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은 불고 싶은 데로 분다. 너는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에서 와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 영에서 태어난 이도 다 이와 같다.(요한 3,8)
육은 예상할 수 있습니다. 돌을 쥐고 있다가 손에서 놓으면 땅으로 떨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요. 그와 마찬가지로 육의 모든 것은 짐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육신 안에 있는 ‘욕구’라는 것은 그의 행동을 짐작하게 해 줍니다. 그는 자신의 욕구대로 충실하게 살아갈 뿐입니다. 배가 고픈 사람이 가난한 이를 돕겠다고 나서는 일이 없고, 지금 당장 목이 마른데 책을 읽겠다는 사람도 없습니다. 만일 그렇게 한다면 그렇게 할 만한 다른 충분한 동기가 있기 때문에 그렇게 하지요. 육의 사람은 모두 예측 가능한 행동을 할 뿐입니다.
헌데 영의 사람은 전혀 엉뚱한 행동을 합니다. 이 정도면 이런 일을 해야 하는데 영의 사람은 전혀 엉뚱한 쪽으로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뜬금없이 예수님의 얼굴을 그려야 한다며 나선 파우스티나 성녀도 주변 사람들의 예측을 상당히 뛰어넘어서 행동을 했고, 몸에 오상을 지닌 비오 신부님도 주변 사람들이 보기에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이상한 행동 투성이었습니다. 영의 사람을 육의 사람은 절대로 이해하지 못합니다.
반면 영의 사람은 육의 사람의 행동을 파악하고 있습니다. 그가 왜 이런 행동을 하는지 알지만 모르는 척을 할 뿐입니다. 이랬다 저랬다 하는 육의 사람의 변덕 속에는 모두 그에 합당한 원인이 존재한다는 것을 영의 사람은 알고 있습니다. 사실 그것은 변덕이 아니라 더 강한 유혹의 자극일 뿐이지요. 그리고 그런 자극을 가하는 대상도 알고 있습니다. 유혹자는 하느님의 영을 받지 못하니까요. 결국 육의 사람은 자신의 욕구의 주인에 의해서 휘둘릴 뿐입니다. 그러나 이 욕구는 엇나간 욕구를 말합니다. 영의 사람에게도 욕구는 생생하게 살아 있습니다. 그러나 영의 사람은 그 욕구를 하느님의 뜻대로 움직이지요. 그러나 영의 사람의 그 근본을 차지하는 영은 언제나 우리 모두를 놀랍게 합니다.
(아마 제가 무슨 소리를 적어 놓았는지 이해하지 못할 분이 대부분일 듯 싶네요. ㅎㅎ)
육은 예상할 수 있습니다. 돌을 쥐고 있다가 손에서 놓으면 땅으로 떨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요. 그와 마찬가지로 육의 모든 것은 짐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육신 안에 있는 ‘욕구’라는 것은 그의 행동을 짐작하게 해 줍니다. 그는 자신의 욕구대로 충실하게 살아갈 뿐입니다. 배가 고픈 사람이 가난한 이를 돕겠다고 나서는 일이 없고, 지금 당장 목이 마른데 책을 읽겠다는 사람도 없습니다. 만일 그렇게 한다면 그렇게 할 만한 다른 충분한 동기가 있기 때문에 그렇게 하지요. 육의 사람은 모두 예측 가능한 행동을 할 뿐입니다.
헌데 영의 사람은 전혀 엉뚱한 행동을 합니다. 이 정도면 이런 일을 해야 하는데 영의 사람은 전혀 엉뚱한 쪽으로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뜬금없이 예수님의 얼굴을 그려야 한다며 나선 파우스티나 성녀도 주변 사람들의 예측을 상당히 뛰어넘어서 행동을 했고, 몸에 오상을 지닌 비오 신부님도 주변 사람들이 보기에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이상한 행동 투성이었습니다. 영의 사람을 육의 사람은 절대로 이해하지 못합니다.
반면 영의 사람은 육의 사람의 행동을 파악하고 있습니다. 그가 왜 이런 행동을 하는지 알지만 모르는 척을 할 뿐입니다. 이랬다 저랬다 하는 육의 사람의 변덕 속에는 모두 그에 합당한 원인이 존재한다는 것을 영의 사람은 알고 있습니다. 사실 그것은 변덕이 아니라 더 강한 유혹의 자극일 뿐이지요. 그리고 그런 자극을 가하는 대상도 알고 있습니다. 유혹자는 하느님의 영을 받지 못하니까요. 결국 육의 사람은 자신의 욕구의 주인에 의해서 휘둘릴 뿐입니다. 그러나 이 욕구는 엇나간 욕구를 말합니다. 영의 사람에게도 욕구는 생생하게 살아 있습니다. 그러나 영의 사람은 그 욕구를 하느님의 뜻대로 움직이지요. 그러나 영의 사람의 그 근본을 차지하는 영은 언제나 우리 모두를 놀랍게 합니다.
(아마 제가 무슨 소리를 적어 놓았는지 이해하지 못할 분이 대부분일 듯 싶네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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