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분 말고는 다른 누구에게도 구원이 없습니다. 사실 사람들에게 주어진 이름 가운데에서 우리가 구원받는 데에 필요한 이름은 하늘 아래 이 이름밖에 없습니다. (사도 4,12)
그리스도교는 사실 외적인 형태로만 보자면 지극히 독선적으로 드러날 수 밖에 없습니다. 세상 어느 종교도 함부로 이런 말을 하는 경우는 없기 때문입니다. 불교는 자비심을 강조하고 서로 온화하게 잘 지낼 것을 강조합니다. 유교는 그 고유한 철학으로 만물의 조화를 꾀합니다. 헌데 그리스도교는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구원이 없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강조하고 있으니 이 얼마나 독선적이고 교만한 발언이랍니까?
하지만 이는 ‘예수님’을 올바로 조명하지 않은 탓입니다. 과연 예수님의 이름이라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올바로 생각하지 않은 채로 단순히 입으로 발음되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단어만을 섬기기에 일어나는 상황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른다, 그분의 이름을 받아들인다는 말은 단순히 외적 형식을 받아들이는 데에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그분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그분의 존재를 온전하게 받아들인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그분의 존재는 우리가 하느님에게로 다가가는 데에 반드시 필요한 관문이 됩니다.
사실 짧은 이야기가 될 수가 없습니다. 전체 구원의 역사를 조명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세상과 인간을 창조하시고 사랑을 쏟으시는 하느님 앞에서 인간은 자신의 길을 벗어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당신의 궁극적 사랑의 표현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드러내신 것이지요. 그분을 통해서 다시 우리가 하느님께로 돌아갈 수 있게 말입니다. 그분의 자비와 사랑은 모든 세대를 통틀어 영향을 미치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예수 시대 이전에 죽은 이들이라 할지라도 예수님 덕분에 크나큰 구원의 은총을 받게 되는 것이지요.
그러나 이 사실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다른 이들에게는 어리석은 일로 보일 뿐입니다. 왜냐면 그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외에는 별달리 바라볼 수 있는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살고자 하는 세상, 더 나아지고자 하는 세상에서 예수님은 ‘희생’의 가치를 가르치고 ‘영원한 생명’을 가르치고 있으니 그러한 것들은 세상 사람들의 시선에는 무의미한 것이나 다름 없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의 핵심은 ‘가장 드높으신 분의 희생으로 얻어진 가장 손쉬운 구원의 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손쉽다는 의미가 그냥 입술로만 ‘주님 주님’한다고 다 이루어진다는 것은 분명히 아닙니다.
믿는 이들, 그분의 이름을 믿는 이들은 당연히 자신들의 삶의 변화를 준비해야 합니다. 이전의 죄스런 삶에서 변화되기 시작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는 것이지요. 여전히 세속적인 삶 속에 파묻혀 살면서 단순히 그분의 이름을 부른다고 자신들의 구원이 택배 배달처럼 배송되는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적지 않은 이들이 예수를 떠납니다. 심지어는 교회 안에 있으면서도 그 마음은 예수님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진정한 자신의 구원자의 이름으로 고백하지 않는 이들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다투고, 싸우고, 이간질하고, 증오하고, 시기하고, 험담을 합니다. 그들은 영원한 상급에서 한참 멀리 떨어져 있는 이들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교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고백하고 그 이름 외에는 다른 구원이 없음을 선포합니다. 그러나 그런 선포를 하는 이들의 삶은 실로 본받을 만한 것이지요. 그들은 더는 죄를 짓지 못하는 이들입니다. 그들 안에 ‘악한 의도’가 사라져 있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사람들은 그런 그들을 더욱 증오하고 시기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이미 이전에도 그렇게 해 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행복하여라, 그분의 거룩한 이름 때문에 박해를 받는 이들!
그리스도교는 사실 외적인 형태로만 보자면 지극히 독선적으로 드러날 수 밖에 없습니다. 세상 어느 종교도 함부로 이런 말을 하는 경우는 없기 때문입니다. 불교는 자비심을 강조하고 서로 온화하게 잘 지낼 것을 강조합니다. 유교는 그 고유한 철학으로 만물의 조화를 꾀합니다. 헌데 그리스도교는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구원이 없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강조하고 있으니 이 얼마나 독선적이고 교만한 발언이랍니까?
하지만 이는 ‘예수님’을 올바로 조명하지 않은 탓입니다. 과연 예수님의 이름이라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올바로 생각하지 않은 채로 단순히 입으로 발음되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단어만을 섬기기에 일어나는 상황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른다, 그분의 이름을 받아들인다는 말은 단순히 외적 형식을 받아들이는 데에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그분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그분의 존재를 온전하게 받아들인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그분의 존재는 우리가 하느님에게로 다가가는 데에 반드시 필요한 관문이 됩니다.
사실 짧은 이야기가 될 수가 없습니다. 전체 구원의 역사를 조명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세상과 인간을 창조하시고 사랑을 쏟으시는 하느님 앞에서 인간은 자신의 길을 벗어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당신의 궁극적 사랑의 표현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드러내신 것이지요. 그분을 통해서 다시 우리가 하느님께로 돌아갈 수 있게 말입니다. 그분의 자비와 사랑은 모든 세대를 통틀어 영향을 미치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예수 시대 이전에 죽은 이들이라 할지라도 예수님 덕분에 크나큰 구원의 은총을 받게 되는 것이지요.
그러나 이 사실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다른 이들에게는 어리석은 일로 보일 뿐입니다. 왜냐면 그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외에는 별달리 바라볼 수 있는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살고자 하는 세상, 더 나아지고자 하는 세상에서 예수님은 ‘희생’의 가치를 가르치고 ‘영원한 생명’을 가르치고 있으니 그러한 것들은 세상 사람들의 시선에는 무의미한 것이나 다름 없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의 핵심은 ‘가장 드높으신 분의 희생으로 얻어진 가장 손쉬운 구원의 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손쉽다는 의미가 그냥 입술로만 ‘주님 주님’한다고 다 이루어진다는 것은 분명히 아닙니다.
믿는 이들, 그분의 이름을 믿는 이들은 당연히 자신들의 삶의 변화를 준비해야 합니다. 이전의 죄스런 삶에서 변화되기 시작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는 것이지요. 여전히 세속적인 삶 속에 파묻혀 살면서 단순히 그분의 이름을 부른다고 자신들의 구원이 택배 배달처럼 배송되는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적지 않은 이들이 예수를 떠납니다. 심지어는 교회 안에 있으면서도 그 마음은 예수님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진정한 자신의 구원자의 이름으로 고백하지 않는 이들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다투고, 싸우고, 이간질하고, 증오하고, 시기하고, 험담을 합니다. 그들은 영원한 상급에서 한참 멀리 떨어져 있는 이들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교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고백하고 그 이름 외에는 다른 구원이 없음을 선포합니다. 그러나 그런 선포를 하는 이들의 삶은 실로 본받을 만한 것이지요. 그들은 더는 죄를 짓지 못하는 이들입니다. 그들 안에 ‘악한 의도’가 사라져 있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사람들은 그런 그들을 더욱 증오하고 시기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이미 이전에도 그렇게 해 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행복하여라, 그분의 거룩한 이름 때문에 박해를 받는 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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