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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아들은 죽어야 한다


흥청망청 자신의 삶을 허비한 사람은 반드시 후회하게 됩니다. 이 세상에서 후회하는 것은 오히려 나은 옵션일지 모릅니다. 적어도 그것은 회개의 기회가 될 테니까요. 지상에서 하루를 우는 것이 연옥에서 천년을 우는 것보다 나을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반대로 지상에서 열심히 일하고 땀흘리고 수고해서 천상의 가치를 얻은 사람의 그 수고는 참으로 소중한 것입니다. 그러나 천상의 가치는 눈에 드러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는 세상에서 무시당하고 천시당하는 일이 많습니다. 그의 일은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취급받고 그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취급당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의 일은 영원의 가치를 지니게 되지요.

그러나 사람들은 이런 생각을 받아들이기 힘들어 합니다. 당장 눈 앞에 보이는 것들의 유혹이 너무나 대단하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을 살 수 있을 것 같은 눈에 보이는 돈, 감미롭게 느껴지는 귀로 들려오는 사람들의 찬사, 말 한마디로 사람들을 조종하는 힘있는 권력… 너무나 즉각적이고 가시적이라서 벗어나기가 너무 힘이 듭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거기에 매여 살아갑니다. 그리고 거기에 살다보니 그것이 전부인 줄 알게 되지요. 우리는 어린 시절에 상상력을 발휘하면서 살아갔습니다. 모래땅만 있어도 놀 이유가 충분했지요. 하지만 어른이 되고서부터는 그러한 것들이 의미를 잃어갑니다. 오직 사회가 규정한 가치로운 것들만을 추구하게 되는 것이지요. 우리는 보이지 않는 것에 의미를 부여할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보이는 것에만 얽매여 살아가게 됩니다. 그렇게 영혼이 메말라가는 것이지요.

이 흐름은 멈추어야 합니다. 우리는 다시 원래부터 중요한 것들을 되찾아야 합니다. 아빠가 주는 용동보다는 아빠의 성실함이 소중한 것이고, 엄마가 해주는 밥보다 엄마의 사랑이 중요하다는 것을 이해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런 노력들은 구체적인 실천이 없으면 이루어지지 않는 것들입니다.

인터넷으로 좋은 기사를 읽고 순간 마음이 동한다고 모든 것이 바뀌는 것이 아닙니다. 무언가 구체적으로 실천할 거리가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그 실천을 하기에 우리는 너무나 게으릅니다. 전혀 다른 방면에서는 전혀 게으르지 않습니다. 영화관을 가기 위해서 우리는 온갖 사이트를 검색할 줄 알지만 우리의 영혼의 개선을 위해서는 그닥 노력을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내면의 노력은 ‘의지’의 변화를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은 우리의 자유의지에서 시작되고 그 의지를 바탕으로 다른 모든 것이 뒤따르게 됩니다. 그래서 의지가 변화하기 시작하면 다른 모든 것들이 뒤따르게 되는데 그 의지를 바꾸는 것이 참으로 쉽지 않은 일입니다. 때로 누군가와 화해하는 것이 힘들어서, 그에게 나서서 손을 내밀고 용서를 청하는 것이 힘들어서 다른 모든 일은 그 어떤 것이라도 하겠지만 그것 만큼은 할 수 없을 것 같다고 생각해 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제가 하는 말을 이해할 것입니다. 의지를 바꾸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러니 하느님의 일, 예수님의 일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하고 계시는 일, 당신의 아들을 보내어 하시는 일은 바로 이 인간의 의지를 당신에게 돌려놓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향해서 들러붙어 있는 마음들을 떼어내어 다시 당신에게 되돌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하느님은 당신의 외아들이 십자가에서 죽임 당하도록 두셔야 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인간들에게 마지막 희망을 전해주는 유일한 방법이었기 때문입니다. 구원자는 수난 당하고 죽어야 했던 것이지요. 왜냐하면 가장 바닥까지 내려가야 비로소 그 가장 바닥에 있는 이도 구할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셨지요. 당신의 제자들에게 이 모든 것을 미리 알려 주셨습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이해할 수 없었지요. 그들이 비록 흥청망청 삶을 허비하고 있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랑을 과감하게 시작할 준비도 되어 있지 않았으니까요.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고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였다가 사흘 만에 되살아나야 한다.” 하고 이르셨다.
예수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자기 자신을 잃거나 해치게 되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 (루카 9,2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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