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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이 진리를 만나게 되면

어둠이 진리를 만나게 되면 그 첫 반응은 밀려남입니다. 어두운 방에 촛불을 들고 들어가는 것을 상상해 보시면 됩니다. 초가 놓이는 곳마다 어둠이 밀려나고 빛이 채워지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이 어둠은 단순한 물리적 어둠이 아닙니다. 이 어둠은 인격적 어둠입니다. 어둠 속에 살아온 인격이지요. 그래서 이 어둠은 그 반작용을 시작합니다. 즉 빛을 몰아내려고 하지요. 그래서 빛이 나약하면 어둠에 의해서 제압당하기 쉽습니다. 영적 초보자들이 흔히 저지르는 실수 가운데 하나이지요. 이제 겨우 빛의 가르침을 받아들이면서 마치 스스로 위대한 스승이라도 되는 듯이 어둠에 대적하려 드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큰 코를 다치곤 합니다.

그래서 어둠에 들어서는 빛은 충분히 강해야 합니다. 촛불의 연약한 빛이 아니라 숯불의 쇠도 녹일 정도로 뜨겁지만 겉으로는 은은한 빛이어야 합니다. 작은 바람에 제압당하지 않고 바람으로 인해 더욱 커지는 빛이어야 합니다.

대뜸 너무나 뜨겁고 강한 빛을 들이밀면 이 ‘인격적 어둠’은 타버리고 맙니다. 그래서 아주 은은한, 하지만 내적으로는 강력한 빛으로 다가서야 합니다. 그리고 조금씩, 아주 조금씩 빛을 밝혀 주어야 합니다. 어둠이 점점 빛에 적응하게 말이지요. 이 작업은 아주 미묘하고 섬세한 작업이 되어야 합니다. 많은 훈련을 필요로 하고 경우에 따라서 상당한 시간이 소요되는 작업이기도 합니다.

만일 이 인격적 어둠이 빛을 수용하기 시작한다면 그 인격적 어둠은, 빛으로 변화되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여전히 어둠이 많이 끼어있는 나약하고 연약한 빛이지요. 그래서 서두르면 안됩니다. 조금씩 천천히 밝혀 나가야 합니다.

물론 빛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더욱 어둠 속으로 밀려 들어가는 이들도 존재합니다. 이들은 스스로의 길을 선택한 셈이지요. 빛을 즐기지 못하는 존재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들어도 듣지 못하고 보아도 보지 못하여 깨닫지 못하고 돌아올 수 없는 존재들이 되고 마는 것이지요.

하지만 빛을 바라본 이들, 빛을 체험한 이들, 그리고 자신들 안에 빛에 대한 원의가 생겨난 이들은 변화되기 시작합니다. 물론 변화되는 동안 빛을 쬐어 주어야 하지만, 일정 시간이 지나고 나면 스스로 타오르기 시작합니다. 그러면 비로소 한 영혼을 얻은 셈이 되지요. 그리고 그 영혼은 시간이 흘러 다른 영혼들을 향해 빛을 비추러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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