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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의 일

그들이 “하느님의 일을 하려면 저희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 하고 묻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하느님의 일은 그분께서 보내신 이를 너희가 믿는 것이다.” (요한 6,28-29)

분명한 질문과 분명한 대답입니다. 하지만 여전히 이를 읽는 이들에게는 감추어져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일은 ‘그분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라는 아주 단순 명료한 진리입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우리들끼리 서로 묻습니다. ‘그분께서 보내신 이가 누구야?’

그분께서 보내신 이는 누구입니까? 당연히 ‘예수님’이라고 가장 먼저 생각할 것입니다. 맞습니다. 바로 그분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이 보낸 당신의 외아들이셨습니다. 그러나 그분 뿐이라고 생각하면 큰 착각입니다. 우리 주변에는 하느님이 보낸 이들이 생각 외로 많습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행위에는 그 근본 의도가 숨어 있습니다. 아무리 애인에게 잘 해주는 남자라도 이미 아내가 있는 사람이면 그 애인을 위한 사랑의 행위의 근본에는 자신의 쾌락을 위한 탐욕이 숨어 있을 뿐입니다. 애인에게 대놓고 ‘사랑한다’라고 속삭이고 있겠지만 아내 앞에서 그런 말을 할 수는 없는 것이지요. 거짓을 기반으로 한 거짓된 사랑의 관계일 뿐입니다. 그리고 그건 하느님에게서 멀어져 있는 행위이지요. 입으로 아무리 달콤한 말을 속삭이고 아무리 다정한 행위를 한다고 해도 그 모든 것은 하느님에게 멀어진 행위일 뿐입니다.

반대로 하느님과 밀접한 행위들이 있습니다. 어머니가 아침마다 차려주시는 밥에는 어머니의 책임감과 사랑이 들어 있지요. 어머니가 아무리 퉁명스럽고 말재간이 없으며 사랑을 표현하는 데에 서투르다고 해도 김이 모락모락 솟아오르는 아침밥은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어머니의 사명을 다하고 있는 한 여인의 노력이 들어있는 것이기에 그 자체로 하느님의 일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사랑을 믿어야 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세상은 정반대로 돌아갑니다. 아내를 두고 바람을 피우는 남자의 따스한 말을 ‘사랑’이라고 착각하고 무뚝뚝한 어머니가 정성스레 차려놓은 밥상을 귀찮다고 먹기 싫어하지요.

하느님이 보낸 이들은 예수님만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뜻을 받들어 일하는 모든 이들은 사실 하느님이 보낸 이들입니다. 술 마시고 들어온 아빠에게 진심으로 조언하는 어린 아들의 마음에는 하느님의 뜻이 들어 있습니다. 잘못된 행위에 빠져있는 직장 동료에게 충언하는 이는 하느님의 사람입니다. 딸을 걱정해서 일찍 돌아오라고 잔소리를 하는 어머니의 마음은 하느님의 마음입니다. 그러나 많은 경우에 우리는 하느님이 보내신 이들을 믿지 못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욕구를 믿고 따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을 단순히 신앙생활의 필수 요소를 완료하는 것 정도로 착각하는 이들, 오히려 그들은 하느님의 뜻에서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그들이 하느님의 뜻을 이룰 생각이 없다는 것은 그들에게 작은 시련이 닥쳤을 때에 바로 드러납니다. 최소한의 규정을 채우면서 자신의 양심에 불끄기를 하고 있는 그들에게 ‘사랑의 시련’이 닥치는 순간 그들은 그마저도 내던지고 자신의 길을 찾아 나설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의 불신을 과감하게 드러내기 시작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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