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들이 알아두셔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자비와 정의에 대한 것입니다. 하느님은 처음에 순수하게 이 세상을 만드셨고 온전히 ‘사랑’으로 그것을 돌보셨습니다. 마치 갓난아기가 태어난 것과 같습니다. 갓난아기는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고 말도 하지 못하기에 해 줄 수 있는 일은 사랑을 쏟는 것 뿐입니다. 그렇게 하느님은 세상 만물을 사랑하셨습니다.
하지만 아이의 지혜가 자라고 자신의 자유의지를 자신의 마음대로 표현할 즈음이 되면 그때부터 어른들은 두 가지 것으로 아이를 돌보게 됩니다. 하나는 자비이고 다른 하나는 정의입니다.
물론 처음에는 ‘자비’를 드러내어야 합니다. 온유와 사랑으로 아이가 스스로의 잘못을 깨닫고 뉘우치도록 도와주는 것이지요. 그러나 매번 그런 식의 방식에 아이가 익숙해져 버리면 그때부터는 ‘자비’를 자신의 권리라고 생각하고 오만방자해 질 수 있습니다. 그때에는 ‘정의’를 드러내어야 합니다. 아이의 잘못에 대한 합당한 책임을 추궁하는 것이지요.
우리의 시대는 ‘자비’의 시대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잊은 채로 살았고 하느님에게서 떨어진 생활을 영위해 왔습니다. 그럼에도 하느님은 당신의 ‘자비’로 우리를 돌보고 계신 것이지요. 다시 예언자를 보내고 다시 당신의 아들을 보내 우리를 돌아오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시대가 마감이 되는 순간에는 당신의 정의가 온 세상을 뒤덮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 앞에서 ‘자신이 행한 것들 때문에’ 두려워 떨게 됩니다.
이를 올바로 인식하지 못하고 마냥 이 세상이 제 뜻대로 돌아간다고 여전히 어둠에 빠져 있는 수많은 영혼들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직시해야 합니다. 행여 그런 영혼이 우리 자신이 아니게 되길 바랍니다. 그분의 정의는 반드시 돌아오게 됩니다. 그리고 그 때에 그분의 자비를 허비한 이들은 합당한 준비를 해야 할 것입니다.
과연 하느님의 정의는 어떠한 형태일까요? 아마 상상을 초월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영광에 뒤덮인 재림을 언급하셨습니다. 법정에서 심판관 앞에만 서도 초라해지는 우리들인데 과연 세상의 심판관 앞에 섰을 때에, 더군다나 그 심판관이 수도 없이 우리에게 기회를 주신 분일 때에 과연 우리는 그 앞에서 어떤 마음일까요?
그러나 이를 생각하기에 우리의 마음은 너무나 세상에 젖어 있습니다.
하지만 아이의 지혜가 자라고 자신의 자유의지를 자신의 마음대로 표현할 즈음이 되면 그때부터 어른들은 두 가지 것으로 아이를 돌보게 됩니다. 하나는 자비이고 다른 하나는 정의입니다.
물론 처음에는 ‘자비’를 드러내어야 합니다. 온유와 사랑으로 아이가 스스로의 잘못을 깨닫고 뉘우치도록 도와주는 것이지요. 그러나 매번 그런 식의 방식에 아이가 익숙해져 버리면 그때부터는 ‘자비’를 자신의 권리라고 생각하고 오만방자해 질 수 있습니다. 그때에는 ‘정의’를 드러내어야 합니다. 아이의 잘못에 대한 합당한 책임을 추궁하는 것이지요.
우리의 시대는 ‘자비’의 시대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잊은 채로 살았고 하느님에게서 떨어진 생활을 영위해 왔습니다. 그럼에도 하느님은 당신의 ‘자비’로 우리를 돌보고 계신 것이지요. 다시 예언자를 보내고 다시 당신의 아들을 보내 우리를 돌아오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시대가 마감이 되는 순간에는 당신의 정의가 온 세상을 뒤덮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 앞에서 ‘자신이 행한 것들 때문에’ 두려워 떨게 됩니다.
이를 올바로 인식하지 못하고 마냥 이 세상이 제 뜻대로 돌아간다고 여전히 어둠에 빠져 있는 수많은 영혼들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직시해야 합니다. 행여 그런 영혼이 우리 자신이 아니게 되길 바랍니다. 그분의 정의는 반드시 돌아오게 됩니다. 그리고 그 때에 그분의 자비를 허비한 이들은 합당한 준비를 해야 할 것입니다.
과연 하느님의 정의는 어떠한 형태일까요? 아마 상상을 초월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영광에 뒤덮인 재림을 언급하셨습니다. 법정에서 심판관 앞에만 서도 초라해지는 우리들인데 과연 세상의 심판관 앞에 섰을 때에, 더군다나 그 심판관이 수도 없이 우리에게 기회를 주신 분일 때에 과연 우리는 그 앞에서 어떤 마음일까요?
그러나 이를 생각하기에 우리의 마음은 너무나 세상에 젖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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