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일하게 용서받지 못하는 단 하나의 죄입니다. 사실 이미 설명을 드렸지만 다시 한 번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성령을 거스르는 죄에 대해서 알기 위해서는 ‘성령’에 대해서 알아둘 필요가 있습니다. 과연 성령은 무엇일까요? 성령이라는 것은 마치 우리가 손에 쥘 수 있는 무엇일까요? 그게 아니라는 것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성령은 과연 무엇일까요?
사실 성령은 온전히 파악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온전히 알 수 없듯이 마찬가지로 성령에 대해서도 온전히 알 수 없습니다. 성령 역시도 하느님이시기 때문이지요. 작은 컵으로는 절대로 절대로 절대로 바닷물을 다 담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성령에 대해서 아는 것은 불가능할까요? 비록 성령을 온전히 다 담아내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 사실이지만 우리는 성령을 알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좋은 나무는 좋은 열매를 맺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성령을 지닌 이들을 만나면 우리는 성령의 활동을 체험할 수 있게 됩니다.
거룩한 영, 성령이 유일하게 안식처로 찾으시는 곳은 인간의 영혼입니다. 하지만 그분은 바람, 또는 불과 같아서 활동할 때에만 느껴지고 가까이 다가서서 손으로 쥐려 하면 쥘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분이 직접적으로 활동하실 때에 우리는 그분을 체험할 수 있게 됩니다.
여기에서 주의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과연 성령의 체험을 어떻게 규정할까요? 이 또한 논란이 많은 부분입니다. 흔히들 착각하기 쉬운 것이 ‘성령의 활동’을 ‘성령 기도회의 활동’으로 착각하는 것이지요. 성령 기도회, 또는 성령 부흥회에서 일어나는 여러가지 일들은 성령의 수많은 것들 중에서 단면인 경우가 많고, 또 많이 꾸며진 경우도 많습니다. 헌데 가톨릭 신앙의 초보자들은 ‘성령’이라고 하면 무턱대고 눈에 띄는 활동을 찾게 되고, 그래서 얻어 만나게 되는 것이 ‘성령 기도회’의 주된 활동들인 것입니다. 이상한 언어를 한다고 ‘방언’을 하고, 안수를 하면 쓰러져야 하고, 기도는 음악으로 가득차야 하고, 평소의 신앙생활에서 하지 않던 행동들을 어떻게든 드러내야 ‘성령’이 함께 하신다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성령은 침묵 속에서도 함께 하시고, 성령은 아기를 사랑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는 엄마의 영혼에도 함께 하시고, 성령은 묵묵히 강론을 준비하는 사제의 영혼에도 함께 하십니다. 성령의 활동을 무조건 활활 타오르는 무엇으로 규정하는 것은 큰 실수입니다. 그것은 침체된 가톨릭 교회에 색다름을 불어넣기 위한 하나의 단면일 뿐, 그것이 곧 성령의 활동이 될 수는 없는 노릇이지요.
그럼 성령의 활동은 무엇일까요?
사람을 하느님에게 다가가게 하는 모든 활동이 성령의 활동입니다. 성령은 우리 마음 안에 들어와서 ‘회개’를 일으키고, ‘인내’하게 하고, ‘용기’를 가지게 하는 등등의 모든 활동을 합니다. 그래서 죄인들도 성령을 지닐 수 있고, 성인들도 성령을 지닐 수 있습니다. 즉, 결론을 말하자면 우리는 누가 어떤 형태로 성령을 지니고 있는지 알 수 없다는 것이지요. 따라서 우리가 성령을 거스르지 않으려면 ‘그 누구도 심판하지 말아야 합니다.’
성령을 거스르지 않는 죄는, 우리가 함부로 분별할 수 없는 모든 행위에 대해서 그 사람을 이미 심판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물론 전혀 다른 종류의 행동도 있습니다. 타인에게 명백하게 악을 저지르는 사람을 두고 성령 안에 머물러 있다고 할 수도 없는 노릇입니다. 아무 잘못도 없는 아기를 때리는 사람을 두고 ‘우리는 그를 심판할 수 없어, 그에게도 성령이 있을 수 있으니까 말야.’라고 하면서 지켜볼 게 아니라 그 행동을 막아야 하는 것이지요.
다시 핵심을 정리하겠습니다. 성령은 그 실체를 온전히 파악할 수 없으나 그가 맺는 열매로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열매는 아무리 죄인이라도 가능성이 존재하기에 우리는 한 사람에 대해서 심판하는 일을 유보해야 합니다. 성령이 활동하고 있는 그 상황에 그를 거슬러 행동하는 것이 바로 성령을 거스르는 죄이기 때문입니다.
