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저녁 미사에서는 이런 이야기를 해 주었습니다.
“먼저 오늘 읽은 복음 안에서 두 구절을 잘 기억합시다. 모두 소리내어 따라하세요.
-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
-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하느님이 사람들을 죄에서 구원하시고 하느님이 그들과 함께 살아가면 그들은 무엇이 되는지 아십니까? 바로 성인이 됩니다. 성인들은 죄가 없고 하느님과 함께 머문 사람들이었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안타깝게도 사람들은 스스로 성인이 되지 못한다고 생각합니다.
‘에이… 죄투성이인 내가 어떻게 성인이 되겠어?’ 라는 것이 그들의 일상적인 변명입니다. 하지만 벌써 잊지는 않으셨지요?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 라는 구절 말입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죄에서 해방시키시기 위해서 당신 외아들을 보내 주셨습니다. 우리는 그분을 통해서 죄를 용서 받을 것이고 그로 인해 하느님과 함께 살게 되면서 충분히 성인이 될 수 있고 성인이 되어야 합니다.
지금부터 잘 들어 보십시오. 하느님의 자녀와 하느님의 자녀가 아닌 두 부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느님의 자녀들은 그들의 생활 자체가 기도가 됩니다. 그들은 가족을 만나도 기도를 하는 것이고 밥을 먹어도 기도 안에서 먹는 것입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축복을 이미 살고 있습니다.
반대로 하느님의 자녀가 아닌 이들은 하느님의 축복을 사야 합니다. 필요한 때에 하느님의 축복을 얻어내어야 하지요. 그래서 그들은 특별한 시간에 기도를 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 시간만 해방되고 나면 자신들이 원하는 세상적인 일들에 몰두하지요. 즉, 그들은 하느님을 사랑하는 게 아니라 하느님에게 필요한 것이 있을 뿐입니다. 그들은 실제로 그들의 찰나적인 것들… 즉 세상, 돈, 명예, 권력, 섹스와 같은 것들을 더욱 사랑합니다. 그리고 실제로는 하느님에게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하느님의 자녀가 아닌 이들은 하느님이 때때로 ‘필요’할 뿐 하느님과 함께 살아가지는 않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이 하느님이 필요하게 될 때가 다가옵니다. 자신들에게 허락된 시간이 끝나고 마지막이 다가올 때이지요. 예컨대 커다란 병이라도 걸리고 나면 그제서야 하느님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말기암 환자가 되고 나면 그때가서야 돈도 명예도 권력도 소용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고 비로소 하느님을 떠올리게 되는 것이지요. 하지만 그것은 그들의 자유로 그렇게 하는 게 아니라 의무지워진 셈입니다. 즉, 그들이 여전히 선택의 여지가 남아 있는 동안 하느님을 사랑으로 선택한 것이 아니라 세상의 모든 것을 빼앗기고 나서 울며 겨자먹기로 선택하는 것이지요. 그런 의무지워진 행위 속에는 사랑이 개입될 여지가 없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 의외로 많은 분들이 오셨는데, 왜 여기 머물러 있는지 압니다. 유아 세례 교육 때문에 와 계실테지요. 신부님이 미사 참석하고 가라고 명을 내리시니 아이들에게 세례를 주려면 어쩔 수 없이 남으셔야 할 겁니다. 하지만 여러분들의 참된 마음을 알아보는 참으로 쉬운 방법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다음 주 같은 날 미사에 과연 얼마나 사람들이 와 있는가를 보는 것이지요. 왜냐하면 그 때는 세례 교육이라는 의무가 없으니 진정 오고 싶은 분들이 미사에 올 테니까요. 사실 평소에 이 미사에 이렇게 많은 분들이 오지는 않습니다.
결국 저마다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뒤따라가게 되어 있습니다. 아무리 하느님이 좋다고 입으로 고백해 봐야 소용이 없습니다. 자신의 육신이 이미 좋아하는 것을 따라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치 한 남자가 여자를 앞에 두고 입으로는 그녀를 사랑한다고 믿어 달라고 하면서 두 눈은 옆을 지나가는 화려한 미모의 여성을 탐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앞에 있는 여자를 사랑하는 ‘척’ 할 뿐입니다. 마찬가지 일들이 신앙인들에게서 일어납니다. 수많은 신앙인들은 하느님을 사랑하는 척 하지만 실제로 그들의 마음은 세상의 것들에 더 많이 기울어져 있습니다. 그저 입으로만 신앙 고백을 하고 주일에 울며 겨자먹기로 주일미사에 나오지만 실제로는 술자리에 더 가고 싶고, 세상적인 이야기로 수다를 떨고 싶고, 이것을 사고 저것을 사고싶고 하는 마음이 더욱 지배적이지요.
우리는 성인이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일은 우리가 ‘원할 때’ 일어납니다. 하느님은 강요하시지 않으시니까요. 하느님은 그 누구에게도 강요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간절히 사랑하시지만 우리가 원치 않는다면야 하느님이 내미시는 모든 좋은 것들은 우리에게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하는 것입니다.”
