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의 봉헌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 봅시다. 고대로부터 현인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이 엄청난 능력에 대해서 버거워했습니다. 물론 대부분의 사람은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도 별로 없지요. 그냥 살아갈 뿐이었습니다. 어디까지가 자신의 자유를 행사해야 할 영역이고 어디부터 자신의 본능에 묶여 사는 것인지 분별도 제대로 하지 못했지요. 그리고 이런 상황은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은 진지하게 고민하지 않고 살아갑니다. 그냥 하루하루를 살아나간다고 바쁘지요. 그러나 때로 문득 자신의 삶을 돌아보게 되면 지금 이대로는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닫지만 그렇다고 해서 마땅히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잘 모르는 셈이지요.
자유에 대한 인간의 추구는 뿌리깊은 것이었습니다. 인간은 과연 어디까지 자유로울 수 있을지에 대해서 현인들을 참으로 많은 고민을 했었습니다. 그러나 고대에는 사람들에게 ‘중심’이 주어져 있었습니다. 우리에게 영혼이 있고 하느님이 계신다는 것, 우리를 초월한 존재가 있다는 것은 당연한 바탕이었고 그 바탕 위에서 과연 우리의 자유를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를 고민하고 있었지요.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이러한 흐름이 깨어지게 됩니다. 인간은 신의 존재 자체를 의심하기 시작한 것이었지요. 그리고 우리의 영혼의 존재 여부도 의심스럽기 시작한 셈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선택을 해야 했습니다. 신의 존재를 받아들이고 그것을 바탕으로 모든 선택을 이루어 나갈지, 아니면 아예 신을 부정하는 것부터 시작할지를 선택해야 했지요. 그리고 그런 연구는 양측으로 이루어져 왔습니다. 신을 수용한 이들은 신을 바탕으로 모든 것을 정립했고, 신을 거부한 이들은 그들 나름대로의 질서가 필요했지요. 아무리 신이 없어도 이웃이 그저 자유로운 행위라며 이유없이 나의 뺨을 때리는 것은 자기들 마음에 들지 않았으니까요. 그렇게 세상의 법체계도 발전해 나간 셈입니다.
오늘날에는 이런 모든 흐름들이 이곳 저곳에서 짬뽕이 되고 있는 상황입니다. 심지어는 무신론 가톨릭 신자도 있고, 유신론 비신자도 있고, 도무지 어떤 줄기를 잡아야 할지 혼란한 중에 사람들은 힘겨워하다가 아예 ‘포기’를 해 버리고 말지요.
사람이 이것 저것 진지하게 고민하지 않으면 그때 따르게 되는 것이 ‘본능’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본능은 훌륭하게 작용을 했지요. 우리는 ‘생존’하기 위해서 살아가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것을 그 바탕 위에 구축을 해버렸지요. 그리고 이는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것이 되어 버렸습니다. ‘일단은 살아야 하기에’라는 것이 우리가 신봉하는 구호가 되었고, 동시에 변명거리가 되어 버렸습니다. 우리는 살아야 하기에 때로는 신앙생활을 소홀히 해도 면죄부를 받았으며 이것 저것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아도 일단 입에 밥이 들어올 일에만 헌신하고 있으면 별다른 문제 없는 사람으로 인정 받았지요.
사람들은 더욱 더 표면적인 반응에만 익숙해지게 되었습니다. 더는 자극할 거리가 없는 텔레비전은 갈수록 더욱 적나라한 욕구의 단면을 드러내고 있고, 우리는 슬랩스틱 코메디에 겨우 웃음을 터뜨리는 정도가 되었지요. 참된 기쁨은 날이 갈수록 우리에게서 멀어져만 간 셈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가운데에도 하느님은 당신의 자녀들을 꾸준히 찾고 부르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러한 세상 가운데 스스로 자유를 하느님께 내어 맡기고 그분의 부르심에 응답을 하고 있지요. 이를 단순히 사제 성소나 수도자 성소로 제한하지 않게 되기를 바랍니다. 이 부르심과 응답은 모두를 위해서 활짝 열려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하느님은 당신의 자녀들을 불러모으실 것이고 그들은 세상에 나아가 구조작업을 실시할 것입니다.
세상은 그들을 달갑게 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자신들의 어두움을 낱낱이 밝히면서, 익숙하지 않은 참된 빛을 향해서 이끌려고 하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그들을 환대하기는 커녕 그들을 시기하고 미워하고 배척하기가 일쑤였습니다. 그럼에도 하느님의 자녀들은 용기를 잃지 않았습니다. 왜냐면 하느님은 이미 그렇게 될 것을 알고 사전에 가르쳐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더욱 용기를 내어 세상을 향해서 파고 들어가는 중입니다.
자유를 봉헌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자유는 바로 ‘우리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덮씌워진 무언가가 아닙니다. 우리의 옷이 나를 규정하지 않고, 내가 차고 있는 시계가 나를 말해주지 않습니다. 나는 곧 나의 ‘자유’입니다. 나의 의지적 선택이야 말로 유일하게 ‘나 자신’이라고 표명할 수 있는 것이고 그 작업이 이루어지는 것이 바로 우리의 영혼이지요.
