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그분을 안다.” 하면서 그분의 계명을 지키지 않는 자는 거짓말쟁이고, 그에게는 진리가 없습니다. (1요한 2.4)
- 신부님, 제가 아는 어느 분은 주일에 침대에 누워서 텔레비전을 켜서 미사를 ‘관람’해요. 그리고는 자기는 미사에 참례했다고 해요.
- 그럼 차분하게 그분에게 말해줘. ‘네, 당신 눈은 미사에 참여하셨으니 영원한 생명에 이르겠네요. 하지만 당신의 몸은 게으름으로 남아 있었으니 그에 속한 곳에 머무르겠지요.’라고 말이야. 하하하.
농담이었지만 농담이 아닙니다. 이곳에서는 실제로 이런 일이 많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자신을 가톨릭 신자로 칭하면서 주일의 소중한 날을 자신이 원하는 일에 헌신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주일을 거룩히 지내라는 말은 ‘미사에 어떻게든 나가라. 나가지 않으면 너희는 대죄인이다.’라는 말은 분명히 아닙니다. 만일 그렇다면 사제가 부족해서 매주 미사를 드릴 수 없는 가난한 볼리비아 시골의 신앙인들은 모두 죄인이어야 하니까요. 그러나 그럴리가 없지요.
주일을 거룩히 지내라는 말은 일주일 중의 하루를 온전히 하느님에게 내어드리는 생활을 하고 거룩한 휴식을 취하라는 말입니다. 헌데 자신에게 특별한 질병이 있어서 거동이 불편하지 않은데도 주님의 거룩한 만찬에 참여하지 않고 게으름에 빠져 침대에 누워서 텔레비전만 틀어서는 주일 미사를 봤다고 한다면 그에 상응하는 합당한 상급이 뒤따르겠지요.
미사에 물리적으로 존재하는가 아닌가 하는 것은 두번째 문제입니다. 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는가 아닌가 하는 것이지요. 하느님을 향한 그 어떤 애정도 없이 그저 수동적으로 주일 미사에 나오고 교사 회합을 하고 성당에서 시간을 보낸다 하지만 결국 그는 주일의 의무를 올바로 지키지 못한 셈이 됩니다. 그 마음 안에 하느님을 향한 마음을 찾아보기 힘드니까요.
헌데 여전히 한국의 신앙인들은 ‘주일의 법적 의무규정’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어떻게든 주일에 성당 의자에 엉덩이를 붙이면 의무는 끝난다고 생각을 하지요. 그러나 그렇지 않다는 것을 여러차례 설명을 드렸습니다. 주일의 진정한 의무는 이미 나의 마음에서 이루어지는 것이지요.
과거 박해시절 감옥에 갇힌 신자들에게는 ‘신령성체’라는 게 있었습니다. 비록 몸은 미사에 머무르지 못하지만 온 마음으로 성체를 모시는 자리에 함께하는 것을 의미하지요. 하느님이 그런 이들에게 성체의 은총을 허락하지 않으셨을 리가 없습니다. 헌데 오늘은 매일 미사가 있고 차를 타면 얼마든지 가까운 성당에 갈 수 있는데도 게으른 신앙생활을 하는 이들이 있지요. 그러면서도 언제나 ‘종교’란에는 ‘천주교’라고 부끄러움 없이 적곤 합니다.
늘 성당가고 싶다는 생각을 하는 그들의 뇌는 천국에 머무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나머지 게으름을 조장하는 그들의 육신은 마땅히 머물러야 할 곳에 머무를 겁니다.
- 신부님, 제가 아는 어느 분은 주일에 침대에 누워서 텔레비전을 켜서 미사를 ‘관람’해요. 그리고는 자기는 미사에 참례했다고 해요.
- 그럼 차분하게 그분에게 말해줘. ‘네, 당신 눈은 미사에 참여하셨으니 영원한 생명에 이르겠네요. 하지만 당신의 몸은 게으름으로 남아 있었으니 그에 속한 곳에 머무르겠지요.’라고 말이야. 하하하.
농담이었지만 농담이 아닙니다. 이곳에서는 실제로 이런 일이 많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자신을 가톨릭 신자로 칭하면서 주일의 소중한 날을 자신이 원하는 일에 헌신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주일을 거룩히 지내라는 말은 ‘미사에 어떻게든 나가라. 나가지 않으면 너희는 대죄인이다.’라는 말은 분명히 아닙니다. 만일 그렇다면 사제가 부족해서 매주 미사를 드릴 수 없는 가난한 볼리비아 시골의 신앙인들은 모두 죄인이어야 하니까요. 그러나 그럴리가 없지요.
주일을 거룩히 지내라는 말은 일주일 중의 하루를 온전히 하느님에게 내어드리는 생활을 하고 거룩한 휴식을 취하라는 말입니다. 헌데 자신에게 특별한 질병이 있어서 거동이 불편하지 않은데도 주님의 거룩한 만찬에 참여하지 않고 게으름에 빠져 침대에 누워서 텔레비전만 틀어서는 주일 미사를 봤다고 한다면 그에 상응하는 합당한 상급이 뒤따르겠지요.
미사에 물리적으로 존재하는가 아닌가 하는 것은 두번째 문제입니다. 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는가 아닌가 하는 것이지요. 하느님을 향한 그 어떤 애정도 없이 그저 수동적으로 주일 미사에 나오고 교사 회합을 하고 성당에서 시간을 보낸다 하지만 결국 그는 주일의 의무를 올바로 지키지 못한 셈이 됩니다. 그 마음 안에 하느님을 향한 마음을 찾아보기 힘드니까요.
헌데 여전히 한국의 신앙인들은 ‘주일의 법적 의무규정’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어떻게든 주일에 성당 의자에 엉덩이를 붙이면 의무는 끝난다고 생각을 하지요. 그러나 그렇지 않다는 것을 여러차례 설명을 드렸습니다. 주일의 진정한 의무는 이미 나의 마음에서 이루어지는 것이지요.
과거 박해시절 감옥에 갇힌 신자들에게는 ‘신령성체’라는 게 있었습니다. 비록 몸은 미사에 머무르지 못하지만 온 마음으로 성체를 모시는 자리에 함께하는 것을 의미하지요. 하느님이 그런 이들에게 성체의 은총을 허락하지 않으셨을 리가 없습니다. 헌데 오늘은 매일 미사가 있고 차를 타면 얼마든지 가까운 성당에 갈 수 있는데도 게으른 신앙생활을 하는 이들이 있지요. 그러면서도 언제나 ‘종교’란에는 ‘천주교’라고 부끄러움 없이 적곤 합니다.
늘 성당가고 싶다는 생각을 하는 그들의 뇌는 천국에 머무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나머지 게으름을 조장하는 그들의 육신은 마땅히 머물러야 할 곳에 머무를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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