물론 미사를 마치고 성당 문 앞에서 모두에게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먼저 오늘 읽은 복음 안에서 두 구절을 잘 기억합시다. 모두 소리내어 따라하세요.
-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
-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하느님이 사람들을 죄에서 구원하시고 하느님이 그들과 함께 살아가면 그들은 무엇이 되는지 아십니까? 바로 성인이 됩니다. 성인들은 죄가 없고 하느님과 함께 머문 사람들이었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안타깝게도 사람들은 스스로 성인이 되지 못한다고 생각합니다.
‘에이… 죄투성이인 내가 어떻게 성인이 되겠어?’ 라는 것이 그들의 일상적인 변명입니다. 하지만 벌써 잊지는 않으셨지요?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 라는 구절 말입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죄에서 해방시키시기 위해서 당신 외아들을 보내 주셨습니다. 우리는 그분을 통해서 죄를 용서 받을 것이고 그로 인해 하느님과 함께 살게 되면서 충분히 성인이 될 수 있고 성인이 되어야 합니다.
지금부터 잘 들어 보십시오. 하느님의 자녀와 하느님의 자녀가 아닌 두 부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느님의 자녀들은 그들의 생활 자체가 기도가 됩니다. 그들은 가족을 만나도 기도를 하는 것이고 밥을 먹어도 기도 안에서 먹는 것입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축복을 이미 살고 있습니다.
반대로 하느님의 자녀가 아닌 이들은 하느님의 축복을 사야 합니다. 필요한 때에 하느님의 축복을 얻어내어야 하지요. 그래서 그들은 특별한 시간에 기도를 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 시간만 해방되고 나면 자신들이 원하는 세상적인 일들에 몰두하지요. 즉, 그들은 하느님을 사랑하는 게 아니라 하느님에게 필요한 것이 있을 뿐입니다. 그들은 실제로 그들의 찰나적인 것들… 즉 세상, 돈, 명예, 권력, 섹스와 같은 것들을 더욱 사랑합니다. 그리고 실제로는 하느님에게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하느님의 자녀가 아닌 이들은 하느님이 때때로 ‘필요’할 뿐 하느님과 함께 살아가지는 않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이 하느님이 필요하게 될 때가 다가옵니다. 자신들에게 허락된 시간이 끝나고 마지막이 다가올 때이지요. 예컨대 커다란 병이라도 걸리고 나면 그제서야 하느님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말기암 환자가 되고 나면 그때가서야 돈도 명예도 권력도 소용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고 비로소 하느님을 떠올리게 되는 것이지요. 하지만 그것은 그들의 자유로 그렇게 하는 게 아니라 의무지워진 셈입니다. 즉, 그들이 여전히 선택의 여지가 남아 있는 동안 하느님을 사랑으로 선택한 것이 아니라 세상의 모든 것을 빼앗기고 나서 울며 겨자먹기로 선택하는 것이지요. 그런 의무지워진 행위 속에는 사랑이 개입될 여지가 없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 의외로 많은 분들이 오셨는데, 왜 여기 머물러 있는지 압니다. 유아 세례 교육 때문에 와 계실테지요. 신부님이 미사 참석하고 가라고 명을 내리시니 아이들에게 세례를 주려면 어쩔 수 없이 남으셔야 할 겁니다. 하지만 여러분들의 참된 마음을 알아보는 참으로 쉬운 방법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다음 주 같은 날 미사에 과연 얼마나 사람들이 와 있는가를 보는 것이지요. 왜냐하면 그 때는 세례 교육이라는 의무가 없으니 진정 오고 싶은 분들이 미사에 올 테니까요. 사실 평소에 이 미사에 이렇게 많은 분들이 오지는 않습니다.
결국 저마다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뒤따라가게 되어 있습니다. 아무리 하느님이 좋다고 입으로 고백해 봐야 소용이 없습니다. 자신의 육신이 이미 좋아하는 것을 따라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치 한 남자가 여자를 앞에 두고 입으로는 그녀를 사랑한다고 믿어 달라고 하면서 두 눈은 옆을 지나가는 화려한 미모의 여성을 탐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앞에 있는 여자를 사랑하는 ‘척’ 할 뿐입니다. 마찬가지 일들이 신앙인들에게서 일어납니다. 수많은 신앙인들은 하느님을 사랑하는 척 하지만 실제로 그들의 마음은 세상의 것들에 더 많이 기울어져 있습니다. 그저 입으로만 신앙 고백을 하고 주일에 울며 겨자먹기로 주일미사에 나오지만 실제로는 술자리에 더 가고 싶고, 세상적인 이야기로 수다를 떨고 싶고, 이것을 사고 저것을 사고싶고 하는 마음이 더욱 지배적이지요.
우리는 성인이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일은 우리가 ‘원할 때’ 일어납니다. 하느님은 강요하시지 않으시니까요. 하느님은 그 누구에게도 강요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간절히 사랑하시지만 우리가 원치 않는다면야 하느님이 내미시는 모든 좋은 것들은 우리에게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하는 것입니다.”
물론 미사를 마치고 성당 문 앞에서 모두에게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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