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은 주인보다 높지 않고, 파견된 이는 파견한 이보다 높지 않다.(요한 13,16)
사제 서품식 때에 후보자들은 제대 앞에 엎어집니다. 자신을 온전히 내어 바치겠다는 상징이지요. 가장 낮은 자세로 봉사하겠다는 의미입니다. 우리 주님이 쓰러진 모습 그대로 하느님의 은총을 구하며 사람들 사이에서 쓰러진 자로서 봉사하겠다는 다짐입니다.
이는 단순히 우리 사제들의 이상향이 아닙니다. 모든 신앙인들이 도달해야 할 위치인 셈이지요. 모든 신앙인들은 예수님의 모습을 본받아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높은 자리를 좋아합니다. 마치 예수님의 제자들이 자기들 중에 누가 제일 높은 사람인가로 다툰 것처럼 우리 가운데 가장 높은 자리를 찾아서 그 자리를 차지하려고 합니다.
언제일까요? 우리가 예수님이 처했던 자리를 이해하게 되는 때는 언제가 될까요?
문제는 ‘시간’이 아닙니다. 문제는 우리 마음 깊은 곳의 ‘회개’에 있습니다. 우리는 놓치기 싫은 거지요. 우리는 낮아지기 싫은 셈입니다. 우리의 마음 깊은 곳에는 높은 곳을 선호하는 마음을 그대로 둔 채로 잠시 낮아져본 셈이지요. 우리의 마음 근본에는 가장 낮은 자리는 가장 낮은 자리일 뿐입니다. 가장 낮은 자리가 가장 높은 자리로 보이지 않는 것이지요.
우리는 지배하고 싶어하고, 우리가 우선이 되고 싶어합니다. 능력이 되는 선에서는 최고를 취하고 싶어하고 가능한 한 높은 자리에 오르기를 바라지요. 우리에게 어린 아기가 되어 다가오시고 가장 미천한 죽음을 맞으신 예수님의 가르침은 아직 요원할 뿐입니다.
사제 서품식 때에 후보자들은 제대 앞에 엎어집니다. 자신을 온전히 내어 바치겠다는 상징이지요. 가장 낮은 자세로 봉사하겠다는 의미입니다. 우리 주님이 쓰러진 모습 그대로 하느님의 은총을 구하며 사람들 사이에서 쓰러진 자로서 봉사하겠다는 다짐입니다.
이는 단순히 우리 사제들의 이상향이 아닙니다. 모든 신앙인들이 도달해야 할 위치인 셈이지요. 모든 신앙인들은 예수님의 모습을 본받아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높은 자리를 좋아합니다. 마치 예수님의 제자들이 자기들 중에 누가 제일 높은 사람인가로 다툰 것처럼 우리 가운데 가장 높은 자리를 찾아서 그 자리를 차지하려고 합니다.
언제일까요? 우리가 예수님이 처했던 자리를 이해하게 되는 때는 언제가 될까요?
문제는 ‘시간’이 아닙니다. 문제는 우리 마음 깊은 곳의 ‘회개’에 있습니다. 우리는 놓치기 싫은 거지요. 우리는 낮아지기 싫은 셈입니다. 우리의 마음 깊은 곳에는 높은 곳을 선호하는 마음을 그대로 둔 채로 잠시 낮아져본 셈이지요. 우리의 마음 근본에는 가장 낮은 자리는 가장 낮은 자리일 뿐입니다. 가장 낮은 자리가 가장 높은 자리로 보이지 않는 것이지요.
우리는 지배하고 싶어하고, 우리가 우선이 되고 싶어합니다. 능력이 되는 선에서는 최고를 취하고 싶어하고 가능한 한 높은 자리에 오르기를 바라지요. 우리에게 어린 아기가 되어 다가오시고 가장 미천한 죽음을 맞으신 예수님의 가르침은 아직 요원할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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