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반미사에 가서 사람들을 기다리는데 절더러 마시라며 컵에 콜라를 채워서 가져다 주었습니다. 그래서 교리를 시작했습니다.
- 여러분 이 컵이 보이지요? 이 컵에 콜라를 담아 대접하려는데 여러분은 정말 더러운 컵을 쓸 건가요? 아니지요? 먼저는 컵을 잘 씻어내야 콜라를 담아서 대접할 수 있을 거예요. 그렇죠?
아기 예수님이 오시는데 과연 어디로 오실까요? 잘 꾸며진 구유를 통해서 오실까요? 아니지요. 저건 그냥 성탄 분위기 내려고 꾸며 놓은 것이지요. 아기 예수님은 다른 곳이 아니라 바로 여러분의 마음으로 내려오세요. 헌데 여러분들의 마음이 더러워져 있다면 그분을 모실 수 있을까요? 주교님이 집에 찾아오시는데 여러분들 집을 아주 더러운 모양새 그대로 남겨두실 건가요? 아니지요. 분명히 치울 거예요. 마찬가지예요. 아기 예수님이 오시는데 술에 쩔어 있는 마음, 아내를 때리는 마음, 아이들을 울리는 마음(대표적인 우리동네 3단 콤보 악행… 알콜중독, 가정폭력, 아동학대)이라면 예수님은 그런 마음에 오실 수가 없어요.
자, 그러니 마음을 깨끗이 하려고 노력하세요. 빛을 향해서 나아가셔야 해요. 하지만 어쩌지요. 이미 우리들의 마음은 ‘믿음을 갖기’에는 너무나도 굳어져 버린걸요. 젊은이들은 하느님이 없다고, 영혼 따위는 없다고 말하고 다니고 어른들은 하느님이 없는 삶을 얼마든지 살아가고 있지요. 그들의 눈에는 ‘돈’ 밖에 없는 것 같아요. 돈을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라도 하겠지만 하느님의 시선을 앞에 두고는 부끄러움이 없어 보여요. 그러니 어린 아이들도 자연스레 그런 모습을 보면서 하느님을 배우기는커녕 돈의 가치를 먼저 배우고 그 마음을 어지럽히는 것이지요.
사람은 태어날 때 새하얀 백짓장으로 이 세상에 와요. 그래서 거기에다가 얼마든지 새로운 것들을 적어 넣을 수 있어요. 헌데 과연 우리의 아이들에게 무엇을 적어주고 있을까요? 단순히 아이를 첫영성체반에 보낸다고 모든 일이 끝나는 걸까요? 성당에서 서로 사랑하라고 배운 아이가 집에 와 보면 부모들이 맨날 돈 때문에 다투고 있다면 과연 그 아이의 마음에 ‘사랑’이라는 것이 새겨질까요? 서로 용서하고 대화하라고 가르치고나면 집에 와서는 아빠가 엄마를 사정없이 쥐어패는 모습을 보는데, 아이들이 어떻게 용서와 대화를 배울까요? 그럼 그 아이가 크면 달라질까요? 우리는 가진 걸 내어놓을 수 밖에 없어요. 가지지 못한 건 주지를 못하지요. 그 아이가 받은 거라고는 힘의 논리 뿐인데 과연 그 아이가 부모라도 제대로 섬길까요? 엄마를 쥐어패던 아빠가 늙어 힘이 빠지고 나면 그 아빠를 제대로 봉양할까요? 결과는 뻔한 일이지요. 그 아이가 제 돈을 벌고 근육에 힘도 붙고 결국 아빠가 늙어 힘이 없어지고 나면 과연 무슨 일이 벌어질지는 아주 뻔한 일이지요.
빛을 받아들이세요. 하느님에게로 나아오셔야 합니다. 우리 마음 안에 희망을 심어야 해요. 그래서 하느님께로 나아가려는 열망을 키워야 합니다.
