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를 설명하는 것은 참으로 쉽지 않은 일입니다. 과거의 사람들에게 ‘하늘’이라는 존재는 그 자체로 설명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하늘에서는 비가 쏟아지고 강렬한 햇볓이 쏟아지고 구름과 우박이 떨어지며 천둥과 번개가 치기 때문에 사람들은 하늘을 떠올리면서 그 자체로 하느님의 위엄을 떠올릴 수 있었습니다. 하늘 그 자체가 하느님의 지고하심을 상징하고 있었지요.
하지만 과학이 발전을 하고 사람들이 사물들의 속성을 알게 되면서 ‘하늘’이라는 의미는 점차적으로 그 의미를 상실해가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은 더는 하늘을 보면서 하느님의 위엄을 떠올리지 않습니다. 그저 하늘을 위로 있는 공간일 뿐입니다. 이는 ‘아버지’에 대한 관념에도 그대로 적용이 됩니다. 과거 아버지란 존재는 위엄있고 권위있고 가정의 우두머리로서 큰 의미를 지닌 것이었지요. 하지만 오늘날 ‘아버지’라는 존재는 참으로 초라해져버린 듯한 느낌이 듭니다.
그래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를 설명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두 의미를 동시에 그 깊은 뜻까지 밝혀 드러내어야 하기 때문이지요. 하늘의 심오함, 우리의 일상을 벗어나고 가시적인 범주를 벗어난 그 위엄을 합당하게 드러내어야 하고, 아버지의 자상함과 권위를 아주 깊은 부분까지 잘 드러내어야 하기 때문이지요. 결국은 ‘말로 설명하기 힘들다’는 것이 결론이 되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포기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땅’을 넘어서 계신 분이십니다. 우리의 땅이라는 것은 단순히 지표면을 뜻하는 게 아니라 우리가 머무르는 모든 가시세계와 일상적인 차원의 일들을 의미하지요. 그분은 마치 강아지가 주인의 보다 넓은 뜻을 이해할 수 없듯이 우리의 피상적인 사고를 훨씬 뛰어넘어 계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그분을 ‘하늘에 계신다’고 표현을 하는 것이지요. 우리가 그분에 대한 생각을 우리가 사는 지상으로 끌어내리는 순간 이미 그 생각은 하느님에 대한 순수한 생각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숱한 관상가들은 제 나름대로 바라본 하느님의 모습을 서술하려고 했지만 번번이 다음과 같은 표현을 합니다. ‘인간의 언어로는 표현될 수 있는 게 아니다’라고 말이지요.
그분은 참된 아버지 이십니다. 아버지의 본래의 모습은 지금으로서는 많이 퇴색되었지만, 사랑이 가득하고 자비롭고 그러면서도 권위가 있는 분으로 드러납니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그분의 가득한 사랑을 잊어서는 안되고, 다른 한편으로 그분의 위엄과 전능과 권위를 잊어서도 안됩니다. 그 둘을 올바로 마음 속에 간직하고 있어야 그분에 대해서 합당한 영광을 드릴 수 있게 되는 것이지요.
물론 제가 여기 서술한 것은 ‘이상적인 모습’입니다. 실제로 우리는 하느님에 대해서 거의 생각지 않습니다. 제 나름으로 살기 바쁘기 때문이지요. 하느님의 존재에 대한 인식은 삶의 가장 어려운 난관 속에서 겨우 이루어지는 것이 보통입니다. 평소에는 늘 잊고 있다가 도저히 자신의 능력으로 어쩔 수 없는 때가 되어서야 겨우 하느님을 떠올리곤 하지요. 그래서 하느님은 때로 당신의 권능을 체험시키기 위해 사람들에게 시련을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이 누군가를 괴롭히신다고 착각해서는 안됩니다. 모든 시련은 이미 우리들이 나름으로 예비한 것이고 하느님은 그걸 온 몸으로 막고 계시다가 우리의 교육을 위한 목적으로 아주 조금만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를 이해하는 사람은 굉장히 드물지요. 모두 자신들이 잘난 줄 알고 뭐라도 되는 듯이 세상의 중심이자 주인으로 스스로를 생각해 왔으니까요.
그분이 ‘허락하시는’ 시련 앞에서 우리는 비로소 정신을 차리고 다시 아버지에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에게 돌아오곤 합니다. 그때라도 하느님은 두 팔을 벌리시고 당신의 자녀들을 끌어안아 주시는 분이십니다. 돌아온 탕자의 이야기를 떠올려보시면 알 수 있습니다. 모든 재산을 내어주고 끊임없이 기다리다가 돌아오는 아들에게 가장 좋은 가락지와 옷을 입혀주는 아버지가 바로 우리의 하늘 아버지, 하느님이십니다.
