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에 대해서 잠시 생각해 봅시다. 사람들이 착각하는 것은 ‘구원’을 마치 세상의 어느 위대한 업적 가운데 하나처럼 받아들인다는 것입니다. 즉 최선을 다해서 ‘따내는 무엇’으로 생각하지요. 물론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 이전에 이해를 바로 세워야 합니다.
구원은 나에게서 동떨어진 것을 열매 따듯 따서 내 주머니에 집어 넣고는 그때부터 내 마음대로 내가 원하는 것을 할 수 있는 무엇이 아닙니다. 구원은 내가 점점 되어가는 무엇입니다. 결국 나 자신이 ‘구원 안에 포함’되는 것이지요.
구원의 개념을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한 이방인이 어느 공동체에 받아들여 지는 것을 떠올려보면 됩니다. 처음 그 이방인은 자기 자신도 그 공동체에 소속감을 느끼지 못하고, 그 공동체의 입장에서도 이 이방인을 자신의 구성원으로 느끼지 못합니다. 하지만 이 이방인이 그 공동체 안에서 함께 머무르면서 그 공동체의 일을 걱정하고, 시간이 갈수록 그 공동체와의 삶을 함께 나누면서 결국 그 공동체의 뗄 수 없는 일원이 되는 것이지요. 그렇게 그는 더는 이방인이 아니게 되는 것입니다. 구원은 이러한 개념과 비슷합니다.
구원은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그걸로 끝입니다. 하지만 그 쉬워 보이는 일은 그냥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나는 하느님의 공동체의 일원이 되어가야 하는 것이지요.
내가 공동체의 일원이 되었나 아닌가 하는 것은 내가 세례를 받았나 아닌가, 내가 주일미사를 나가는가 아닌가로 분별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한 법적 규정의 준수는 구원 공동체의 소속됨의 표지가 될 수는 있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따로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같은 마음을 지니기’, 즉 ‘일치’입니다.
구원 공동체의 누군가가 심하게 아파하는데 그 아픔은 지금 내가 머무는 곳의 상황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고 한다면 둘 중의 하나는 분명 다른 공동체에 속한 사람입니다. 즉, 아파하는 자가 하느님의 뜻을 정면으로 거슬러서 스스로 아픔을 선택해서 아파하던가, 아니면 그 아픔을 지켜보는 자가 전혀 도와줄 마음이 없이 자신의 안락만을 추구하던가 하는 두 가지 경우가 있지요.
사실 우리는 구원 공동체에 들어오기를 거부하는 이들의 아픔에 대해서 ‘동정’할 수는 있지만 그들의 자유의지의 선택에 대해 어찌할 수 있는 부분은 없습니다. 술에 취해 아내를 때리지 말라고 몇 번을 충고를 해도 결국 스스로 술을 선택하고 아내를 때려 결국 아내를 잃어버린 이의 아픔을 두고 마냥 동정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그는 자신의 악행으로 받아야 할 고통을 받고 있는 것이니까요. 그는 이방인으로서 겪어야 할 고통을 겪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공동체 가운데 누군가가 사랑의 부족으로 아파하고 있다면 우리는 마땅히 가서 돌보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그걸 방관하고 있다면 그것은 필히 우리의 탓이고 우리 스스로 공동체에서 멀어지는 선택을 하는 셈입니다.
구원은 그렇게 한 몸을 이루어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모두가 한 몸이 될 수는 없습니다. 오직 한 머리를 함께 섬기는 이들만이 한 몸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신발을 몸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발은 나의 몸이지요. 그 이유를 스스로 성찰해보고 깨우쳐 나가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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