하지만 저는 압니다. 결국 저마다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할 거라는 걸 말이지요. 옛부터 예언자는 늘 존재해 왔지만 결국 사람들은 제 가고 싶은 곳으로 가버리고 말았지요. 안타깝지만 사실입니다. 아무리 성체가 좋다고 모셔야 한다고 해도 사람들은 밥이나 먹을 줄 알지 예수님의 몸을 맑은 마음으로 모실 생각을 하지 않아요. 그래서 교회혼도 하지 않으려고 하지요. 왜냐하면 교회혼을 하면 이혼을 하지 못한다는 걸 아니까요. 제 남편이랑 13년을 같이 살아오면서도 아직 남편을 믿지 못하고 두려워하며 언제라도 갈라설 준비를 하는 거지요. 그러니 그 마음에 어떻게 빛이 들어갈 수 있겠어요?
결국 저마다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합니다. 하지만 혹시라도 제 말을 듣고 하느님에게 돌아오려는 단 한 사람이 있다면 바로 그 사람을 위해서 저는 이런 말을 전하는 거예요. 그게 제 사랑이니까요. 사랑이라는 건 젊은 남녀가 만나 서로 입을 맞추는 게 아니라 상대를 위한 헌신을 말해요. 제가 왜 여기서 지금 이 미사를 드리고 있겠어요? 집에 가면 더 맛있는 밥이 있고 푹 쉴 수 있는데? 왠지 아세요? 여러분을 사랑하기 때문이에요. 그게 제 사랑이거든요. 하느님은 여러분을 사랑하세요. 그래서 더 기회를 주시는 거죠. 살아있는 동안 기회는 얼마든지 주어져요. 하지만 끝까지 저버린다면 하느님으로서도 어쩔 수 없는 노릇이지요.
우리의 지상의 삶은 ‘기회’랍니다. 선인에게는 선을 행할 기회, 악인에게는 회개할 기회인 셈이지요. 죽음이 다가오면 누구나 육신을 벗어놓고 제가 속한 곳에 가게 되어 있어요. 선인은 그에게 합당한 곳으로, 악인도 그에게 합당한 곳으로 향하게 되어 있지요. 그래서 우리의 생은 우리에게 주어진 기회랍니다. 그러니 그 기회를 잘 활용해야지요.
하느님은 아직도 우리를 사랑하세요. 잊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 여러분 이 컵이 보이지요? 이 컵에 콜라를 담아 대접하려는데 여러분은 정말 더러운 컵을 쓸 건가요? 아니지요? 먼저는 컵을 잘 씻어내야 콜라를 담아서 대접할 수 있을 거예요. 그렇죠?
아기 예수님이 오시는데 과연 어디로 오실까요? 잘 꾸며진 구유를 통해서 오실까요? 아니지요. 저건 그냥 성탄 분위기 내려고 꾸며 놓은 것이지요. 아기 예수님은 다른 곳이 아니라 바로 여러분의 마음으로 내려오세요. 헌데 여러분들의 마음이 더러워져 있다면 그분을 모실 수 있을까요? 주교님이 집에 찾아오시는데 여러분들 집을 아주 더러운 모양새 그대로 남겨두실 건가요? 아니지요. 분명히 치울 거예요. 마찬가지예요. 아기 예수님이 오시는데 술에 쩔어 있는 마음, 아내를 때리는 마음, 아이들을 울리는 마음(대표적인 우리동네 3단 콤보 악행… 알콜중독, 가정폭력, 아동학대)이라면 예수님은 그런 마음에 오실 수가 없어요.
자, 그러니 마음을 깨끗이 하려고 노력하세요. 빛을 향해서 나아가셔야 해요. 하지만 어쩌지요. 이미 우리들의 마음은 ‘믿음을 갖기’에는 너무나도 굳어져 버린걸요. 젊은이들은 하느님이 없다고, 영혼 따위는 없다고 말하고 다니고 어른들은 하느님이 없는 삶을 얼마든지 살아가고 있지요. 그들의 눈에는 ‘돈’ 밖에 없는 것 같아요. 돈을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라도 하겠지만 하느님의 시선을 앞에 두고는 부끄러움이 없어 보여요. 그러니 어린 아이들도 자연스레 그런 모습을 보면서 하느님을 배우기는커녕 돈의 가치를 먼저 배우고 그 마음을 어지럽히는 것이지요.
