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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의 진노

아드님을 믿는 이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 그러나 아드님께 순종하지 않는 자는 생명을 보지 못할 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진노가 그 사람 위에 머무르게 된다. (요한 3, 36)

하느님의 사랑을 부르짖는 사람은 많습니다. 하지만 오늘은 그분의 진노에 대해서 묵상해 보았으면 합니다.

삼풍백화점을 기억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원래의 설계도면을 넘어서서 과중한 무게가 실리는 것을 쌓고 또 쌓다가 결국에는 무너져 내린 사건이지요. 하느님의 진노는 이와 비슷하다고 떠올려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그릇된 행위 안에 의지적으로 머무를 때에 하느님은 당신의 진노를 그 사람 위에 두십니다. 그러나 그것을 당장 집행하지는 않으시고 시간을 두십니다. 왜냐하면 그가 ‘회개’하기를 바라기 때문이지요. 그에게 ‘기회’를 제공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는 통상적으로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는 그런 하느님의 마음을 무시하고 다시 자기 죄에 새로운 죄를 더 얹는 것이 보통입니다.

거짓말을 하는 아이를 살펴보면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습니다. 거짓말을 하는 아이가 그 즉시 뉘우쳐서 마음을 돌이키는 경우는 좀처럼 찾아보기 힘듭니다. 기왕지사 거짓말을 시작한 것, 다시 새로운 거짓말로 이전의 거짓말을 보호하려 들고, 또 그 위에 새로운 거짓말을 해서 알리바이를 조성하지요. 그러나 그러다가 한계점에 이르러서 무너지는 것입니다. 자기 스스로의 거짓말에 자신이 무너지는 경우가 발생하지요.

우리는 그렇게 우리의 오류를 통해서 배울 수 있는 기회가 많았습니다. 하지만 뉘우치기는 커녕 다음 번에는 더 ‘완벽한’ 거짓말을 준비하려고 하지요. 죄를 짓는 모든 이들의 삶은 비슷비슷합니다. 그들은 죄의 달콤함을 놓치기 싫어서 다음번에는 더욱 더 완전한 형태의 죄를 준비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매 순간마다 하느님께서 그런 우리의 악행을 ‘정의롭게’ 심판할 준비를 하고 계신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합니다. 왜냐면 당장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이지요.

술을 과하게 들이키고, 속이 뒤집어져서 토해내고는 다시 시간이 지나 옛 기억을 까맣게 잊은 듯이 다시 술을 들이키는 일을 반복하다가 결국 간에 지병이 오게 되어서야 작은 깨달음을 얻게 되지만 안타깝게도 자신의 악한 습관이 이미 자신의 깨달음을 넘어 선 상태라는 것을 본인은 깨닫지 못합니다. 그래서 다시 악한 습관 그대로 실천하게 되지요. 그러다가 결국에는 돌이킬 수 없는 지점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죽음’을 맞이하게 되지요.

하느님의 진노가 이 땅에서 끝나는 것이면 다행일지 모릅니다. 그러나 영원하신 분의 준엄한 심판은 ‘영원’ 안에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잊으면 안됩니다. 하느님의 진노를 티끌만치라도 쌓지 않도록 노력할 필요가 있습니다. 아니 정반대로 하느님의 축복을 얻기 위해서 노력하는 이가 되어야 하겠지요. 그러나 축복은 커녕 자신의 죄를 즐기고 있는 상황이라면 하느님의 진노에 대한 두려움에라도 성찰을 시작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보통의 경우에 그들은 ‘장님’이라서 자신이 무슨 짓을 저지르는지도 모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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