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지에서는 딱히 정해진 일이라고는 ‘미사와 성사’ 밖에 없습니다. 그 외의 일은 전부 선교사의 역량대로 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일을 분별하는 것은 참으로 중요한 일입니다.
우리는 모든 일을 다 할 수 없습니다. 하루라는 시간 동안 일을 잘 배분해야 합니다. 그래서 선교사는 자신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일부터 하는 것이 보통입니다.
그럼 무엇이 가장 중요한 일이 되는 것일까요? 여기에서부터 많은 생각들이 갈립니다. ‘민중’이 우선이라고 생각하는 사람, ‘교회’가 우선이라고 생각하는 사람, ‘외적 지표’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 ‘내적 양성’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 참으로 다양한 의견들이 존재하지요.
하느님은 사실 그 모든 이들을 통해서 일을 하신다고 하는 게 맞습니다. 누군가가 지어놓은 성전에서 내적인 양성을 시작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또 내적으로 성장한 공동체에 와서 큰 어려움 없이 건물을 지어 올리는 사람도 있지요.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교회가 가르치려는 바를 중요시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럼 모든 일이 똑같은 셈인가 하면 그것은 아닙니다. 일에는 ‘농도’가 있습니다. 위에서 언급한 그 수많은 일들 안에는 저마다의 ‘농도’가 존재합니다. 그 농도라는 것은 바로 사랑의 깊이를 말하고 그 사랑은 두 가지 뚜렷한 방향성을 지닙니다. 바로 하느님과 이웃을 향한 방향이지요.
성당 안에서 사람들을 모아서 기도회를 한다지만 실제로 그 목적은 거기 모인 이들이 내는 헌금에 관심이 있는 거라면 그 기도회의 주체자는 엉뚱한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반대로 바자회를 하는데 정말 가난한 이웃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는 거라면 그 바자회는 더할나위없이 소중한 바자회가 되는 것이지요.
건물을 지어도 정말 필요에 의해서 거룩한 뜻에 의해서 지을 수도 있고, 또 반대로 자신의 이름을 내세우기 위해서 지을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섭리는 신기하게도 자신의 이름을 위해서 지어진 집을 통해서도 작용할 수도 있지요. 그러나 저마다의 당사자는 자신이 한 일에 책임을 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하는 일의 농도를 올바로 분별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헛군데에 정신을 쏟다가 생을 마감하게 됩니다. 결국 하느님 앞에 내놓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게 되지요. 돈을 벌기 위해서 의술을 집행하는 의사와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 의술을 집행하는 의사는 반드시 그 모양새가 다를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모든 일을 다 할 수 없습니다. 하루라는 시간 동안 일을 잘 배분해야 합니다. 그래서 선교사는 자신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일부터 하는 것이 보통입니다.
그럼 무엇이 가장 중요한 일이 되는 것일까요? 여기에서부터 많은 생각들이 갈립니다. ‘민중’이 우선이라고 생각하는 사람, ‘교회’가 우선이라고 생각하는 사람, ‘외적 지표’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 ‘내적 양성’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 참으로 다양한 의견들이 존재하지요.
하느님은 사실 그 모든 이들을 통해서 일을 하신다고 하는 게 맞습니다. 누군가가 지어놓은 성전에서 내적인 양성을 시작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또 내적으로 성장한 공동체에 와서 큰 어려움 없이 건물을 지어 올리는 사람도 있지요.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교회가 가르치려는 바를 중요시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럼 모든 일이 똑같은 셈인가 하면 그것은 아닙니다. 일에는 ‘농도’가 있습니다. 위에서 언급한 그 수많은 일들 안에는 저마다의 ‘농도’가 존재합니다. 그 농도라는 것은 바로 사랑의 깊이를 말하고 그 사랑은 두 가지 뚜렷한 방향성을 지닙니다. 바로 하느님과 이웃을 향한 방향이지요.
성당 안에서 사람들을 모아서 기도회를 한다지만 실제로 그 목적은 거기 모인 이들이 내는 헌금에 관심이 있는 거라면 그 기도회의 주체자는 엉뚱한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반대로 바자회를 하는데 정말 가난한 이웃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는 거라면 그 바자회는 더할나위없이 소중한 바자회가 되는 것이지요.
건물을 지어도 정말 필요에 의해서 거룩한 뜻에 의해서 지을 수도 있고, 또 반대로 자신의 이름을 내세우기 위해서 지을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섭리는 신기하게도 자신의 이름을 위해서 지어진 집을 통해서도 작용할 수도 있지요. 그러나 저마다의 당사자는 자신이 한 일에 책임을 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하는 일의 농도를 올바로 분별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헛군데에 정신을 쏟다가 생을 마감하게 됩니다. 결국 하느님 앞에 내놓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게 되지요. 돈을 벌기 위해서 의술을 집행하는 의사와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 의술을 집행하는 의사는 반드시 그 모양새가 다를 수 밖에 없습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