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희망은 이 땅이 ‘완벽’해 지기를 바라는 것이 아닙니다. 한 번 깨어진 그릇은 다시 열심히 아교로 붙인다 하더라도 그 부서진 흔적이 남아 있게 마련이니까요. 우리의 희망은 하느님이 선사하시는 새 하늘과 새 땅입니다. 아직 이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그 노력은 가치있는 일이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세상을 완벽하게 바꾸어 놓겠다는 것은 ‘과욕’에 속하는 것입니다.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능력이 허락하는 선에서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리고 나머지의 것은 하느님에게 맡기는 것이지요. 하지만 무엇을 위해 최선을 다 할 것인가는 참으로 중요한 문제입니다. 우리가 근본 원인을 해소하지 않은 채로 외적인 것을 아무리 수정해 봐야, 그 문제는 다시 일어나게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악한 자들에게 맞서서 그들이 하는 일을 제지하는 것은 때에 따라서 필요한 일이지만 보다 근본적인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것은 악한 자들의 악을 선으로 뒤바꾸려는 노력이지요.
집안에서 아내를 패는 남편을 경찰을 불러 제압할 수 있지만 경찰이 가고 나면 다시 아내를 패기 시작한다면 그것은 해결책이 아닌 것입니다. 경찰은 잠깐 왔다 가는 이들이고 결국 아내는 남편과 사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보다 근본적인 문제를 들여다보고 그것을 변화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으면 우리의 노력들은 엉뚱한 것이 되기 일쑤입니다.
여당이 나쁘다고 야당을 지원하여 야당이 여당이 되고나면, 다시 그 여당이 나쁘게 됩니다. 우리는 아랫돌을 빼서 윗돌을 괴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와야 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이런 변화는 바로 우리의 마음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과연 우리의 마음 근본에는 하느님을 향한 마음이 존재할까요? 하느님을 향한다는 것이 행여 형식적으로 그치고 실제로는 ‘내가 원하는 것’을 향하고 있지 않을까요? 저는 개인적으로 이런 어긋나 있는 이들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의 외형은 하느님을 향해서 나아가려고 노력하는 것 같지만, 여전히 그들 안에는 ‘자신을 향한 방향성’을 올바르게 수정하지 못한 상태였던 것이지요.
우리는 여전히 우리를 사랑합니다. 이는 무엇을 표현하는가에 따라서 필요한 일이기도 하고 전혀 엉뚱한 의미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사랑해야 합니다. 그래야 남도 사랑할 수 있지요. 하지만 우리는 우리에게 집중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향해서 나아가는 길에 우리를 사랑해야 하는 것입니다. 필요하다면 하느님을 위해서 우리 자신의 소중한 것도 거부해야 할 때도 다가오는 것이지요.
하지만 이는 저마다 다른 형태로 다가옵니다. 그래서 무턱대고 남을 따라하는 것은 상당히 위험할 수 있습니다. 마더 데레사가 인도에 가서 가난한 이들을 위해서 헌신했다고 나도 그렇게 한다는 것은 ‘과용’입니다. 나는 지금 사랑하는 아내가 있고 아이들이 있고 직장 생활을 하고 있으면 그 안에서 하느님의 길을 찾으면 되는 것입니다. 몇몇 성인들의 일순간의 회개의 과정을 보면서 분별없이 나도 저렇게 따라해 보겠다고 하는 것은 상당히 위험한 일이 될 수 있습니다.
가장 먼저는 지금 있는 자리를 충실히 메꿔 나가시기 바랍니다. 작은 것에 충실하는 사람에게 큰 것도 허락되는 법이니까요. 지금 머무는 자리도 엉망으로 만드는 주제에 성인의 삶을 탐내는 것은 그야말로 나 자신이 바라는 것에 집중된 이기성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에 불과합니다.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그 노력은 가치있는 일이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세상을 완벽하게 바꾸어 놓겠다는 것은 ‘과욕’에 속하는 것입니다.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능력이 허락하는 선에서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리고 나머지의 것은 하느님에게 맡기는 것이지요. 하지만 무엇을 위해 최선을 다 할 것인가는 참으로 중요한 문제입니다. 우리가 근본 원인을 해소하지 않은 채로 외적인 것을 아무리 수정해 봐야, 그 문제는 다시 일어나게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악한 자들에게 맞서서 그들이 하는 일을 제지하는 것은 때에 따라서 필요한 일이지만 보다 근본적인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것은 악한 자들의 악을 선으로 뒤바꾸려는 노력이지요.
집안에서 아내를 패는 남편을 경찰을 불러 제압할 수 있지만 경찰이 가고 나면 다시 아내를 패기 시작한다면 그것은 해결책이 아닌 것입니다. 경찰은 잠깐 왔다 가는 이들이고 결국 아내는 남편과 사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보다 근본적인 문제를 들여다보고 그것을 변화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으면 우리의 노력들은 엉뚱한 것이 되기 일쑤입니다.
여당이 나쁘다고 야당을 지원하여 야당이 여당이 되고나면, 다시 그 여당이 나쁘게 됩니다. 우리는 아랫돌을 빼서 윗돌을 괴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와야 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이런 변화는 바로 우리의 마음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과연 우리의 마음 근본에는 하느님을 향한 마음이 존재할까요? 하느님을 향한다는 것이 행여 형식적으로 그치고 실제로는 ‘내가 원하는 것’을 향하고 있지 않을까요? 저는 개인적으로 이런 어긋나 있는 이들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의 외형은 하느님을 향해서 나아가려고 노력하는 것 같지만, 여전히 그들 안에는 ‘자신을 향한 방향성’을 올바르게 수정하지 못한 상태였던 것이지요.
우리는 여전히 우리를 사랑합니다. 이는 무엇을 표현하는가에 따라서 필요한 일이기도 하고 전혀 엉뚱한 의미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사랑해야 합니다. 그래야 남도 사랑할 수 있지요. 하지만 우리는 우리에게 집중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향해서 나아가는 길에 우리를 사랑해야 하는 것입니다. 필요하다면 하느님을 위해서 우리 자신의 소중한 것도 거부해야 할 때도 다가오는 것이지요.
하지만 이는 저마다 다른 형태로 다가옵니다. 그래서 무턱대고 남을 따라하는 것은 상당히 위험할 수 있습니다. 마더 데레사가 인도에 가서 가난한 이들을 위해서 헌신했다고 나도 그렇게 한다는 것은 ‘과용’입니다. 나는 지금 사랑하는 아내가 있고 아이들이 있고 직장 생활을 하고 있으면 그 안에서 하느님의 길을 찾으면 되는 것입니다. 몇몇 성인들의 일순간의 회개의 과정을 보면서 분별없이 나도 저렇게 따라해 보겠다고 하는 것은 상당히 위험한 일이 될 수 있습니다.
가장 먼저는 지금 있는 자리를 충실히 메꿔 나가시기 바랍니다. 작은 것에 충실하는 사람에게 큰 것도 허락되는 법이니까요. 지금 머무는 자리도 엉망으로 만드는 주제에 성인의 삶을 탐내는 것은 그야말로 나 자신이 바라는 것에 집중된 이기성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에 불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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