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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해성사

미루고 미루고 또 미루어서 마지막에 보아야 하는 것, 반드시 나의 목소리를 알아차리지 못하는 신부님을 찾아서 보아야 하는 것, 1년에 두 번 이상 보면 죽는 줄 아는 것. 아마 이정도 설명이면 제가 무엇을 말하는지 아실 것입니다. 그 유명한 ‘한국교회의 판공’입니다.

다른 나라는 모르겠지만 남미에는 ‘판공’ 개념이 없습니다. 더군다나 성사표라는 것은 존재하지도 않지요. 고해성사는 자신의 죄를 아파하는 사람이 다가와서 보는 것입니다. 한국처럼 활동하는 신자수 현황 파악을 위한 수단으로 쓰이는 제도가 아니지요.

한국 신자들은 참으로 고분고분합니다. 한편으로는 참으로 아름다운 모습이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신앙의 주체성이 결여되어 있지요. 여전히 성숙하지 못해서 자신이 뭐가 필요한지 모르고 그래서 교회 눈치만 보고 있는 셈입니다. 열심히 잘 하고 있는데 그 가운데 손가락 하나 잘못 움직였다고 자신이 뭘 잘못한 줄 아는 너무나도 순진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지요.

규정에 대해서 묻고 또 묻고, 전례를 로마 교황청보다도 더 완벽하게 해 내고, 그러는 가운데 외적으로는 아름답고 화려하지만 내적으로 참된 생명을 주는 것이 메말라가는 셈입니다.

본래의 주제로 돌아와서 ‘고해성사’를 살펴봅시다. 고해성사는 내가 진정 하느님 앞에 죄스러이 느낄 때에 그 죄를 뉘우치고 하느님으로부터 기름부음받은 사제에게 나아가 죄를 고하고 그 입에서 나오는 직접적인 말씀으로 용서의 선언을 받고 기쁘게 새로이 태어나는 것을 말합니다.

헌데 이 거룩하고도 기쁨이 가득한 행위를 우리는 ‘의무’로 전락시켜 버리고 말았지요. 하기도 싫고 억지로 끌려가서 하고 나서도 찜찜한 행위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고해성사는 ‘수치’를 동반합니다. 아주 자연스럽고 당연한 이치이지요. 죄를 지은 사람은 ‘수치스러움’을 느낄 수 밖에 없습니다. 그 수치는 나를 구원으로 이끄는 좋은 것입니다. 헌데 그 ‘수치’를 경감시키려고 내 목소리를 아는 주임 사제가 아닌 다른 사제를 찾아 헤메는 모습은 결국 그 수치를 제대로 느끼지 못하게 해서 다음에 또 쉽게 그 같은 짓을 반복하게 만드는 결과를 낳게 됩니다.

최근 들어 한국 교회 내에 이 판공성사에 대한 논의가 있기는 했지만, 그 본질적 의미를 신자들에게 충분히 전해 주지는 못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저 판공의 수를 한 번 줄여 준 것이 전부일 뿐, 그 판공이라는 제도 자체가 변화된 것은 없어 보입니다. 거기에는 한국 교회의 현실적인 문제도 개입되어 있는 것이지요. 숫자와 통계를 좋아하는 이들에게 여전히 판공이라는 수단은 신자들의 현재 파악에 아주 유용하기 때문에 쉽게 버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고해성사에로 다가가십시오. 미뤄서 보지 말고, 마음이 아파서 보십시오. 비오 성인의 눈가에는 자신의 죄를 뉘우치느라 눈물이 마를 날이 없었다고 합니다. 우리로서는 언제든지 찾아가서 고해할 수 있는 환경이 있으니 얼마나 좋습니까? 남미에는 사제가 한 달에 한 번 겨우 찾아오는 곳이 여전히 수두룩 합니다. 매일 미사를 드리는 환경 속에서 살아가면서 소소한 부족함으로 투덜대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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