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이 왔으나 빛을 사랑하지 않고 자신의 어두움을 사랑한 이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 자체로 인해 스스로를 심판하게 됩니다.
빛을 사랑하지 않는 것 자체가 자기 자신에게 심판이라는 것을 아직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비유를 들어서 설명하겠습니다.
예를 들어 누군가를 미워하는 한 사람을 생각해 봅시다. 그가 다른 이를 미워하는 것은 그 자체로 본인 스스로에게 심판이 됩니다. 그가 누군가를 미워하는 이유는 ‘사랑하고 싶지 않아서’입니다. 사랑하는 것이 힘들고 자신의 희생과 노력을 쏟아 부어야 하는 일이라서 사랑하기보다는 미워하기를 선택하는 것이지요. 즉, 그의 안에 악을 향한 선호도가 선을 향한 선호도보다 더 뛰어나다는 것입니다. 몸에 좋지만 입에는 쓴 약을 선이라 하고 몸에는 지독하게 나쁘면서 입에만 달콤한 불량식품을 악이라고 할 때에 그는 스스로 악을 향해서, 즉 불량식품을 향해서 나아가는 셈이 됩니다.
그는 이 땅에 살아가는 동안에는 아닌 척 살아갈 수 있습니다. 실제로는 악을 사랑하면서 마치 본인은 선을 사랑하는 사람인 것처럼 가장하고 살아갈 수 있지요. 그러나 훗날 육신의 장벽이 사라지고 나면 그는 자신의 영혼 안에 있는 방향으로 아무런 제약 없이 날아가게 됩니다. 그리고 그 방향은 어둠인 것이지요.
예수님이 이 세상에 빛으로 오셨습니다. 그래서 그분의 이름을 믿어 고백하는 이는 모두 하느님의 자녀가 됩니다. 그러나 이 표현은 어쩌면 지금의 가톨릭 신자들에게는 그 자체로 이해하지 못하는 표현이 되고 맙니다. 그분의 이름을 믿어 고백한다는 표현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올바로 이해하는 이는 거의 없다고 해도 무방합니다. 그분의 이름을 고백한다는 것은 단순히 세례 예식을 받거나 종교생활을 영위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분의 이름을 믿어 고백한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살고 가르쳤던 바를 실제로 사랑하고 따르는 것을 의미합니다.
입으로만 주님 주님 하는 수많은 이들이 있습니다. 그들의 마음은 여전히 악을 사랑하고 진정한 선의 의미를 올바로 이해하지 못한 채로 서로 다투고 싸우려고만 하지요. 주변에서 그런 모습을 볼 때마다 우리의 마음을 되새길 필요가 있습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심판하실 생각이 없으십니다. 오히려 정반대이지요. 하느님은 우리에게 당신의 외아들을 보내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를 살리려고 애쓰시지요. 그러나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심판하는 중입니다. 우리 안의 빛과 어둠의 방향을 따라서 열심히 달려나가지요. 하느님 저들을 용서하소서. 그들은 자신들이 무슨 짓을 하는지 알지 못합니다.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아들을 믿는 사람은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러나 믿지 않는 자는 이미 심판을 받았다. 하느님의 외아들의 이름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심판은 이러하다. 빛이 이 세상에 왔지만, 사람들은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였다. 그들이 하는 일이 악하였기 때문이다. 악을 저지르는 자는 누구나 빛을 미워하고 빛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자기가 한 일이 드러나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진리를 실천하는 이는 빛으로 나아간다. 자기가 한 일이 하느님 안에서 이루어졌음을 드러내려는 것이다. (요한 3,17-21)
빛을 사랑하지 않는 것 자체가 자기 자신에게 심판이라는 것을 아직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비유를 들어서 설명하겠습니다.
예를 들어 누군가를 미워하는 한 사람을 생각해 봅시다. 그가 다른 이를 미워하는 것은 그 자체로 본인 스스로에게 심판이 됩니다. 그가 누군가를 미워하는 이유는 ‘사랑하고 싶지 않아서’입니다. 사랑하는 것이 힘들고 자신의 희생과 노력을 쏟아 부어야 하는 일이라서 사랑하기보다는 미워하기를 선택하는 것이지요. 즉, 그의 안에 악을 향한 선호도가 선을 향한 선호도보다 더 뛰어나다는 것입니다. 몸에 좋지만 입에는 쓴 약을 선이라 하고 몸에는 지독하게 나쁘면서 입에만 달콤한 불량식품을 악이라고 할 때에 그는 스스로 악을 향해서, 즉 불량식품을 향해서 나아가는 셈이 됩니다.
그는 이 땅에 살아가는 동안에는 아닌 척 살아갈 수 있습니다. 실제로는 악을 사랑하면서 마치 본인은 선을 사랑하는 사람인 것처럼 가장하고 살아갈 수 있지요. 그러나 훗날 육신의 장벽이 사라지고 나면 그는 자신의 영혼 안에 있는 방향으로 아무런 제약 없이 날아가게 됩니다. 그리고 그 방향은 어둠인 것이지요.
예수님이 이 세상에 빛으로 오셨습니다. 그래서 그분의 이름을 믿어 고백하는 이는 모두 하느님의 자녀가 됩니다. 그러나 이 표현은 어쩌면 지금의 가톨릭 신자들에게는 그 자체로 이해하지 못하는 표현이 되고 맙니다. 그분의 이름을 믿어 고백한다는 표현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올바로 이해하는 이는 거의 없다고 해도 무방합니다. 그분의 이름을 고백한다는 것은 단순히 세례 예식을 받거나 종교생활을 영위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분의 이름을 믿어 고백한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살고 가르쳤던 바를 실제로 사랑하고 따르는 것을 의미합니다.
입으로만 주님 주님 하는 수많은 이들이 있습니다. 그들의 마음은 여전히 악을 사랑하고 진정한 선의 의미를 올바로 이해하지 못한 채로 서로 다투고 싸우려고만 하지요. 주변에서 그런 모습을 볼 때마다 우리의 마음을 되새길 필요가 있습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심판하실 생각이 없으십니다. 오히려 정반대이지요. 하느님은 우리에게 당신의 외아들을 보내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를 살리려고 애쓰시지요. 그러나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심판하는 중입니다. 우리 안의 빛과 어둠의 방향을 따라서 열심히 달려나가지요. 하느님 저들을 용서하소서. 그들은 자신들이 무슨 짓을 하는지 알지 못합니다.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아들을 믿는 사람은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러나 믿지 않는 자는 이미 심판을 받았다. 하느님의 외아들의 이름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심판은 이러하다. 빛이 이 세상에 왔지만, 사람들은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였다. 그들이 하는 일이 악하였기 때문이다. 악을 저지르는 자는 누구나 빛을 미워하고 빛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자기가 한 일이 드러나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진리를 실천하는 이는 빛으로 나아간다. 자기가 한 일이 하느님 안에서 이루어졌음을 드러내려는 것이다. (요한 3,1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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