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하여라, 그분께 몸을 숨기는 사람! (시편 34,9)
우리가 몸을 숨길 수 있는 대상은 여러가지가 있습니다. 아주 어릴 적에 숨바꼭질을 하면서 내 눈을 가리기만 하면 상대가 보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어리석은 시기도 있었습니다. 그야말로 눈가리고 아옹하는 셈이었지요.
우리가 커 가면서 우리는 우리를 보호할 수 있는 여러가지 수단을 마련합니다. 기본적으로는 부모님이 있었지요. 하지만 그 보호수단은 얼마가지 않습니다. 부모님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나약한 사람이라는 것을 금방 알게 되지요.
그래서 마음의 의지처가 자연히 넘어가게 되는 종착지가 ‘돈’이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돈으로 세상에서 불가능한 것이 없어 보이기 때문입니다. 돈만 충분히 가지고 있으면 원하는 모든 것을 마련한다고 생각하지요.
헌데 그러는 동안 우리는 돈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배우게 됩니다. 물론 배우지 못하는 사람이 태반이지요. 배우지 못한 이들이 동일하게 하는 생각은 ‘아직 모자라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 혈안이 되어가지요. 그러나 배운 이들, 즉 물질이 세상을 움직이는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배운 이들은 다른 방향을 향해 나아갑니다.
바로 여기에서 발견되는 것들이 물질의 추구를 넘어서는 여러 활동들입니다. 누군가는 ‘도’를 닦으려 하고, 다른 누군가는 ‘종교’에 귀의하지요. 종교도 참으로 다양합니다. 하지만 이 물질을 벗어난 첫 시도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마음의 평화’를 찾아 헤매고 다닙니다.
헌데 그러한 가운데 그리스도교는 참으로 이상한 가치를 가르치고 있는 중입니다. ‘불안’과 ‘공포’에서 벗어나려는 이들에게 그리스도교는 ‘십자가’를 지라고 가르치니 말이지요. 사람들은 십자가에서 벗어나려고 이 모든 노력을 하는데 도리어 그리스도교는 반대로 십자가를 지라고 가르치니 사람들이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는 셈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의 신비를 올바르게 이해하고 받아들인 이들은 이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게 됩니다. 고통을 피하려고만 하면 더욱 큰 고통이 다가오고, 오히려 그 고통을 끌어안아야 비로소 그 고통을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지요. 그리고 이 일련의 실천 안에서 최종적으로 ‘하느님’에게 마음이 가 닿게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 외에는 우리가 이 땅에서 피할 구석은 없습니다. 하늘 꼭대기에 올라가도, 땅 가장 깊은 곳에 들어가도 우리는 여전히 ‘위협’을 받게 되고, 그 위협의 근본에는 ‘죽음’이 존재합니다. 따라서 참된 보호의 근원이 되시는 분은 그 죽음을 극복하신 분 밖에는 없습니다. 그리고 그분의 이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는 신앙인으로서 다른 피난처를 찾는 시도에 시간을 허비해서는 안됩니다. 오히려 나날이 더욱 하느님의 그늘로 숨어들어야 합니다.
우리가 몸을 숨길 수 있는 대상은 여러가지가 있습니다. 아주 어릴 적에 숨바꼭질을 하면서 내 눈을 가리기만 하면 상대가 보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어리석은 시기도 있었습니다. 그야말로 눈가리고 아옹하는 셈이었지요.
우리가 커 가면서 우리는 우리를 보호할 수 있는 여러가지 수단을 마련합니다. 기본적으로는 부모님이 있었지요. 하지만 그 보호수단은 얼마가지 않습니다. 부모님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나약한 사람이라는 것을 금방 알게 되지요.
그래서 마음의 의지처가 자연히 넘어가게 되는 종착지가 ‘돈’이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돈으로 세상에서 불가능한 것이 없어 보이기 때문입니다. 돈만 충분히 가지고 있으면 원하는 모든 것을 마련한다고 생각하지요.
헌데 그러는 동안 우리는 돈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배우게 됩니다. 물론 배우지 못하는 사람이 태반이지요. 배우지 못한 이들이 동일하게 하는 생각은 ‘아직 모자라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 혈안이 되어가지요. 그러나 배운 이들, 즉 물질이 세상을 움직이는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배운 이들은 다른 방향을 향해 나아갑니다.
바로 여기에서 발견되는 것들이 물질의 추구를 넘어서는 여러 활동들입니다. 누군가는 ‘도’를 닦으려 하고, 다른 누군가는 ‘종교’에 귀의하지요. 종교도 참으로 다양합니다. 하지만 이 물질을 벗어난 첫 시도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마음의 평화’를 찾아 헤매고 다닙니다.
헌데 그러한 가운데 그리스도교는 참으로 이상한 가치를 가르치고 있는 중입니다. ‘불안’과 ‘공포’에서 벗어나려는 이들에게 그리스도교는 ‘십자가’를 지라고 가르치니 말이지요. 사람들은 십자가에서 벗어나려고 이 모든 노력을 하는데 도리어 그리스도교는 반대로 십자가를 지라고 가르치니 사람들이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는 셈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의 신비를 올바르게 이해하고 받아들인 이들은 이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게 됩니다. 고통을 피하려고만 하면 더욱 큰 고통이 다가오고, 오히려 그 고통을 끌어안아야 비로소 그 고통을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지요. 그리고 이 일련의 실천 안에서 최종적으로 ‘하느님’에게 마음이 가 닿게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 외에는 우리가 이 땅에서 피할 구석은 없습니다. 하늘 꼭대기에 올라가도, 땅 가장 깊은 곳에 들어가도 우리는 여전히 ‘위협’을 받게 되고, 그 위협의 근본에는 ‘죽음’이 존재합니다. 따라서 참된 보호의 근원이 되시는 분은 그 죽음을 극복하신 분 밖에는 없습니다. 그리고 그분의 이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는 신앙인으로서 다른 피난처를 찾는 시도에 시간을 허비해서는 안됩니다. 오히려 나날이 더욱 하느님의 그늘로 숨어들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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