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최대한 비유를 통해서 설명하겠습니다.
선한 일을 신선한 빵이라고 생각하고 악한 일을 썩은 빵이라고 생각해 봅시다. 우리가 선한 일을 할 때마다 신선한 빵이 오른쪽에 쌓이고, 악한 일을 할 때마다 썩은 빵이 왼쪽에 쌓입니다. 우리는 계산을 이런 식으로 합니다. 그래서 신선한 빵이 10개이고, 썩은 빵이 8개면 우리는 10-8=2 라는 계산으로 2만큼의 선한 사람이 된다고 생각하지요. 지극히 ‘계산적인’ 사고방식입니다. 왜냐면 우리는 이 땅에서 이렇게 살아왔으니까요. 선한 일로 악한 일을 경감한다고 생각하고, 반대로 충분히 선한 일을 해 두면 악한일을 조금 하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런 계산법은 완전히 틀려 먹었습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 ‘의로움’을 창출해 내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전혀 마음이 없는데 의로움에 해당하는 행위를 한다고 의로워지는 게 아니라는 말이지요. 즉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으면서 주일미사에 나간다고 그 주일미사가 우리의 의로움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죄에 대해서도 우리는 오해를 합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예수님을 받아들일 때에 우리의 모든 오물, 썩은 빵들이 일순간에 사라집니다. 그 순간, 나에겐 죄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지요. 다만 죄의 결과만이 주변에 남아 있을 뿐입니다.
오히려 다음의 비유가 더 적절합니다. 나아가는 상처와 썩어가는 상처입니다. 나아가는 상처는 아무리 상처가 심해도 우리가 잘 보살피면 꾸준히 자가 치유를 계속해서 상처가 나을 것입니다. 하지만 썩어가는 상처는 아무리 상처가 미미해도 꾸준히 썩어가면 결국 온 몸을 죽여 버릴 것입니다.
보다 실제적인 예를 들지요. 누군가 심각한 범죄를 저질렀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행위를 진심으로 뉘우치고 다시는 이전의 과오로 돌아가지 않을 마음의 준비를 다집니다. 그러면 그의 영혼은 살 것입니다. 물론 그는 자신이 저지른 범죄의 결과물에 대해서는 이 땅에서 합당한 책임을 져야 하겠지요.
반대로 누군가는 아주 작은 악습을 지니고 있습니다. 술을 과하게 즐기는 것이 좋은 예가 되겠군요. 하지만 그는 이 악습을 전혀 개선할 생각이 없습니다. 결국 그는 이 악습으로 자신의 육신 생명을 위태롭게 할 것이고, 훗날 하느님 앞에 가서 그에 대해 합당한 말을 준비해야 할 것입니다. 그는 아무에게도 해를 끼친 적이 없겠지만 무엇보다도 자신의 생명을 지키는 일을 소홀히 한 셈입니다.
의로움과 죄를 눈에 드러나는 결과물로 지켜보려 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보다 내밀한 곳에서 의로움과 죄악이 이루어지는 셈입니다. 본당의 총회장직을 맡으면서 사람들의 위신과 존경을 받는 이가 실제로는 가정 안에서 폭군인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가 드러내는 모습은 모조리 가식일 뿐이지요. 의외로 이런 일은 자주 일어나고 있습니다. 참된 의로움은 인간이 조작하여 만들어내는 것이 아닙니다. 의로움은 하느님께서 선사하시는 것입니다. 죄악이라는 것은 특정 행위를 위반해서 이루어지는 게 아닙니다. 죄악은 하느님에게서 돌아서 있는 우리의 마음에서 비롯되는 모든 것들을 말하지요.
모쪼록 이를 이해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선한 일을 신선한 빵이라고 생각하고 악한 일을 썩은 빵이라고 생각해 봅시다. 우리가 선한 일을 할 때마다 신선한 빵이 오른쪽에 쌓이고, 악한 일을 할 때마다 썩은 빵이 왼쪽에 쌓입니다. 우리는 계산을 이런 식으로 합니다. 그래서 신선한 빵이 10개이고, 썩은 빵이 8개면 우리는 10-8=2 라는 계산으로 2만큼의 선한 사람이 된다고 생각하지요. 지극히 ‘계산적인’ 사고방식입니다. 왜냐면 우리는 이 땅에서 이렇게 살아왔으니까요. 선한 일로 악한 일을 경감한다고 생각하고, 반대로 충분히 선한 일을 해 두면 악한일을 조금 하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런 계산법은 완전히 틀려 먹었습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 ‘의로움’을 창출해 내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전혀 마음이 없는데 의로움에 해당하는 행위를 한다고 의로워지는 게 아니라는 말이지요. 즉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으면서 주일미사에 나간다고 그 주일미사가 우리의 의로움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죄에 대해서도 우리는 오해를 합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예수님을 받아들일 때에 우리의 모든 오물, 썩은 빵들이 일순간에 사라집니다. 그 순간, 나에겐 죄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지요. 다만 죄의 결과만이 주변에 남아 있을 뿐입니다.
오히려 다음의 비유가 더 적절합니다. 나아가는 상처와 썩어가는 상처입니다. 나아가는 상처는 아무리 상처가 심해도 우리가 잘 보살피면 꾸준히 자가 치유를 계속해서 상처가 나을 것입니다. 하지만 썩어가는 상처는 아무리 상처가 미미해도 꾸준히 썩어가면 결국 온 몸을 죽여 버릴 것입니다.
보다 실제적인 예를 들지요. 누군가 심각한 범죄를 저질렀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행위를 진심으로 뉘우치고 다시는 이전의 과오로 돌아가지 않을 마음의 준비를 다집니다. 그러면 그의 영혼은 살 것입니다. 물론 그는 자신이 저지른 범죄의 결과물에 대해서는 이 땅에서 합당한 책임을 져야 하겠지요.
반대로 누군가는 아주 작은 악습을 지니고 있습니다. 술을 과하게 즐기는 것이 좋은 예가 되겠군요. 하지만 그는 이 악습을 전혀 개선할 생각이 없습니다. 결국 그는 이 악습으로 자신의 육신 생명을 위태롭게 할 것이고, 훗날 하느님 앞에 가서 그에 대해 합당한 말을 준비해야 할 것입니다. 그는 아무에게도 해를 끼친 적이 없겠지만 무엇보다도 자신의 생명을 지키는 일을 소홀히 한 셈입니다.
의로움과 죄를 눈에 드러나는 결과물로 지켜보려 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보다 내밀한 곳에서 의로움과 죄악이 이루어지는 셈입니다. 본당의 총회장직을 맡으면서 사람들의 위신과 존경을 받는 이가 실제로는 가정 안에서 폭군인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가 드러내는 모습은 모조리 가식일 뿐이지요. 의외로 이런 일은 자주 일어나고 있습니다. 참된 의로움은 인간이 조작하여 만들어내는 것이 아닙니다. 의로움은 하느님께서 선사하시는 것입니다. 죄악이라는 것은 특정 행위를 위반해서 이루어지는 게 아닙니다. 죄악은 하느님에게서 돌아서 있는 우리의 마음에서 비롯되는 모든 것들을 말하지요.
모쪼록 이를 이해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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