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가계 치유라는 것이 유행처럼 번지곤 했지요. 오염된 뿌리를 치유한다는 개념이었던 것 같은데 결국 얼마 못가 제지 당하였습니다. 들으면 언뜻 맞는 말인 것도 같지만 죄에 대한 그릇된 이해를 바탕으로 시작된 행동이었지요.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 가계 치유를 한다면서 나서는 이들의 진의가 문제였습니다.
사실 누군가 고해성사만 제대로 잘 봐도 그 은총이 후대를 이어 내려가게 됩니다. 아버지가 술을 절제하고 아내를 사랑하고, 더는 돈으로 다투지 않고 아이들을 잘 돌보면 그 은혜로움이 대를 이어 내려가고 그 가족, 그 가계는 축복을 받게 됩니다. 결국 우리가 우리 신앙의 본질을 제대로만 살아가도 필요한 은총은 다 주어진다는 의미이지요.
하지만 그것이 안되니 사람들은 늘 ‘차선책’을 찾게 되고, 그래서 어긋난 성모 신심, 어긋난 신심행위들이 난무하게 되는 것입니다. 본질을 알지 못하고 정도를 걷기 싫으니 자꾸 엇나가기만 하는 거지요.
슈퍼에 과자는 사러 가고 싶은데 직접 걸어가기는 싫고, 그래서 동생을 시키는데 동생이라고 사러 가고 싶은 것도 아니고, 그래서 돈을 더 내고 동생을 꼬시는데 돈은 주기 싫고, 그래서 결국 동생을 협박해서 과자를 사러 보내는 겁니다. 그리고 동생은 그 일로 인해서 앙심을 품고 반드시 어떤 종류든 복수를 다짐하게 되는 거구요. 정도를 걸으면 조용할 일을 우리는 자꾸만 복잡하게 만드는 것이지요. 고해성사로 진심으로 뉘우치고 회개하면 될 것을 자꾸 엉뚱한 속죄의 길을 찾다 보니 가산도 탕진하고 정작 얻어야 할 속죄도 얻지 못하는 겁니다.
사실 누군가 고해성사만 제대로 잘 봐도 그 은총이 후대를 이어 내려가게 됩니다. 아버지가 술을 절제하고 아내를 사랑하고, 더는 돈으로 다투지 않고 아이들을 잘 돌보면 그 은혜로움이 대를 이어 내려가고 그 가족, 그 가계는 축복을 받게 됩니다. 결국 우리가 우리 신앙의 본질을 제대로만 살아가도 필요한 은총은 다 주어진다는 의미이지요.
하지만 그것이 안되니 사람들은 늘 ‘차선책’을 찾게 되고, 그래서 어긋난 성모 신심, 어긋난 신심행위들이 난무하게 되는 것입니다. 본질을 알지 못하고 정도를 걷기 싫으니 자꾸 엇나가기만 하는 거지요.
슈퍼에 과자는 사러 가고 싶은데 직접 걸어가기는 싫고, 그래서 동생을 시키는데 동생이라고 사러 가고 싶은 것도 아니고, 그래서 돈을 더 내고 동생을 꼬시는데 돈은 주기 싫고, 그래서 결국 동생을 협박해서 과자를 사러 보내는 겁니다. 그리고 동생은 그 일로 인해서 앙심을 품고 반드시 어떤 종류든 복수를 다짐하게 되는 거구요. 정도를 걸으면 조용할 일을 우리는 자꾸만 복잡하게 만드는 것이지요. 고해성사로 진심으로 뉘우치고 회개하면 될 것을 자꾸 엉뚱한 속죄의 길을 찾다 보니 가산도 탕진하고 정작 얻어야 할 속죄도 얻지 못하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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