠이 없는 선의 사람이 되기를 바라십니다.

하지만 아직 저는 그걸 온전히 이룰 능력이 없는 것으로 느껴집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저는 저의 미지근한 신앙을 느낍니다. 요셉 신부님이 강론에서 설명하신 것처럼 말이지요. 왜냐하면 아직도 나의 가족들을 위해서 아무것도 하지 않았으니까요. 아직 그들에게 하느님과 나의 교리와 교회 안에서의 나의 경험에 대해서 이야기하기가 너무 힘이 듭니다. 그들은 언제나 나를 비난하고 제가 하는 일을 두고 빈정거리기 일쑤이지요. 때로는 넘어지고 때로는 용기를 잃게 되어 그들을 가르치지도, 기도문을 바치거나 식사 전, 또는 자기 전에 기도를 바치지 못하곤 합니다.

지금까지의 3년 동안 아직도 제 가족은 미사에 나오지 않습니다. 제 엄마는 우리에게 딱 한 번 묵주기도를 바치는 법을 가르치셨습니다. 딱 한 번요. 지금은 제가 성당에 나오지만 기도하려고 노력하지 않습니다. 지금은 그저 속으로 그들을 위해서 침묵 중에 하느님에게 청할 뿐입니다. 저에게 인내와 용기와 힘을 달라고 청하지요. 제가 교리 안에서 아이들을 돕듯이 제 가족을 도울 수 있도록 말이에요.

아직도 저는 완벽하지도, 성녀도 아닙니다. 제가 지닌 빛은 작은 불꽃에 불과하지만 훗날 다른 이들을 위해 활활 타오르는 화염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절대로 그리 되리라는 희망을 잃지 않습니다. 하느님에게는 불가능한 일은 없으니까요.

또한 다른 이들을 위해서 빛이 되는 이 체험은 하느님을 아는 데에 도움이 됩니다. 그리고 미래에 제가 저의 아이들과 남편과 더불어 하나의 가족을 꾸리게 될 때에 하느님의 사랑과 더불어 살게 되겠지요. 함께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신앙 안에서 성장하는 가족 말입니다. 이미 최근 들어서 한 사람의 애정과 사랑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와 더불어 나의 신앙과 느낌과 감정을 나누고 있고, 서로 좋아한다는 것을 알고 있지요. 하느님의 도움과 더불어 미래의 우리의 삶을 향해서 나아가려고 합니다.

저는 저 자신을 추스리려고 노력하고 있고, 나의 삶을 균형 잡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많은 경우에 본당 일과 친구들과 본당 가족들 때문에 제 가족을 도외시하곤 했으니까요. 안락함과 이기심, 그리고 본당의 한 그룹에 속하는 순응주의에 빠질까 겁이 납니다. 그리고 이로 인해 제 가족이 신앙 안에서 자라도록 돕지 못하게 될까봐 걱정이 됩니다. 이것이 제가 미지근한 신앙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하는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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