사람은 태어날 때 새하얀 백짓장으로 이 세상에 와요. 그래서 거기에다가 얼마든지 새로운 것들을 적어 넣을 수 있어요. 헌데 과연 우리의 아이들에게 무엇을 적어주고 있을까요? 단순히 아이를 첫영성체반에 보낸다고 모든 일이 끝나는 걸까요? 성당에서 서로 사랑하라고 배운 아이가 집에 와 보면 부모들이 맨날 돈 때문에 다투고 있다면 과연 그 아이의 마음에 ‘사랑’이라는 것이 새겨질까요? 서로 용서하고 대화하라고 가르치고나면 집에 와서는 아빠가 엄마를 사정없이 쥐어패는 모습을 보는데, 아이들이 어떻게 용서와 대화를 배울까요? 그럼 그 아이가 크면 달라질까요? 우리는 가진 걸 내어놓을 수 밖에 없어요. 가지지 못한 건 주지를 못하지요. 그 아이가 받은 거라고는 힘의 논리 뿐인데 과연 그 아이가 부모라도 제대로 섬길까요? 엄마를 쥐어패던 아빠가 늙어 힘이 빠지고 나면 그 아빠를 제대로 봉양할까요? 결과는 뻔한 일이지요. 그 아이가 제 돈을 벌고 근육에 힘도 붙고 결국 아빠가 늙어 힘이 없어지고 나면 과연 무슨 일이 벌어질지는 아주 뻔한 일이지요.
빛을 받아들이세요. 하느님에게로 나아오셔야 합니다. 우리 마음 안에 희망을 심어야 해요. 그래서 하느님께로 나아가려는 열망을 키워야 합니다.
하지만 저는 압니다. 결국 저마다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할 거라는 걸 말이지요. 옛부터 예언자는 늘 존재해 왔지만 결국 사람들은 제 가고 싶은 곳으로 가버리고 말았지요. 안타깝지만 사실입니다. 아무리 성체가 좋다고 모셔야 한다고 해도 사람들은 밥이나 먹을 줄 알지 예수님의 몸을 맑은 마음으로 모실 생각을 하지 않아요. 그래서 교회혼도 하지 않으려고 하지요. 왜냐하면 교회혼을 하면 이혼을 하지 못한다는 걸 아니까요. 제 남편이랑 13년을 같이 살아오면서도 아직 남편을 믿지 못하고 두려워하며 언제라도 갈라설 준비를 하는 거지요. 그러니 그 마음에 어떻게 빛이 들어갈 수 있겠어요?
결국 저마다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합니다. 하지만 혹시라도 제 말을 듣고 하느님에게 돌아오려는 단 한 사람이 있다면 바로 그 사람을 위해서 저는 이런 말을 전하는 거예요. 그게 제 사랑이니까요. 사랑이라는 건 젊은 남녀가 만나 서로 입을 맞추는 게 아니라 상대를 위한 헌신을 말해요. 제가 왜 여기서 지금 이 미사를 드리고 있겠어요? 집에 가면 더 맛있는 밥이 있고 푹 쉴 수 있는데? 왠지 아세요? 여러분을 사랑하기 때문이에요. 그게 제 사랑이거든요. 하느님은 여러분을 사랑하세요. 그래서 더 기회를 주시는 거죠. 살아있는 동안 기회는 얼마든지 주어져요. 하지만 끝까지 저버린다면 하느님으로서도 어쩔 수 없는 노릇이지요.
우리의 지상의 삶은 ‘기회’랍니다. 선인에게는 선을 행할 기회, 악인에게는 회개할 기회인 셈이지요. 죽음이 다가오면 누구나 육신을 벗어놓고 제가 속한 곳에 가게 되어 있어요. 선인은 그에게 합당한 곳으로, 악인도 그에게 합당한 곳으로 향하게 되어 있지요. 그래서 우리의 생은 우리에게 주어진 기회랍니다. 그러니 그 기회를 잘 활용해야지요.
하느님은 아직도 우리를 사랑하세요. 잊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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