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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힘에 맞서는 올바른 방법

힘에 힘으로 맞서려면 더 큰 힘을 키우는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지 않고서는 절대로 나보다 더 힘이 센 상대를 이길 수 없습니다.

우리는 세상의 불의와 맞서 싸워야 합니다. 하지만 세상이 내세우는 힘의 원리를 그대로 따라해서 그들과 맞서 싸우려고 하면 결국 지고 맙니다. 왜냐하면 세상에서 그들의 힘은 막강하기 때문이지요.

우리가 싸우는 방법은 달라야 합니다. 우리는 가장 강력하신 분에게 기대는 방식을 써야 합니다. 그 방법이 없이 우리끼리 힘을 모아 맞서는 것은 결국 패배를 예상하고 달려드는 꼴과 같습니다.

세상의 누군가가 뭔가를 이루려 하는데 그걸 막아 보겠다고 나서지만 그런 시도가 안될 것은 뻔한 이야기입니다. 비록 그곳, 그 장소에 가로막을 수는 있을지 몰라도 결국 힘 있는 자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다른 방식으로라도 이루고 맙니다.

댐에서 터져 나오는 물줄기를 손가락을 틀어막아 막을 수 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본질은 ‘수압’을 제거하는 것입니다. 수압이 제거되지 않은 채로 구멍난 부분을 막는다고 막은 게 아니지요. 결국 손가락에는 힘이 빠지게 되고 그러는 동안 더욱 커진 수압은 다른 곳으로 물줄기를 쏟아내기 시작할 테니까요.

간단한 예로 어린 자녀들이 간절히 원하는 바가 있을 때는 그들을 힘으로 제압해서 막을 수 있습니다. 용돈을 빼앗거나 집안에 감금하는 식이지요. 하지만 핵심은 그게 아닙니다. 핵심은 그 아이 스스로 생각하게 해서 무엇이 잘못된 것이고 무엇이 바람직한 일인지를 분별하게 하는 것이지요. 그런 수압을 제거하는 일 없이 틀어막는 욕구는 반드시 다른 쪽으로 더욱 심한 반동으로 튀어나오게 마련입니다.

수압을 제거하는 작업은 마치 아무것도 하지 않는 듯이 보여도 보다 본질적인 작업입니다. 수압이 제거되는 날이 진정으로 평화가 이루어지는 날입니다. 물론 우리가 지상에 몸담고 있는 동안은 이 ‘수압’이라는 것은 마지막까지 제거되지 않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적어도 그러는 동안 우리는 많은 이들을 빛으로 이끌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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