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하느님을 본 적이 없다. 아버지와 가장 가까우신 외아드님, 하느님이신 그분께서 알려 주셨다.(요한 1,18)
보여주면 보아야 하는데 보질 못합니다. 왜냐하면 받아들일 눈이 없기 때문입니다. 눈이 없어서 없는 게 아니라 눈을 감아 버렸기 때문입니다.
언제나 술이 떡이 되도록 마시는 사람에게 조심하라고 한다지만 그가 들을 귀가 없어서 듣지 않는 게 아닙니다. 그는 듣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그는 눈 앞의 알콜이 너무나 향긋하고 좋은 것이지요. 그래서 주변에서 그를 걱정하는 사랑과 애정 따위는 그 알콜의 향긋함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는 것이고 그 사랑과 애정과 관심을 누릴 줄 모르는 것입니다. 결국 그는 자신이 사랑한 알콜에게서 그 결과를 얻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라는 것은 그닥 좋은 모양새가 아닐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느님을 보여주었습니다. 하느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었지요. 하지만 사람들은 그런 하느님을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이 전한 가르침은 그래서 늘 ‘새로운 계명’, 한 번도 포장지를 뜯지 않은 계명으로 남을 뿐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을 아주 보이기 쉽게 드러내셨고, 우리 가운데 직접 사셨으며 우리처럼 말씀하시고 밥을 먹고 걸어 다니셨습니다. 사람들은 그분을 보았고 그분의 말씀을 들었지만 결국 그분을 못박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분의 가르침이라는 것은 지금의 자신들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었기 때문이지요.
지금도 예수님은 교회를 통해서 같은 말을 하시고 계시지만 지금의 세상은 그런 예수님은 필요가 없어 보입니다. 지금 세상은 그저 마음을 조금 편하게 하는 예수님을 원하지, 지금의 예수님처럼 늘 우리를 조금은 불편하게 해서 우리가 각성하게 하고 앞으로 나아가게끔 도와주는 예수님은 성가시다고 생각합니다. 시험 때문에, 대학 때문에, 직장 때문에 바쁜 가운데 예수님은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버릇처럼 하는 말, 하느님을 알고 싶다는 말은 거짓말입니다. 그들은 하느님을 알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그저 ‘자신에게 도움이 되는 하느님’을 알고 싶을 뿐입니다. 하지만 하느님이 자신들이 원하는 것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 순간부터 그들 스스로 하느님을 버리고 맙니다. 그래서 외아들 예수님은 결국 십자가에, 오늘날에도 십자가에 못박히고 계십니다. 왜냐하면 현대인들에게 하느님은 필요없기 때문입니다. 로마 시대에 자신들을 구원할 구원자가 필요했던 것처럼, 오늘날에는 경제를 활성화시키고 백성들을 구제해 줄 지도자가 필요하지 영원에 대해서 주절대는 하느님의 외아들 따위는 필요없다고 생각합니다.
보여주면 보아야 하는데 보질 못합니다. 왜냐하면 받아들일 눈이 없기 때문입니다. 눈이 없어서 없는 게 아니라 눈을 감아 버렸기 때문입니다.
언제나 술이 떡이 되도록 마시는 사람에게 조심하라고 한다지만 그가 들을 귀가 없어서 듣지 않는 게 아닙니다. 그는 듣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그는 눈 앞의 알콜이 너무나 향긋하고 좋은 것이지요. 그래서 주변에서 그를 걱정하는 사랑과 애정 따위는 그 알콜의 향긋함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는 것이고 그 사랑과 애정과 관심을 누릴 줄 모르는 것입니다. 결국 그는 자신이 사랑한 알콜에게서 그 결과를 얻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라는 것은 그닥 좋은 모양새가 아닐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느님을 보여주었습니다. 하느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었지요. 하지만 사람들은 그런 하느님을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이 전한 가르침은 그래서 늘 ‘새로운 계명’, 한 번도 포장지를 뜯지 않은 계명으로 남을 뿐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을 아주 보이기 쉽게 드러내셨고, 우리 가운데 직접 사셨으며 우리처럼 말씀하시고 밥을 먹고 걸어 다니셨습니다. 사람들은 그분을 보았고 그분의 말씀을 들었지만 결국 그분을 못박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분의 가르침이라는 것은 지금의 자신들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었기 때문이지요.
지금도 예수님은 교회를 통해서 같은 말을 하시고 계시지만 지금의 세상은 그런 예수님은 필요가 없어 보입니다. 지금 세상은 그저 마음을 조금 편하게 하는 예수님을 원하지, 지금의 예수님처럼 늘 우리를 조금은 불편하게 해서 우리가 각성하게 하고 앞으로 나아가게끔 도와주는 예수님은 성가시다고 생각합니다. 시험 때문에, 대학 때문에, 직장 때문에 바쁜 가운데 예수님은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버릇처럼 하는 말, 하느님을 알고 싶다는 말은 거짓말입니다. 그들은 하느님을 알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그저 ‘자신에게 도움이 되는 하느님’을 알고 싶을 뿐입니다. 하지만 하느님이 자신들이 원하는 것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 순간부터 그들 스스로 하느님을 버리고 맙니다. 그래서 외아들 예수님은 결국 십자가에, 오늘날에도 십자가에 못박히고 계십니다. 왜냐하면 현대인들에게 하느님은 필요없기 때문입니다. 로마 시대에 자신들을 구원할 구원자가 필요했던 것처럼, 오늘날에는 경제를 활성화시키고 백성들을 구제해 줄 지도자가 필요하지 영원에 대해서 주절대는 하느님의 외아들 따위는 필요없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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