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요한 6,35)
그러나 사람들은 배고파하고 목말라합니다. 육신의 배고픔과 목마름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제가 말하는 것은 영적인 배고픔과 목마름입니다. 사람들은 굶주린 채로 자신을 채워줄 수 있는 것을 찾고, 통상적으로는 서로 간에 그것을 찾습니다. 바로 ‘관심과 사랑’이라고 하는 것이지요.
타인의 사랑이 나를 채워주리라 믿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믿었던 이의 약점을 보게 될 때에 우리는 더 많은 실망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깊은 배신감으로 인간을 경계하게 되지요.
하지만 하느님은 우리에게 완벽한 이웃들을 선물하신 게 아닙니다. 아니, 그 이전에 우리 자신을 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변덕스럽고 감정에 휘둘리며 선한 생각을 하다가도 악한 생각이 고개를 쳐들기도 합니다. 우리 자신들이 완벽하지 않은데 왜 우리는 타인에게서 완벽을 추구하려 하는 걸까요? 그들은 나에게 잘 해주다가 못해주기도 하고 좋은 것을 베풀다가 고난을 안겨다 주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지요.
결국 우리는 인간에게서 완전한 행복을 찾으면 안됩니다. 우리는 바로 하느님에게서 그것을 찾아야 하고, 하느님의 유일한 외아들에게서 그것을 찾아야 합니다. 그분은 바로 생명의 빵이시기 때문입니다.
아, 잊지 말아야 할 가련한 존재들이 또 있지요. 바로 ‘물질’에서 희망을 찾아 보려는 이들입니다. 우상숭배라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물질을 숭배하는 이들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자기 팔 하나 들어올리지 못하는 물질들에 우리의 희망을 두는 것이지요. 돈을 숭배하고 자신이 가진 부동산을 숭배하는 가련한 이들, 그들은 하느님의 권능과 능력을 수시로 무시하는 이들입니다.
‘그래도 살기 위해서 돈은 있어야 하지 않나?’라고들 합니다. 저는 아무 것도 지니지 않은 채로 살라고 한 게 아닙니다. 그것들을 숭배하지 말라고 했지요. 숭배와 필요에 의한 소유는 전혀 다른 차원의 것입니다. 물질을 숭배하는 이는 가당찮은 것을 위해서 보다 소중한 것을 희생하는 사람이고, 필요에 의해서 소유하는 이는 질서에 따라 필요한 것을 취할 뿐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도 제자들과 음식을 함께 나누었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함께 음식을 나누는 행위는 부활하신 분께도 전혀 어색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생명의 빵은 오직 예수님만이 주실 수 있습니다. 세상은 제 나름으로 하느님의 은총을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지만 가장 완전한 생명의 빵은 오직 예수님만이 우리에게 선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미사 전례에 대한 의무적 참여’를 말하고자 하는 것은 아닙니다. 참된 생명의 빵은 그분의 가르침을 알고 실천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미사에 참례하는 것도 그분의 거룩한 몸을 받아 모시는 것도 바로 이를 위해서 이루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믿는 바를 살아 내어야 하는 것이지요. 예수님을 믿는다 하면서 예식과 형식만을 준수한 채로 실제 삶 안에서는 그분과 동떨어져 살아간다면 우리는 거짓말쟁이가 됩니다.
생명의 빵을 모셔야 합니다. 물론 가능하면 직접 입으로 받아 모셔야 합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성체 안에 예수님께서 현존하신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이를 진정으로 깨닫는 이들은 많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배고파하고 목말라합니다. 육신의 배고픔과 목마름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제가 말하는 것은 영적인 배고픔과 목마름입니다. 사람들은 굶주린 채로 자신을 채워줄 수 있는 것을 찾고, 통상적으로는 서로 간에 그것을 찾습니다. 바로 ‘관심과 사랑’이라고 하는 것이지요.
타인의 사랑이 나를 채워주리라 믿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믿었던 이의 약점을 보게 될 때에 우리는 더 많은 실망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깊은 배신감으로 인간을 경계하게 되지요.
하지만 하느님은 우리에게 완벽한 이웃들을 선물하신 게 아닙니다. 아니, 그 이전에 우리 자신을 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변덕스럽고 감정에 휘둘리며 선한 생각을 하다가도 악한 생각이 고개를 쳐들기도 합니다. 우리 자신들이 완벽하지 않은데 왜 우리는 타인에게서 완벽을 추구하려 하는 걸까요? 그들은 나에게 잘 해주다가 못해주기도 하고 좋은 것을 베풀다가 고난을 안겨다 주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지요.
결국 우리는 인간에게서 완전한 행복을 찾으면 안됩니다. 우리는 바로 하느님에게서 그것을 찾아야 하고, 하느님의 유일한 외아들에게서 그것을 찾아야 합니다. 그분은 바로 생명의 빵이시기 때문입니다.
아, 잊지 말아야 할 가련한 존재들이 또 있지요. 바로 ‘물질’에서 희망을 찾아 보려는 이들입니다. 우상숭배라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물질을 숭배하는 이들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자기 팔 하나 들어올리지 못하는 물질들에 우리의 희망을 두는 것이지요. 돈을 숭배하고 자신이 가진 부동산을 숭배하는 가련한 이들, 그들은 하느님의 권능과 능력을 수시로 무시하는 이들입니다.
‘그래도 살기 위해서 돈은 있어야 하지 않나?’라고들 합니다. 저는 아무 것도 지니지 않은 채로 살라고 한 게 아닙니다. 그것들을 숭배하지 말라고 했지요. 숭배와 필요에 의한 소유는 전혀 다른 차원의 것입니다. 물질을 숭배하는 이는 가당찮은 것을 위해서 보다 소중한 것을 희생하는 사람이고, 필요에 의해서 소유하는 이는 질서에 따라 필요한 것을 취할 뿐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도 제자들과 음식을 함께 나누었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함께 음식을 나누는 행위는 부활하신 분께도 전혀 어색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생명의 빵은 오직 예수님만이 주실 수 있습니다. 세상은 제 나름으로 하느님의 은총을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지만 가장 완전한 생명의 빵은 오직 예수님만이 우리에게 선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미사 전례에 대한 의무적 참여’를 말하고자 하는 것은 아닙니다. 참된 생명의 빵은 그분의 가르침을 알고 실천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미사에 참례하는 것도 그분의 거룩한 몸을 받아 모시는 것도 바로 이를 위해서 이루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믿는 바를 살아 내어야 하는 것이지요. 예수님을 믿는다 하면서 예식과 형식만을 준수한 채로 실제 삶 안에서는 그분과 동떨어져 살아간다면 우리는 거짓말쟁이가 됩니다.
생명의 빵을 모셔야 합니다. 물론 가능하면 직접 입으로 받아 모셔야 합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성체 안에 예수님께서 현존하신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이를 진정으로 깨닫는 이들은 많지 않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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