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하고 싶은 걸 합니다. 마치 자석과도 같아서 끌리는 것을 따라갑니다. 아닌 척 할 수는 있지만 궁극적으로 내면의 근본이 원하는 걸 속일 수는 없습니다. 결국엔 제가 좋아하는 걸 따라갈 뿐입니다.
그러는 동안 우리 앞엔 여러 가지 예시들이 펼쳐집니다. 실제적인 예를 통해서 교육이 이루어지는 셈이지요. 여러 가지 삶의 모습들이 나열되고 그들이 이루어낸 것과 실패한 것이 펼쳐집니다. 보고 배우라는 것이지요.
하지만 그 수많은 예를 바라보면서도 전혀 배우지 못하는 이들이 엄청나게 많습니다. 보고 또 보아도 알지 못하고 듣고 또 들어도 알지 못해 그들의 마음은 갈수록 닫혀져 갑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결국 자신이 가장 하고 싶은 걸 하게 됩니다.
과연 무엇이 하고 싶을까요?
우리가 진정으로 솔직해질 수 있다면 우리는 스스로를 살피고 다음과 같은 두가지 방향성을 찾아낼 것입니다. 나 자신을 향한 방향과 하느님을 향한 방향이지요. 하지만 많은 경우에 우리는 스스로를 속이기 일쑤입니다. 즉, 하느님을 향한다고 하면서 자기 자신을 향해 있는 경우가 많지요.
거의 대부분의 사람은 자기 자신을 향해서 방향지워져 있습니다. 이것이 인류의 원죄인 셈이지요. 하느님을 모르고 자기 자신에게 집중되어 있는 상태. 우리가 세례를 받으면 바로 이 원죄를 부수고 ‘하느님’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물론 그 뒤에는 저마다의 죄가 시작이 되지요. 하느님의 전능함과 선하심을 알면서도 거부하는 죄들이 차곡 차곡 쌓이기 시작하는 셈입니다. 하지만 하느님은 그마저도 치료제를 마련하셨으니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겠다는 굳은 다짐과 더불어 그분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이고 따라가기 시작할 때에 우리의 죄는 사라지고 맙니다. 하지만 인류는 그마저도 거부하고 있지요.
결국 대부분의 사람들은 ‘저 하고 싶을 대로’ 하게 되는 것입니다. 단순히 세례를 받았는가 아닌가의 문제가 아닙니다. 단순히 가톨릭 신자인가 아닌가의 문제가 아니지요. 사람들은 결국 자기 하고 싶은 대로 살면서 하느님이 하고 싶은 것에서 멀어져 살아가지요.
‘하느님은 무엇을 하고 싶으실까?’를 고민하는 데에서 진정한 신앙이 시작됩니다. 그 고민 자체로 우리는 하느님의 존재를 인정함과 동시에 하느님의 뜻에 동참하기 시작하는 것이지요.
하느님께서 하고 싶으신 것을 찾는 것을 ‘지혜’라고 합니다. 왜냐 하면 하느님은 엄청난 지혜로움 속에 모든 것을 이루고 계시기 때문에 우리가 그분의 뜻을 찾아내면 낼수록 우리 안에도 그 지혜가 깃들게 되는 것이지요.
그에 반해 세상 안에서의 똑똑함은 ‘영리함’이라고 부릅니다. 아무리 사악한 행위도 영리한 행위가 될 수 있습니다. 어느 직원이 자신의 영리함으로 회사의 사장을 속이고 물건을 빼돌리고 그 물건을 팔아서 돈을 벌 수 있습니다. 그것은 지극히 ‘영리한’ 행위이지요. 하지만 그것은 ‘지혜로운’ 행위가 아닙니다. 사람들은 갈수록 영리해져가는 한편 하느님의 지혜를 잃어가고 있습니다. 지혜는 ‘인내’이며, 지혜는 ‘사랑’이고, 지혜는 ‘겸손’이며, 지혜는 ‘기쁨’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제 욕구를 채우는 영리함을 지혜로 포장하여 다른 이들에게 전파하고 사람들은 인생의 처세술을 배우는 데에 골몰하지만 하느님의 뜻을 배우는 데에는 흥미를 잃고 맙니다.
결국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자신이 아무리 하느님을 원하는 척 해 보아야 그 마음 깊은 곳의 방향을 무시할 수 없습니다. 반대로 하느님을 간절히 바라는 사람이 세상 안에서 모든 일과 사물들을 접하고 살아가지만 그 마음 깊은 곳의 영원에 대한 열망을 지울 수도 없는 셈입니다. 결국 사람들은 제가 원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우리가 육신을 벗는 날, 그 날에 두 가지 일이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하나는 육신과 더불어 무너지는 것을 바라보면서 착잡한 심정을 느끼게 될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 동안 숨겨져 있던 것이 환히 드러나면서 ‘절망’, 또는 ‘환희’를 느끼게 됩니다. 절망을 느끼게 될 자들은 하느님을 거부해 왔던 자들이고 환희를 느끼게 될 자들은 하느님을 사랑해 왔던 자들입니다. 그 밖의 모든 것은 육신과 더불어 벗어 던지게 됩니다.
세상에 머무는 동안 시간이 많다고 생각하겠지만 의외로 우리에게 허락된 시간은 영원 안에서 불과 얼마 되지 않는 시간입니다. 그 시간 동안 우리가 무엇을 할 것인가 하는 것은 우리의 선택에 달린 문제입니다. 아무리 힘들고 고달픈 시간도 지나가게 마련이고, 반대로 정말 편안하고 안락함이 가득한 시간도 지나가게 마련입니다. 그리고 그 뒤에는 ‘영원’이 시작되지요. 이 영원을 떠올리는 것, 그 안에서 우리의 진정한 처소를 염려하는 것이야말로 바로 ‘지혜’의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는 동안 우리 앞엔 여러 가지 예시들이 펼쳐집니다. 실제적인 예를 통해서 교육이 이루어지는 셈이지요. 여러 가지 삶의 모습들이 나열되고 그들이 이루어낸 것과 실패한 것이 펼쳐집니다. 보고 배우라는 것이지요.
