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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련을 마주하는 인간

남이 한 못된 짓은 오래도록 기억에 남고, 내가 한 못된 짓은 금세 잊혀지고 맙니다. 그것이 인간의 기본 특성입니다. 우리의 눈은 밖으로 나 있고 그래서 언제나 남을 주시하도록 되어 있지요. 물론 우리의 양심이라는 것이 있어서 스스로를 안쪽으로 살피도록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그 기능은 곧잘 마비되곤 하지요. 양심이라는 것은 무뎌지기 일쑤이고 외부의 강한 자극 앞에서 그 기능을 상실해 버리고 맙니다. 배가 고파 죽겠는데 눈 앞의 맛있는 음식을 보게 되면 훔쳐먹고 싶은 것이 보통인 것이지요. 양심은 이때도 생생하게 살아 있지만 우리의 강한 욕구가 그것을 넘어서 버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평화의 시기 동안 안을 잘 살펴야 합니다. 그렇게 해서 힘을 마련해 놓지 않으면 시련의 시간이 다가올 때에 무너져 내리고 맙니다. 우리를 시험하는 시간은 반드시 다가오게 마련입니다. 우리의 인생 전체를 아울러 마냥 좋으리라는 것은 우리가 멋대로 상상한 이상향에 불과합니다. 인간은 누구나 적절한 시간이 되면 필요한 내면의 시련을 겪게 됩니다.

이 시련을 제대로 겪지 못하고 자꾸만 회피해 버리면 ‘영적으로 미숙한 이들’이 되고 맙니다. 외적으로는 중년이 되고 노년이 되어도 내면으로는 너무나도 어리숙한 떼쓰는 아이가 되고 말지요. 그런 사람은 만나서 대화를 나눠보면 알 수 있습니다. 늘 무언가에 집착해 있고 그 나이에 걸맞는 지혜가 없지요. 특히나 욕심이라도 내서 자기 자식들과 싸우기 시작하는 날이면 아주 추한 모습을 드러내고 맙니다.

시련이 다가올 때에 그것을 잘 껴안기 위해서는 의지의 결단이 필요합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그런 결심을 보시고 우리에게 필요한 힘을 불어넣어 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에게는 아쉬움이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겁쟁이가 되어 버리고 세상의 힘에 기대려고 하면 하느님은 그 기대고 있는 것들을 하나씩 둘씩 치워 버리고 말 것입니다.

돈에 기대다가 돈을 잃고, 가족에 기대다가 가족을 잃고, 건강에 기대다가 건강을 잃고… 이런 식이지요. 하느님은 우리가 철저히 당신의 자녀가 되기를 바라는 분이시고 우리가 다른 데에 한 눈 파는 것을 반기지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늘 마음을 다잡고 우리가 어디에서부터 길을 시작했는지 잊지 않게 되기를 바랍니다. 영원을 향해 나아가십시오. 영원하신 분이 다가와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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