성령을 거스르는 죄에 대해서 알기 위해서는 ‘성령’에 대해서 알아둘 필요가 있습니다. 과연 성령은 무엇일까요? 성령이라는 것은 마치 우리가 손에 쥘 수 있는 무엇일까요? 그게 아니라는 것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성령은 과연 무엇일까요?
사실 성령은 온전히 파악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온전히 알 수 없듯이 마찬가지로 성령에 대해서도 온전히 알 수 없습니다. 성령 역시도 하느님이시기 때문이지요. 작은 컵으로는 절대로 절대로 절대로 바닷물을 다 담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성령에 대해서 아는 것은 불가능할까요? 비록 성령을 온전히 다 담아내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 사실이지만 우리는 성령을 알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좋은 나무는 좋은 열매를 맺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성령을 지닌 이들을 만나면 우리는 성령의 활동을 체험할 수 있게 됩니다.
거룩한 영, 성령이 유일하게 안식처로 찾으시는 곳은 인간의 영혼입니다. 하지만 그분은 바람, 또는 불과 같아서 활동할 때에만 느껴지고 가까이 다가서서 손으로 쥐려 하면 쥘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분이 직접적으로 활동하실 때에 우리는 그분을 체험할 수 있게 됩니다.
여기에서 주의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과연 성령의 체험을 어떻게 규정할까요? 이 또한 논란이 많은 부분입니다. 흔히들 착각하기 쉬운 것이 ‘성령의 활동’을 ‘성령 기도회의 활동’으로 착각하는 것이지요. 성령 기도회, 또는 성령 부흥회에서 일어나는 여러가지 일들은 성령의 수많은 것들 중에서 단면인 경우가 많고, 또 많이 꾸며진 경우도 많습니다. 헌데 가톨릭 신앙의 초보자들은 ‘성령’이라고 하면 무턱대고 눈에 띄는 활동을 찾게 되고, 그래서 얻어 만나게 되는 것이 ‘성령 기도회’의 주된 활동들인 것입니다. 이상한 언어를 한다고 ‘방언’을 하고, 안수를 하면 쓰러져야 하고, 기도는 음악으로 가득차야 하고, 평소의 신앙생활에서 하지 않던 행동들을 어떻게든 드러내야 ‘성령’이 함께 하신다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성령은 침묵 속에서도 함께 하시고, 성령은 아기를 사랑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는 엄마의 영혼에도 함께 하시고, 성령은 묵묵히 강론을 준비하는 사제의 영혼에도 함께 하십니다. 성령의 활동을 무조건 활활 타오르는 무엇으로 규정하는 것은 큰 실수입니다. 그것은 침체된 가톨릭 교회에 색다름을 불어넣기 위한 하나의 단면일 뿐, 그것이 곧 성령의 활동이 될 수는 없는 노릇이지요.
그럼 성령의 활동은 무엇일까요?
사람을 하느님에게 다가가게 하는 모든 활동이 성령의 활동입니다. 성령은 우리 마음 안에 들어와서 ‘회개’를 일으키고, ‘인내’하게 하고, ‘용기’를 가지게 하는 등등의 모든 활동을 합니다. 그래서 죄인들도 성령을 지닐 수 있고, 성인들도 성령을 지닐 수 있습니다. 즉, 결론을 말하자면 우리는 누가 어떤 형태로 성령을 지니고 있는지 알 수 없다는 것이지요. 따라서 우리가 성령을 거스르지 않으려면 ‘그 누구도 심판하지 말아야 합니다.’
성령을 거스르지 않는 죄는, 우리가 함부로 분별할 수 없는 모든 행위에 대해서 그 사람을 이미 심판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물론 전혀 다른 종류의 행동도 있습니다. 타인에게 명백하게 악을 저지르는 사람을 두고 성령 안에 머물러 있다고 할 수도 없는 노릇입니다. 아무 잘못도 없는 아기를 때리는 사람을 두고 ‘우리는 그를 심판할 수 없어, 그에게도 성령이 있을 수 있으니까 말야.’라고 하면서 지켜볼 게 아니라 그 행동을 막아야 하는 것이지요.
다시 핵심을 정리하겠습니다. 성령은 그 실체를 온전히 파악할 수 없으나 그가 맺는 열매로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열매는 아무리 죄인이라도 가능성이 존재하기에 우리는 한 사람에 대해서 심판하는 일을 유보해야 합니다. 성령이 활동하고 있는 그 상황에 그를 거슬러 행동하는 것이 바로 성령을 거스르는 죄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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