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빈 무덤을 향해 달려가는 장면에서 늘 ‘베드로와 요한’을 떠올립니다. 하지만 복음을 주의깊게 읽어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건 바로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다른 제자”라는 것입니다.
요한이 아닙니다. 아무리 뒤져보아도 ‘요한’이라는 이름은 나오지 않습니다. 십자가 아래에서 당신의 어머니 마리아를 부탁할 때에도 같은 표현이 등장합니다. 요한이 아니라 ‘예수님이 사랑하신 제자’입니다.
복음사가는 요한의 자리에 우리 모든 신앙인을, 그 중에서도 예수님의 사랑을 받을만한 신앙인을 놓고 싶었던 겁니다. 즉, 우리가 직접 그 장면 안으로 뛰어들기를 바랬던 것이지요.
자,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살펴봅시다. 베드로와 예수님의 사랑을 받는 다른 제자가 달려갑니다. 누가 이겼을까요? 아무래도 베드로보다 다른 제자가 더 젊고 힘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베드로는 바위라고 불린 교회의 반석입니다. 교회의 ‘기초, 규율, 근본’을 상징합니다. 그래서 좀 무겁습니다. 반면 다른 제자는 아주 날랩니다. 그 제자는 ‘사랑’을 상징하지요.
무슨 일이 일어나면 ‘사랑’이 늘 먼저 도착합니다. 어떤 기적이 일어나든지 그 자리에는 교회가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성인은 교회가 분석해서 정의한 사람이기 이전에 먼저 사랑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 사랑하는 사람을 교회가 뒤늦게 성인으로 선포한 것이지요.
그렇습니다. 제가 하고 싶은 말은 다 한 셈입니다. 먼저는 사랑이 달려갑니다. 하지만 그 사랑은 교회에 자리를 양보합니다. 그리고 교회가 와서 보고 확인하고 그 뒤에 다시 사랑이 들어와서 그 확인된 자리를 채우는 것입니다.
모든 신심 단체는 위의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그래서 위의 과정 없이 제멋대로 설치는 이들을 조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저 사랑만 가득하다고 만사가 다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치유를 받은 나병 환자들에게 ‘사제에게 가서 몸을 보이라’고 명하신 분이십니다. 교회는 분명한 존재이유가 있습니다. 하느님과 바로 이야기가 된다고 해서 교회를 무시해서는 안됩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베드로를 반석으로 세우셨고 그 기초 위에 당신의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교회가 아무리 늦고 지지부진하고 더디더라도 사랑은 늘 먼저 교회에 자리를 양보해야 합니다. 그 순명 안에서 비로소 올바른 사랑이 싹트기 때문입니다.
잊지 마십시오. 비록 다른 제자가 이겼지만 베드로에게 자리를 양보하였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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