자유를 봉헌하여 자유를 얻는 사람이 되라는 말을 이 글을 이해하신 분이라면 더불어 이해할 수 있게 되리라 생각합니다. 여러분 자유의 자녀가 되십시오.
자유에 대한 인간의 추구는 뿌리깊은 것이었습니다. 인간은 과연 어디까지 자유로울 수 있을지에 대해서 현인들을 참으로 많은 고민을 했었습니다. 그러나 고대에는 사람들에게 ‘중심’이 주어져 있었습니다. 우리에게 영혼이 있고 하느님이 계신다는 것, 우리를 초월한 존재가 있다는 것은 당연한 바탕이었고 그 바탕 위에서 과연 우리의 자유를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를 고민하고 있었지요.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이러한 흐름이 깨어지게 됩니다. 인간은 신의 존재 자체를 의심하기 시작한 것이었지요. 그리고 우리의 영혼의 존재 여부도 의심스럽기 시작한 셈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선택을 해야 했습니다. 신의 존재를 받아들이고 그것을 바탕으로 모든 선택을 이루어 나갈지, 아니면 아예 신을 부정하는 것부터 시작할지를 선택해야 했지요. 그리고 그런 연구는 양측으로 이루어져 왔습니다. 신을 수용한 이들은 신을 바탕으로 모든 것을 정립했고, 신을 거부한 이들은 그들 나름대로의 질서가 필요했지요. 아무리 신이 없어도 이웃이 그저 자유로운 행위라며 이유없이 나의 뺨을 때리는 것은 자기들 마음에 들지 않았으니까요. 그렇게 세상의 법체계도 발전해 나간 셈입니다.
오늘날에는 이런 모든 흐름들이 이곳 저곳에서 짬뽕이 되고 있는 상황입니다. 심지어는 무신론 가톨릭 신자도 있고, 유신론 비신자도 있고, 도무지 어떤 줄기를 잡아야 할지 혼란한 중에 사람들은 힘겨워하다가 아예 ‘포기’를 해 버리고 말지요.
사람이 이것 저것 진지하게 고민하지 않으면 그때 따르게 되는 것이 ‘본능’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본능은 훌륭하게 작용을 했지요. 우리는 ‘생존’하기 위해서 살아가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것을 그 바탕 위에 구축을 해버렸지요. 그리고 이는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것이 되어 버렸습니다. ‘일단은 살아야 하기에’라는 것이 우리가 신봉하는 구호가 되었고, 동시에 변명거리가 되어 버렸습니다. 우리는 살아야 하기에 때로는 신앙생활을 소홀히 해도 면죄부를 받았으며 이것 저것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아도 일단 입에 밥이 들어올 일에만 헌신하고 있으면 별다른 문제 없는 사람으로 인정 받았지요.
사람들은 더욱 더 표면적인 반응에만 익숙해지게 되었습니다. 더는 자극할 거리가 없는 텔레비전은 갈수록 더욱 적나라한 욕구의 단면을 드러내고 있고, 우리는 슬랩스틱 코메디에 겨우 웃음을 터뜨리는 정도가 되었지요. 참된 기쁨은 날이 갈수록 우리에게서 멀어져만 간 셈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가운데에도 하느님은 당신의 자녀들을 꾸준히 찾고 부르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러한 세상 가운데 스스로 자유를 하느님께 내어 맡기고 그분의 부르심에 응답을 하고 있지요. 이를 단순히 사제 성소나 수도자 성소로 제한하지 않게 되기를 바랍니다. 이 부르심과 응답은 모두를 위해서 활짝 열려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하느님은 당신의 자녀들을 불러모으실 것이고 그들은 세상에 나아가 구조작업을 실시할 것입니다.
세상은 그들을 달갑게 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자신들의 어두움을 낱낱이 밝히면서, 익숙하지 않은 참된 빛을 향해서 이끌려고 하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그들을 환대하기는 커녕 그들을 시기하고 미워하고 배척하기가 일쑤였습니다. 그럼에도 하느님의 자녀들은 용기를 잃지 않았습니다. 왜냐면 하느님은 이미 그렇게 될 것을 알고 사전에 가르쳐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더욱 용기를 내어 세상을 향해서 파고 들어가는 중입니다.
자유를 봉헌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자유는 바로 ‘우리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덮씌워진 무언가가 아닙니다. 우리의 옷이 나를 규정하지 않고, 내가 차고 있는 시계가 나를 말해주지 않습니다. 나는 곧 나의 ‘자유’입니다. 나의 의지적 선택이야 말로 유일하게 ‘나 자신’이라고 표명할 수 있는 것이고 그 작업이 이루어지는 것이 바로 우리의 영혼이지요.
자유를 봉헌하여 자유를 얻는 사람이 되라는 말을 이 글을 이해하신 분이라면 더불어 이해할 수 있게 되리라 생각합니다. 여러분 자유의 자녀가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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