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사로 다른 나라에 와서 지내다보면 한국에 와 있었던 선교사들에게 이었을 법한 일들도 되새겨볼 수 있게됩니다. 모든 일이 그렇지만 선교에도 정사와 야사가 있게 마련입니다.
정사는 멋들어진 이야기입니다. 대구교구에도 볼리비아 선교 ‘정사’가 있습니다. (https://www.lightzine.co.kr/last.html?p=v&num=2101) 빛잡지의 기사 가운데 하나로 잘 정리되어 있지요. 하지만 실제로 일어난 일들은 거기에 적힐 수가 없습니다. 그저 좋고 아름다운 이야기들로만 채워질 뿐이지요. 제가 강도를 당하고, 개미에 물려 쓰러지고, 이런 저런 일들로 사기를 당하고 하는 그런 야사들, 그리고 선교사 개개인의 특성으로 인해 야기되는 일들, 현지 사람들과의 충돌과 화해, 선교사의 잘못 등등은 오직 야사로만 전해질 뿐입니다.
한국 교회의 초창기 선교사들은 어떠했을까요? 언뜻 우리가 접하는 다큐와 여러가지 책들 속에서 선교사의 모습은 마냥 아름다워 보이기만 하고 애처롭고 안쓰러워 보이기조차 합니다. 하지만 때로는 정반대였을 수도 있습니다. 선교사라고 해서 하느님이 더 완벽함을 선물하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소위 당시의 서양의 선진 문물을 안고 이역만리 아시아의 초라한 땅에 온 그들에게서 생각지도 못한 ‘교만함’이 드러날 수도 있고, 하느님의 일을 하기보다 자신의 이름을 드러내기 위한 ‘명예욕’에 사로잡힌 프로젝트에 매진할 수도 있고, 가난한 나라에 산다는 것을 빌미로 부자 나라에서 막대한 자금을 끌어들이는 ‘물질적 탐욕’에 사로잡힐 가능성도 다분한 것이지요. 하지만 그런 야사들은 역사 속에 묻히고 우리는 아름다운 선교사들의 이야기만을 차곡차곡 쌓아놓은 셈입니다.
하느님은 모든 것을 지켜보고 알고 계십니다. 그리고 하느님은 심지어 인간의 악한 모습에서도 당신이 행하실 선한 바를 이루시는 분이십니다. 결국 하느님의 뜻에 동참한 이들만이 영원의 기쁨을 누리게 되는 것이지요.
모든 일은 지나갑니다. 제아무리 피라미드를 쌓아도 시간이 지나고 나면 무덤의 미이라로 남을 뿐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를 기억하지도 않습니다. 오직 하느님만이 영원하실 뿐이고 그분의 마음에 동참하는 이들만이 영원하게 빛날 것입니다. 인간들이 예언자의 아무리 꾸미고 가꾸어도 다시 예언자는 나타날 것이고 사람들에게 천시 당하고 핍박 당하고 돌을 맞아 죽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나서야 사람들은 다시 그 예언자의 무덤을 꾸미기 시작할 것입니다. 예언자는 죽어야 예언자인 것이지요. 무시당하고 핍박 당해야 예언자인 것입니다. 예언자가 고위 관료직에 앉아서 부유한 이들과 우정을 나누었다는 말은 단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그가 그리스도의 제자라고 해서 물 한 잔이라도 대접하는 이들은 그 상급을 잃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에게 물을 내어주기는 커녕 도리어 식초를 맛보라고 내어주는 이들이 있으니 그럼에도 예수님은 그 식초를 맛을 보고 다 이루었다고 하십니다. 과연 우리들에게 그 예언자를 분별해 낼 올바른 시선이 있을까요?
정사는 멋들어진 이야기입니다. 대구교구에도 볼리비아 선교 ‘정사’가 있습니다. (https://www.lightzine.co.kr/last.html?p=v&num=2101) 빛잡지의 기사 가운데 하나로 잘 정리되어 있지요. 하지만 실제로 일어난 일들은 거기에 적힐 수가 없습니다. 그저 좋고 아름다운 이야기들로만 채워질 뿐이지요. 제가 강도를 당하고, 개미에 물려 쓰러지고, 이런 저런 일들로 사기를 당하고 하는 그런 야사들, 그리고 선교사 개개인의 특성으로 인해 야기되는 일들, 현지 사람들과의 충돌과 화해, 선교사의 잘못 등등은 오직 야사로만 전해질 뿐입니다.
한국 교회의 초창기 선교사들은 어떠했을까요? 언뜻 우리가 접하는 다큐와 여러가지 책들 속에서 선교사의 모습은 마냥 아름다워 보이기만 하고 애처롭고 안쓰러워 보이기조차 합니다. 하지만 때로는 정반대였을 수도 있습니다. 선교사라고 해서 하느님이 더 완벽함을 선물하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소위 당시의 서양의 선진 문물을 안고 이역만리 아시아의 초라한 땅에 온 그들에게서 생각지도 못한 ‘교만함’이 드러날 수도 있고, 하느님의 일을 하기보다 자신의 이름을 드러내기 위한 ‘명예욕’에 사로잡힌 프로젝트에 매진할 수도 있고, 가난한 나라에 산다는 것을 빌미로 부자 나라에서 막대한 자금을 끌어들이는 ‘물질적 탐욕’에 사로잡힐 가능성도 다분한 것이지요. 하지만 그런 야사들은 역사 속에 묻히고 우리는 아름다운 선교사들의 이야기만을 차곡차곡 쌓아놓은 셈입니다.
하느님은 모든 것을 지켜보고 알고 계십니다. 그리고 하느님은 심지어 인간의 악한 모습에서도 당신이 행하실 선한 바를 이루시는 분이십니다. 결국 하느님의 뜻에 동참한 이들만이 영원의 기쁨을 누리게 되는 것이지요.
모든 일은 지나갑니다. 제아무리 피라미드를 쌓아도 시간이 지나고 나면 무덤의 미이라로 남을 뿐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를 기억하지도 않습니다. 오직 하느님만이 영원하실 뿐이고 그분의 마음에 동참하는 이들만이 영원하게 빛날 것입니다. 인간들이 예언자의 아무리 꾸미고 가꾸어도 다시 예언자는 나타날 것이고 사람들에게 천시 당하고 핍박 당하고 돌을 맞아 죽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나서야 사람들은 다시 그 예언자의 무덤을 꾸미기 시작할 것입니다. 예언자는 죽어야 예언자인 것이지요. 무시당하고 핍박 당해야 예언자인 것입니다. 예언자가 고위 관료직에 앉아서 부유한 이들과 우정을 나누었다는 말은 단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그가 그리스도의 제자라고 해서 물 한 잔이라도 대접하는 이들은 그 상급을 잃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에게 물을 내어주기는 커녕 도리어 식초를 맛보라고 내어주는 이들이 있으니 그럼에도 예수님은 그 식초를 맛을 보고 다 이루었다고 하십니다. 과연 우리들에게 그 예언자를 분별해 낼 올바른 시선이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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