하지만 과학이 발전을 하고 사람들이 사물들의 속성을 알게 되면서 ‘하늘’이라는 의미는 점차적으로 그 의미를 상실해가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은 더는 하늘을 보면서 하느님의 위엄을 떠올리지 않습니다. 그저 하늘을 위로 있는 공간일 뿐입니다. 이는 ‘아버지’에 대한 관념에도 그대로 적용이 됩니다. 과거 아버지란 존재는 위엄있고 권위있고 가정의 우두머리로서 큰 의미를 지닌 것이었지요. 하지만 오늘날 ‘아버지’라는 존재는 참으로 초라해져버린 듯한 느낌이 듭니다.
그래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를 설명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두 의미를 동시에 그 깊은 뜻까지 밝혀 드러내어야 하기 때문이지요. 하늘의 심오함, 우리의 일상을 벗어나고 가시적인 범주를 벗어난 그 위엄을 합당하게 드러내어야 하고, 아버지의 자상함과 권위를 아주 깊은 부분까지 잘 드러내어야 하기 때문이지요. 결국은 ‘말로 설명하기 힘들다’는 것이 결론이 되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포기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땅’을 넘어서 계신 분이십니다. 우리의 땅이라는 것은 단순히 지표면을 뜻하는 게 아니라 우리가 머무르는 모든 가시세계와 일상적인 차원의 일들을 의미하지요. 그분은 마치 강아지가 주인의 보다 넓은 뜻을 이해할 수 없듯이 우리의 피상적인 사고를 훨씬 뛰어넘어 계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그분을 ‘하늘에 계신다’고 표현을 하는 것이지요. 우리가 그분에 대한 생각을 우리가 사는 지상으로 끌어내리는 순간 이미 그 생각은 하느님에 대한 순수한 생각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숱한 관상가들은 제 나름대로 바라본 하느님의 모습을 서술하려고 했지만 번번이 다음과 같은 표현을 합니다. ‘인간의 언어로는 표현될 수 있는 게 아니다’라고 말이지요.
그분은 참된 아버지 이십니다. 아버지의 본래의 모습은 지금으로서는 많이 퇴색되었지만, 사랑이 가득하고 자비롭고 그러면서도 권위가 있는 분으로 드러납니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그분의 가득한 사랑을 잊어서는 안되고, 다른 한편으로 그분의 위엄과 전능과 권위를 잊어서도 안됩니다. 그 둘을 올바로 마음 속에 간직하고 있어야 그분에 대해서 합당한 영광을 드릴 수 있게 되는 것이지요.
물론 제가 여기 서술한 것은 ‘이상적인 모습’입니다. 실제로 우리는 하느님에 대해서 거의 생각지 않습니다. 제 나름으로 살기 바쁘기 때문이지요. 하느님의 존재에 대한 인식은 삶의 가장 어려운 난관 속에서 겨우 이루어지는 것이 보통입니다. 평소에는 늘 잊고 있다가 도저히 자신의 능력으로 어쩔 수 없는 때가 되어서야 겨우 하느님을 떠올리곤 하지요. 그래서 하느님은 때로 당신의 권능을 체험시키기 위해 사람들에게 시련을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이 누군가를 괴롭히신다고 착각해서는 안됩니다. 모든 시련은 이미 우리들이 나름으로 예비한 것이고 하느님은 그걸 온 몸으로 막고 계시다가 우리의 교육을 위한 목적으로 아주 조금만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를 이해하는 사람은 굉장히 드물지요. 모두 자신들이 잘난 줄 알고 뭐라도 되는 듯이 세상의 중심이자 주인으로 스스로를 생각해 왔으니까요.
그분이 ‘허락하시는’ 시련 앞에서 우리는 비로소 정신을 차리고 다시 아버지에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에게 돌아오곤 합니다. 그때라도 하느님은 두 팔을 벌리시고 당신의 자녀들을 끌어안아 주시는 분이십니다. 돌아온 탕자의 이야기를 떠올려보시면 알 수 있습니다. 모든 재산을 내어주고 끊임없이 기다리다가 돌아오는 아들에게 가장 좋은 가락지와 옷을 입혀주는 아버지가 바로 우리의 하늘 아버지, 하느님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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