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시기라서 뉘우침과 용서에 대한 주제를 좀 다루어볼까 합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은 뭔가를 잘못하고서 하느님에게 뉘우치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교회도 그렇게 가르칩니다. 하지만 여기에서 자주 간과되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 ‘뉘우침’이라는 주제입니다. 뉘우친다는 것을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그냥 눈물 한 번 흘리고 하느님 앞에 무릎 꿇고 기도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으로 생각해 버리고 마는 것이지요.
뉘우침이라는 것은 간단히 말하면 ‘돌아섬’을 의미합니다. 누구나 돌아설 수 있습니다. 누군가 다른 이를 욕을 실컷 하다가 어느 책에서 타인을 비난하는 것의 그릇됨에 대한 이야기를 읽게 됩니다. 그러면 그 순간 자신의 행위를 뉘우칠 수 있습니다. 자신의 행동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를 알고 반성할 수 있지요. 하지만 참된 뉘우침은 그가 다시 다른 이를 향해 비난을 던질 상황에 처했을 때에 그의 ‘결심’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즉, 누군가를 비난할 수 있는 상황에서 그 행위를 그치고자 결심하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 노력할 때에 이루어지는 것이지요.
가톨릭의 고해 성사는 엄중하고 진지한 것이었습니다. 과거에는 속죄의 기간도 굉장히 길었고 그래서 사람들은 그런 속죄를 거치고 난 이후에는 다시 과거의 잘못으로 돌아가지 않을 준비가 되어 있었지요. 영화 미션에 한 가지 예가 나옵니다. 노예 상인이었던 주인공이 질투로 동생을 죽이고 회개를 결심한 후에 자신의 갑옷을 짊어지고 이과수 폭포를 오르지요. 그리고 노예들로부터 죽임을 당할 수도 있던 상황에서 그들에게 용서를 받고서야 비로소 진정으로 하느님으로부터 용서를 받았다는 확신 속에 기쁘게 살아가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결국 그는 다시 폭력을 사용해야 하는 상황이 다가오자 자신이 속죄 대상으로 써 왔던 갑옷 더미에서 건져올린 칼을 다시 손에 쥐게 됩니다.
참된 뉘우침이라는 것은 그리 만만한 주제가 아닙니다. 참된 뉘우침은 결심이 필요하고 결심대로 살려는 구체적인 노력이 뒷받침 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너무나 건성으로 고해성사를 보고 실제로 내면으로 바꿀 마음이 하나도 없으면서 고해성사를 보기도 합니다. 무언가 어긋나 있는 상황이지요.
참된 뉘우침이 있으면 하느님의 용서는 이미 주어지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문둥 병자에게 사제를 찾아가서 채워야 할 것들을 다 채우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고해성사가 있는 것입니다. 죄의 용서에 대한 확정을 받기 위해서이지요. 고해성사는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사랑으로 마련된 거룩한 행위입니다.
뉘우치십시오. 하지만 올바로 뉘우치고 본인 스스로 잘못이라고 생각하는 그 행위를 반복하지 않을 수 있도록 노력하십시오. 주일 미사 빠졌다고 건성으로 고백하는 일은 없기를 바랍니다. 정말 고백할 죄가 주일미사를 빠진 것 밖에 없고, 또 그것이 정말 본인의 나태함으로 주일 미사를 거르게 되었다면 진정으로 뉘우치고 반복하지 않을 수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적지 않은 사람들이 형식을 채우기 위해서 그렇게 할 뿐입니다. 진정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 없이 말이지요.
참된 뉘우침은 사랑에서 우러나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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