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현인들은 인생의 목적에 대해서 이미 다 고민해 두었습니다. 그리고 그 결론들은 ‘지혜서’에 모아져 있지요. 잠언과 코헬렛, 집회서와 같은 책들은 그 지혜의 정수들을 담아 놓았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살아가는 이유는 뭔가 대단한 것이 되자는 것이 아닙니다. 그건 저마다 주어지는 기회에 따라서 그렇게 살아갈 것일 뿐이지요. 왕의 후손으로 태어나는 이도 있고, 노예의 자식으로 태어나는 사람도 있고 저마다의 자리에서 삶을 부여받는 셈입니다. 시작도 그러하고 마침도 그러하지요. 그러니 우리가 부요하게 되거나 가난하게 되거나 하는 것은 절대적인 삶의 지표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하지만 한 인간이 행복하게 사는가 아닌가 하는 것은 저마다의 몫에 달려 있는 셈입니다. 부자라고 마땅히 행복한 법도 없고 가난한 이라고 무조건 불행한 법도 없지요. 저마다의 자리에서 주어진 책무에 열심하면서 행복하게 사는 것이 중요한 셈입니다.
뜻밖의 죽음의 모습을 접하고 우리들은 놀라지만, 실제로 하느님에게 모든 것은 ‘의외인’ 것이 없습니다. 하느님은 모든 이의 삶을 알고 계시고 그에 가장 적합한 마무리를 주시는 것이지요. 누군가는 제 명을 다 하고 죽고, 누군가는 일찍 간다지만 그 모두에게 똑같이 적용되는 것은 그 누구도 구체적으로 언제 갈 지는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오로지 하느님이 모든 것을 주도하시지요.
물론 제 명을 깎을 수는 있습니다. 미친듯이 담배를 피고, 술로 몸을 해치는 사람이 제 명을 다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요. 저마다 자신이 스스로에게 해를 끼치는 만큼 주어진 목숨을 소비하게 마련입니다. 물론 반대의 경우도 가능하겠지요. 타인을 위해 열심히 일하는 이들은 하느님의 눈에 들어 보다 더 긴 수명을 얻을지도 모릅니다. 새로운 기회를 부여받는 것이지요.
우리의 생애 동안 우리의 삶의 지표를 올바로 정하고 매진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아마 저마다 정한 것이 이미 존재할 것입니다. 모쪼록 그 최종지표가 하느님이고 순간 순간마다 방향 점검을 잘 해서 어긋나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사람이 세상을 다 얻는다 해도 자신의 영원한 삶을 잃어버린 다면 그만큼 어리석은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살아가는 이유는 뭔가 대단한 것이 되자는 것이 아닙니다. 그건 저마다 주어지는 기회에 따라서 그렇게 살아갈 것일 뿐이지요. 왕의 후손으로 태어나는 이도 있고, 노예의 자식으로 태어나는 사람도 있고 저마다의 자리에서 삶을 부여받는 셈입니다. 시작도 그러하고 마침도 그러하지요. 그러니 우리가 부요하게 되거나 가난하게 되거나 하는 것은 절대적인 삶의 지표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하지만 한 인간이 행복하게 사는가 아닌가 하는 것은 저마다의 몫에 달려 있는 셈입니다. 부자라고 마땅히 행복한 법도 없고 가난한 이라고 무조건 불행한 법도 없지요. 저마다의 자리에서 주어진 책무에 열심하면서 행복하게 사는 것이 중요한 셈입니다.
뜻밖의 죽음의 모습을 접하고 우리들은 놀라지만, 실제로 하느님에게 모든 것은 ‘의외인’ 것이 없습니다. 하느님은 모든 이의 삶을 알고 계시고 그에 가장 적합한 마무리를 주시는 것이지요. 누군가는 제 명을 다 하고 죽고, 누군가는 일찍 간다지만 그 모두에게 똑같이 적용되는 것은 그 누구도 구체적으로 언제 갈 지는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오로지 하느님이 모든 것을 주도하시지요.
물론 제 명을 깎을 수는 있습니다. 미친듯이 담배를 피고, 술로 몸을 해치는 사람이 제 명을 다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요. 저마다 자신이 스스로에게 해를 끼치는 만큼 주어진 목숨을 소비하게 마련입니다. 물론 반대의 경우도 가능하겠지요. 타인을 위해 열심히 일하는 이들은 하느님의 눈에 들어 보다 더 긴 수명을 얻을지도 모릅니다. 새로운 기회를 부여받는 것이지요.
우리의 생애 동안 우리의 삶의 지표를 올바로 정하고 매진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아마 저마다 정한 것이 이미 존재할 것입니다. 모쪼록 그 최종지표가 하느님이고 순간 순간마다 방향 점검을 잘 해서 어긋나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사람이 세상을 다 얻는다 해도 자신의 영원한 삶을 잃어버린 다면 그만큼 어리석은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댓글