하지만 그 수많은 예를 바라보면서도 전혀 배우지 못하는 이들이 엄청나게 많습니다. 보고 또 보아도 알지 못하고 듣고 또 들어도 알지 못해 그들의 마음은 갈수록 닫혀져 갑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결국 자신이 가장 하고 싶은 걸 하게 됩니다.
과연 무엇이 하고 싶을까요?
우리가 진정으로 솔직해질 수 있다면 우리는 스스로를 살피고 다음과 같은 두가지 방향성을 찾아낼 것입니다. 나 자신을 향한 방향과 하느님을 향한 방향이지요. 하지만 많은 경우에 우리는 스스로를 속이기 일쑤입니다. 즉, 하느님을 향한다고 하면서 자기 자신을 향해 있는 경우가 많지요.
거의 대부분의 사람은 자기 자신을 향해서 방향지워져 있습니다. 이것이 인류의 원죄인 셈이지요. 하느님을 모르고 자기 자신에게 집중되어 있는 상태. 우리가 세례를 받으면 바로 이 원죄를 부수고 ‘하느님’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물론 그 뒤에는 저마다의 죄가 시작이 되지요. 하느님의 전능함과 선하심을 알면서도 거부하는 죄들이 차곡 차곡 쌓이기 시작하는 셈입니다. 하지만 하느님은 그마저도 치료제를 마련하셨으니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겠다는 굳은 다짐과 더불어 그분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이고 따라가기 시작할 때에 우리의 죄는 사라지고 맙니다. 하지만 인류는 그마저도 거부하고 있지요.
결국 대부분의 사람들은 ‘저 하고 싶을 대로’ 하게 되는 것입니다. 단순히 세례를 받았는가 아닌가의 문제가 아닙니다. 단순히 가톨릭 신자인가 아닌가의 문제가 아니지요. 사람들은 결국 자기 하고 싶은 대로 살면서 하느님이 하고 싶은 것에서 멀어져 살아가지요.
‘하느님은 무엇을 하고 싶으실까?’를 고민하는 데에서 진정한 신앙이 시작됩니다. 그 고민 자체로 우리는 하느님의 존재를 인정함과 동시에 하느님의 뜻에 동참하기 시작하는 것이지요.
하느님께서 하고 싶으신 것을 찾는 것을 ‘지혜’라고 합니다. 왜냐 하면 하느님은 엄청난 지혜로움 속에 모든 것을 이루고 계시기 때문에 우리가 그분의 뜻을 찾아내면 낼수록 우리 안에도 그 지혜가 깃들게 되는 것이지요.
그에 반해 세상 안에서의 똑똑함은 ‘영리함’이라고 부릅니다. 아무리 사악한 행위도 영리한 행위가 될 수 있습니다. 어느 직원이 자신의 영리함으로 회사의 사장을 속이고 물건을 빼돌리고 그 물건을 팔아서 돈을 벌 수 있습니다. 그것은 지극히 ‘영리한’ 행위이지요. 하지만 그것은 ‘지혜로운’ 행위가 아닙니다. 사람들은 갈수록 영리해져가는 한편 하느님의 지혜를 잃어가고 있습니다. 지혜는 ‘인내’이며, 지혜는 ‘사랑’이고, 지혜는 ‘겸손’이며, 지혜는 ‘기쁨’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제 욕구를 채우는 영리함을 지혜로 포장하여 다른 이들에게 전파하고 사람들은 인생의 처세술을 배우는 데에 골몰하지만 하느님의 뜻을 배우는 데에는 흥미를 잃고 맙니다.
결국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자신이 아무리 하느님을 원하는 척 해 보아야 그 마음 깊은 곳의 방향을 무시할 수 없습니다. 반대로 하느님을 간절히 바라는 사람이 세상 안에서 모든 일과 사물들을 접하고 살아가지만 그 마음 깊은 곳의 영원에 대한 열망을 지울 수도 없는 셈입니다. 결국 사람들은 제가 원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우리가 육신을 벗는 날, 그 날에 두 가지 일이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하나는 육신과 더불어 무너지는 것을 바라보면서 착잡한 심정을 느끼게 될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 동안 숨겨져 있던 것이 환히 드러나면서 ‘절망’, 또는 ‘환희’를 느끼게 됩니다. 절망을 느끼게 될 자들은 하느님을 거부해 왔던 자들이고 환희를 느끼게 될 자들은 하느님을 사랑해 왔던 자들입니다. 그 밖의 모든 것은 육신과 더불어 벗어 던지게 됩니다.
세상에 머무는 동안 시간이 많다고 생각하겠지만 의외로 우리에게 허락된 시간은 영원 안에서 불과 얼마 되지 않는 시간입니다. 그 시간 동안 우리가 무엇을 할 것인가 하는 것은 우리의 선택에 달린 문제입니다. 아무리 힘들고 고달픈 시간도 지나가게 마련이고, 반대로 정말 편안하고 안락함이 가득한 시간도 지나가게 마련입니다. 그리고 그 뒤에는 ‘영원’이 시작되지요. 이 영원을 떠올리는 것, 그 안에서 우리의 진정한 처소를 염려하는 것이야말로 바로 ‘지혜’의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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